"삼춘이, 매미고기 먹어본 적 있슴메?"
[이주노동자, 재중동포, 새터민들의 좌충우돌 생활기 7] 중국 오지마을의 북녘동포분들
지난 여름 인천항. 대한민국 경기도 안산시에서 코리안 드림을 이루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노동자, 재중동포 노동자, 그리고 중국 오지에서 숨어살고 계시는 북녘주민 몇 분을 만나기 위해 지난 7월23일 중국행 배를 탔다.
지난 여름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사정을 돌아봐야만 하는, 바로 북녘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 단체는 1998년부터 중국에서 유리걸식하는 북녘동포들에게 작은 쉼터와 끼니를 대접해오는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2000년대 들어 일부 ‘기획망명’을 시도하던 몇몇 돌출 활동가들에 의해 중국 전역의 상황이 아수라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단체는 중국 공안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아주 조용히 물 밑에서 북녘 출신의 동포들을 도와왔다.
그러던 중 기획망명 등의 사건들로 탈북자 문제가 이슈화 되면서 중국 당국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고, 곳곳에서 중국 당국의 눈 밖에 나지 않게끔 탈북자 지원활동을 하던 우리 단체마저 2003년 끝내 활동을 접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중국 내에서의 활동이 소강국면에 접어든 이후에도 간간이 그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브로커나 혹은 활동가들을 만나 끝내 한국행 티켓을 거머쥐기도 했단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끼니를 때울 다른 방도가 없어 어딘가로 팔려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중국의 어느 시골에서 평생을 저당 잡힌 채 노동을 하기도 한다고. 그러나 중국땅에 사는 북녘 주민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학대를 당하거나 인권유린을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여름 우리가 만났던 이들은 중국 땅에서 중국 분들을 만나 더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인생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분들과 연락이 닿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서로 전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는 모습을 지켜보아오던 참에, 그분들 중 한분이 몸이 좀 안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인천항을 떠난 지 16시간이 흐르고 칭따오 항에 도착했다. 시속 10여 노트의 속도로 서울 부산 간 거리보다 조금 더 되는 580여km를 항해하면, 한 때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의 이국적인 항구 칭따오가 나온다. 오후 5시 30분에 출발해 다음날 오전 9시에 도착했다. 중국인 친구 안 선생이 마중 나왔다. 공자선생과 고향이 같은 유학자 가문의 젊은 청년, 안 선생에게 유창한 영어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북녘동포 분들이 화목하게 잘 사는 그 이름 모를 중국의 시골로 향했다.
얼마나 갔을까? 차를 타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오전 10시에 출발한 자동차는 새벽 12시가 넘어도 멈출 줄을 모른다. 끝도 없이 이어진 백양나무 숲을 가로지르며 포장되지 않은 황톳길을 해가 저물어 달이 밤하늘 깊이 솟아오를 때까지 달리고 달렸다. 우리는 결국 새벽녘에서야 목적지에 이르렀다.
가로등은 물론이고, 불빛이라곤 하나 없는 그야말로 오지다. 깊은 밤, 자동차소리가 요란스럽게도 마을주민들을 깨운 탓일까? 마을 어귀에서부터, 골목골목에 이르기까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시간은 이미 새벽 2시를 지났다.
북녘에서 온 강씨 아주머니네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붉은색 벽지로 온통 도배를 한 나무대문에는 '복(福)'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문가에는 송아지 한 마리가 누워있다
자동차 불빛을 받아 겁을 먹고 벌떡 일어선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에 앉아있던 이씨 아주머니가 우리 일행에게로 뛰어온다. 집안은 온통 잔치분위기다.
시커멓게 내려앉은 먼지에 빛 바랜 자주색 슬레이트 지붕에, 차가운 흙바닥 마루에는 우리가 온다고 노란색 꽃무늬 장판을 덧입혔다. 시멘트와 흙벽돌을 어줍지 않게 쌓아올린 집 벽에는 여름 한철 살이 도톰하게 오른, 올챙이 머리를 한 어여쁜 도마뱀들이 이방인들을 구경하기 위해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당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밤이 맞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자강도에서 오신 분, 황해도에서 오신 분, 금강산 너머 강원도에서 오신 분. 이렇게 세 분의 북녘주민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다. 북녘에서 나오신 후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 이곳까지 왔는데, 다행히 인심 좋기로 유명한 이 시골에 와 좋은 배우자를 만났고 화목한 가정을 이뤄 잘 살고 있었다.
해당 지역 중국공안에서도 다 알고 있지만, 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중국인의 가정에 들어와서 행복하게 잘 살면서 지역에도 여러 가지로 좋은 기여를 하고 있어서 조용히 눈을 감아준다고 한다. 다만 돌출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는 머무는 동안 더욱 조심스럽게 마을에서 지내기로 했다.
새벽녘 동이 틀 때까지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사람들이 이국땅에 정착하여 살기까지 쌓인 사연들이 오죽할까? 아침이 되기까지 중국 오지마을에서 펼쳐진 때 아닌 잔치를 마칠 무렵, 우리는 서서히 피곤함을 느꼈고 잠이 들었다.
강씨 아주머니가 나를 깨운다.
“삼춘이! 일어나기오!”
16시간 동안 배를 타고, 한 나절 넘게 차를 탔다. 그리고 밤을 지새면서 잔치를 벌였다. 몸이 피곤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강씨 아주머니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계속해서 우리를 재촉했다.
“삼춘이! 일어나기오! 같이 온 삼춘들도 다들 일어나기오!”
나는 강씨 아주머니 옆에 친척들이 다 함께 와 있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어 지친 몸을 추슬러 일어나 일행을 깨웠다.
“아. 죄송해요. 어젯밤, 아 아니 오늘 아침 너무 늦게 자서…. 그런데 무슨 급한 일 있는 건 아니죠?”
나는 비몽사몽간에 이렇게 물었다.
“아니 삼춘네 아침식사 해야하잖소! 얼른 일어나서 이쪽으로 오기오!”
밤새도록 무언가를 먹어댔는데 아침을 먹으라는 말에 적지 않게 놀랐지만, 우리가 손님으로 와있다는 생각에 이분들이 말씀하시는 대로 다 따라야할 것 같아 우리는 강씨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담배 밭, 수수밭이다. 누군가 미리 설계를 하고 동네를 만들었을까? 집도, 마을도, 밭도 모두 바둑판이다. 끝없이 이어진 길 위의 길들, 밭 건너 밭들, 집 뒤의 집들, 골목 이어 골목들이다.
한 이십 리는 간 듯하다. 앞서 가는 강씨 아주머니에게 나는 몇 번을 주저하다 물었다.
“아니 아주머니, 무슨 대단한 음식을 차리셨기에 이렇게 아침 먹으러 한도 끝도 없이 간답니까?”
“아 삼춘이네 오신다기에 이 마을 사람들이 아주 특별한 음식을 만들었지미. 어젯밤에 이 마을 아이들 한 숨도 못 잤지미.”
나는 마을 아이들이 한 숨도 못 잤다는 말이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내가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 나온다고 해도, 이 고장 특별 메뉴일테니 사양하지 말고 실컷 먹어둬야겠다’라고 혼자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드디어 20리 길을 훌쩍 넘어 조반이 준비된 친척집에 다다랐다. 집의 구조는 역시나 똑같았다. '복'자가 새겨진 빨간 나무대문을 지나니 마을주민들이 상을 다 차려놓았고 뛰어놀던 아이들은 난생 처음 외국인을 보는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정지한 채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밤새도록 준비한 그 음식을 먹을 사람들에 대한 신기함과 부러움이 섞여있는 듯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식탁으로 다가갔다.
대충 보아도 반찬이 스무 가지는 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중국음식 가짓수 많은 것은 이미 원곡동 생활 몇 년 만에 다 터득한 터, 적어도 나에겐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다. 이렇게 풍성한 음식을 차려주심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거푸 드리는 나는 속으로 ‘에게… 생각했던 이 고장만의 특벽한 음식은 없네’하면서 약간 실망을 했었다.
나는 하느님께 기도를 마치고 젓가락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계란부추볶음에 젓가락을 가져가는 순간, 강씨 아주머니가 식사를 제지하신다.
“아니지 삼춘이. 아직 아니지뭐이. 이제 오늘 젤로 중요한 음식이 나와야 식사 시작하지뭐이. 야야! 빨리 가져오지 않고 뭐하네! 어이?”
강씨 아주머니는 부엌을 향해서 성화를 부리신다.
그럼 그렇지 하며 뭔가 잔뜩 기대를 하는 순간, 부엌에서 한 아주머니가 큰 접시에 뭔가 가득 담아 나오셨다.
‘양꼬치일까? 혹은 민물에서 잡은 가재? 아니면 산속에서 따온 특이한 나무열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드디어 음식이 밥상위에 놓여졌다.
그러나 음식을 보는 순간 나는 아연실색했다. 우리를 위해 특별히 마련했다는 오늘의 특별메뉴는 다름 아닌 매미, 매미고기인 것이다.
하얀 접시 위에 아직 탈피를 채 마치지 않은 약충(若蟲) 매미 수십 마리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정신이 멍해져 젓가락을 잡은 채 한참 숨을 죽이고 있는 내가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보였는지 강씨 아주머니가 한 말씀 거드신다.
“귀한 거니까 사양하지 말고 어서 들기셔이. 어젯밤에 저 아들 몽땅 다 후라씨 들고 잠 못자고 저거 잡느라고 고생했지뭐이!”
채식에서 육식으로 바꾼 지 얼마 안 된 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뭐 양고기를 적당히 구워 꼬치에 구운 ‘양고기 촬’이나 경회루에서나 삼직한 민물고기를 냄비 가득 통으로 찐 ‘잉어찜’ 정도야 얼마든지 맛나게 먹어줄 만도 하다만….
나는 아이들이 밤새 한숨도 못자고 우리를 위해서 잡았다는 이야기에 눈물을 머금고 매미를 집어 들었다. 한 컵 가득 입을 헹궈낼 참으로 칭따오 맥주를 왼손에 붙잡고 매미를 힘껏 깨물었다. 튼실하게 살이 들어찬 허리와 복부, 그리고 단단하게 굳어져가는 머리 부분이 고단백인 매미는 그렇게 아삭아삭 내 입에서 잘게 부서졌다. 아이들이 부러움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입 속에서 금방이라도 약충이 탈피를 하여 날개짓을 하며 앵앵 울어댈 것만 같다. 나는 심호흡을 한 채 매미 몇 마리를 연이어 깨문 후 바로 잔꾀를 생각해냈다.
“아주머니. 밤새도록 저 꼬마들이 저희를 위해서 수고했는데 아이들도 함께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럴까? 그래도 귀한 건데, 그러면 안 되지뭐이!”
나는 만류하는 강씨 아주머니를 끝끝내 설득해 아이들을 내 밥상으로 끌어들였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젓가락을 집어 들기 무섭게 매미를 먹기 시작했다. 한 접시 가득 찼던 매미가 금세 동이 났다. 뜻밖에 귀한 음식을 함께 나누어먹은 아이들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느새 나에게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마련된 식사를 힘겹게 마치려는 순간 강씨 아주머니가 다시 요리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
“삼춘이. 아저씨(남편)가 그러는데 매미 요리는 나무에 달린 것 바로 잡아서 요리하는 게 제일 맛있다지 뭐이. 고저 날개를 쫙쫙 찢어가지고 바로 냄비에 기름 넣고 볶으면 맛이 그만이지 뭐이. 한국에 매미 없간디? 여기서 요리 배우고서 한국에 가면 그렇게 해드시라우!”
식사를 마치고 20여리 되는 길을 다시 걸어오는데, 간밤에 밤을 지새우며 매미 약충을 구했을 아이들이 자꾸만 떠올라 고마움과 미안함에 발걸음이 한참이나 무거웠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네, 새터민이네 하면서 인권활동을 한다고 했지만 그날 나의 모습은 뭐였나 싶다. 내가 배워야할 일들이 아직은 너무나 많다. 현지인이 대접한, 조금 특이한 음식 하나도 그 앞에서 마음껏 먹어주지 못하는 내 ‘문화적 습관’이 이렇게도 옹졸할 줄이야!
길을 걷다 강씨 아주머니와 일행을 먼저 보내고 끝없이 이어진 수수밭으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는 중국의 오지. 그러나 한국과 같은 하늘.
여기는 중국의 오지. 하지만 한국과 같은 2007년.
우리는 이렇게 동시대의 비동시성에 갇혀있다.
그렇게 시작된 오지마을에서의 3박 4일. 돌아오는 길, 깊은 밤 마을 어귀에서는 손전등을 든 아이들이 백양나무 숲을 헤매고 있었다.
저 아이들은 누구를 위해서 매미를 잡고 있는 것일까?
지난 여름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사정을 돌아봐야만 하는, 바로 북녘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 단체는 1998년부터 중국에서 유리걸식하는 북녘동포들에게 작은 쉼터와 끼니를 대접해오는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2000년대 들어 일부 ‘기획망명’을 시도하던 몇몇 돌출 활동가들에 의해 중국 전역의 상황이 아수라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단체는 중국 공안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아주 조용히 물 밑에서 북녘 출신의 동포들을 도와왔다.
그러던 중 기획망명 등의 사건들로 탈북자 문제가 이슈화 되면서 중국 당국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고, 곳곳에서 중국 당국의 눈 밖에 나지 않게끔 탈북자 지원활동을 하던 우리 단체마저 2003년 끝내 활동을 접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중국 내에서의 활동이 소강국면에 접어든 이후에도 간간이 그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브로커나 혹은 활동가들을 만나 끝내 한국행 티켓을 거머쥐기도 했단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끼니를 때울 다른 방도가 없어 어딘가로 팔려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중국의 어느 시골에서 평생을 저당 잡힌 채 노동을 하기도 한다고. 그러나 중국땅에 사는 북녘 주민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학대를 당하거나 인권유린을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여름 우리가 만났던 이들은 중국 땅에서 중국 분들을 만나 더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인생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분들과 연락이 닿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서로 전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는 모습을 지켜보아오던 참에, 그분들 중 한분이 몸이 좀 안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인천항을 떠난 지 16시간이 흐르고 칭따오 항에 도착했다. 시속 10여 노트의 속도로 서울 부산 간 거리보다 조금 더 되는 580여km를 항해하면, 한 때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의 이국적인 항구 칭따오가 나온다. 오후 5시 30분에 출발해 다음날 오전 9시에 도착했다. 중국인 친구 안 선생이 마중 나왔다. 공자선생과 고향이 같은 유학자 가문의 젊은 청년, 안 선생에게 유창한 영어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북녘동포 분들이 화목하게 잘 사는 그 이름 모를 중국의 시골로 향했다.
얼마나 갔을까? 차를 타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오전 10시에 출발한 자동차는 새벽 12시가 넘어도 멈출 줄을 모른다. 끝도 없이 이어진 백양나무 숲을 가로지르며 포장되지 않은 황톳길을 해가 저물어 달이 밤하늘 깊이 솟아오를 때까지 달리고 달렸다. 우리는 결국 새벽녘에서야 목적지에 이르렀다.
가로등은 물론이고, 불빛이라곤 하나 없는 그야말로 오지다. 깊은 밤, 자동차소리가 요란스럽게도 마을주민들을 깨운 탓일까? 마을 어귀에서부터, 골목골목에 이르기까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시간은 이미 새벽 2시를 지났다.
북녘에서 온 강씨 아주머니네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붉은색 벽지로 온통 도배를 한 나무대문에는 '복(福)'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문가에는 송아지 한 마리가 누워있다
자동차 불빛을 받아 겁을 먹고 벌떡 일어선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에 앉아있던 이씨 아주머니가 우리 일행에게로 뛰어온다. 집안은 온통 잔치분위기다.
시커멓게 내려앉은 먼지에 빛 바랜 자주색 슬레이트 지붕에, 차가운 흙바닥 마루에는 우리가 온다고 노란색 꽃무늬 장판을 덧입혔다. 시멘트와 흙벽돌을 어줍지 않게 쌓아올린 집 벽에는 여름 한철 살이 도톰하게 오른, 올챙이 머리를 한 어여쁜 도마뱀들이 이방인들을 구경하기 위해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당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밤이 맞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자강도에서 오신 분, 황해도에서 오신 분, 금강산 너머 강원도에서 오신 분. 이렇게 세 분의 북녘주민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다. 북녘에서 나오신 후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 이곳까지 왔는데, 다행히 인심 좋기로 유명한 이 시골에 와 좋은 배우자를 만났고 화목한 가정을 이뤄 잘 살고 있었다.
해당 지역 중국공안에서도 다 알고 있지만, 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중국인의 가정에 들어와서 행복하게 잘 살면서 지역에도 여러 가지로 좋은 기여를 하고 있어서 조용히 눈을 감아준다고 한다. 다만 돌출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는 머무는 동안 더욱 조심스럽게 마을에서 지내기로 했다.
새벽녘 동이 틀 때까지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사람들이 이국땅에 정착하여 살기까지 쌓인 사연들이 오죽할까? 아침이 되기까지 중국 오지마을에서 펼쳐진 때 아닌 잔치를 마칠 무렵, 우리는 서서히 피곤함을 느꼈고 잠이 들었다.
강씨 아주머니가 나를 깨운다.
“삼춘이! 일어나기오!”
16시간 동안 배를 타고, 한 나절 넘게 차를 탔다. 그리고 밤을 지새면서 잔치를 벌였다. 몸이 피곤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강씨 아주머니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계속해서 우리를 재촉했다.
“삼춘이! 일어나기오! 같이 온 삼춘들도 다들 일어나기오!”
나는 강씨 아주머니 옆에 친척들이 다 함께 와 있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어 지친 몸을 추슬러 일어나 일행을 깨웠다.
“아. 죄송해요. 어젯밤, 아 아니 오늘 아침 너무 늦게 자서…. 그런데 무슨 급한 일 있는 건 아니죠?”
나는 비몽사몽간에 이렇게 물었다.
“아니 삼춘네 아침식사 해야하잖소! 얼른 일어나서 이쪽으로 오기오!”
밤새도록 무언가를 먹어댔는데 아침을 먹으라는 말에 적지 않게 놀랐지만, 우리가 손님으로 와있다는 생각에 이분들이 말씀하시는 대로 다 따라야할 것 같아 우리는 강씨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담배 밭, 수수밭이다. 누군가 미리 설계를 하고 동네를 만들었을까? 집도, 마을도, 밭도 모두 바둑판이다. 끝없이 이어진 길 위의 길들, 밭 건너 밭들, 집 뒤의 집들, 골목 이어 골목들이다.
한 이십 리는 간 듯하다. 앞서 가는 강씨 아주머니에게 나는 몇 번을 주저하다 물었다.
“아니 아주머니, 무슨 대단한 음식을 차리셨기에 이렇게 아침 먹으러 한도 끝도 없이 간답니까?”
“아 삼춘이네 오신다기에 이 마을 사람들이 아주 특별한 음식을 만들었지미. 어젯밤에 이 마을 아이들 한 숨도 못 잤지미.”
나는 마을 아이들이 한 숨도 못 잤다는 말이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내가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 나온다고 해도, 이 고장 특별 메뉴일테니 사양하지 말고 실컷 먹어둬야겠다’라고 혼자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드디어 20리 길을 훌쩍 넘어 조반이 준비된 친척집에 다다랐다. 집의 구조는 역시나 똑같았다. '복'자가 새겨진 빨간 나무대문을 지나니 마을주민들이 상을 다 차려놓았고 뛰어놀던 아이들은 난생 처음 외국인을 보는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정지한 채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밤새도록 준비한 그 음식을 먹을 사람들에 대한 신기함과 부러움이 섞여있는 듯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식탁으로 다가갔다.
대충 보아도 반찬이 스무 가지는 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중국음식 가짓수 많은 것은 이미 원곡동 생활 몇 년 만에 다 터득한 터, 적어도 나에겐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다. 이렇게 풍성한 음식을 차려주심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거푸 드리는 나는 속으로 ‘에게… 생각했던 이 고장만의 특벽한 음식은 없네’하면서 약간 실망을 했었다.
나는 하느님께 기도를 마치고 젓가락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계란부추볶음에 젓가락을 가져가는 순간, 강씨 아주머니가 식사를 제지하신다.
“아니지 삼춘이. 아직 아니지뭐이. 이제 오늘 젤로 중요한 음식이 나와야 식사 시작하지뭐이. 야야! 빨리 가져오지 않고 뭐하네! 어이?”
강씨 아주머니는 부엌을 향해서 성화를 부리신다.
그럼 그렇지 하며 뭔가 잔뜩 기대를 하는 순간, 부엌에서 한 아주머니가 큰 접시에 뭔가 가득 담아 나오셨다.
‘양꼬치일까? 혹은 민물에서 잡은 가재? 아니면 산속에서 따온 특이한 나무열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드디어 음식이 밥상위에 놓여졌다.
그러나 음식을 보는 순간 나는 아연실색했다. 우리를 위해 특별히 마련했다는 오늘의 특별메뉴는 다름 아닌 매미, 매미고기인 것이다.
▲ 매미고기2아이들이 밤새도록 잡았다는 탈피가 덜 끝난 매미 약충 ⓒ 차승만
하얀 접시 위에 아직 탈피를 채 마치지 않은 약충(若蟲) 매미 수십 마리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정신이 멍해져 젓가락을 잡은 채 한참 숨을 죽이고 있는 내가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보였는지 강씨 아주머니가 한 말씀 거드신다.
“귀한 거니까 사양하지 말고 어서 들기셔이. 어젯밤에 저 아들 몽땅 다 후라씨 들고 잠 못자고 저거 잡느라고 고생했지뭐이!”
채식에서 육식으로 바꾼 지 얼마 안 된 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뭐 양고기를 적당히 구워 꼬치에 구운 ‘양고기 촬’이나 경회루에서나 삼직한 민물고기를 냄비 가득 통으로 찐 ‘잉어찜’ 정도야 얼마든지 맛나게 먹어줄 만도 하다만….
나는 아이들이 밤새 한숨도 못자고 우리를 위해서 잡았다는 이야기에 눈물을 머금고 매미를 집어 들었다. 한 컵 가득 입을 헹궈낼 참으로 칭따오 맥주를 왼손에 붙잡고 매미를 힘껏 깨물었다. 튼실하게 살이 들어찬 허리와 복부, 그리고 단단하게 굳어져가는 머리 부분이 고단백인 매미는 그렇게 아삭아삭 내 입에서 잘게 부서졌다. 아이들이 부러움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입 속에서 금방이라도 약충이 탈피를 하여 날개짓을 하며 앵앵 울어댈 것만 같다. 나는 심호흡을 한 채 매미 몇 마리를 연이어 깨문 후 바로 잔꾀를 생각해냈다.
“아주머니. 밤새도록 저 꼬마들이 저희를 위해서 수고했는데 아이들도 함께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럴까? 그래도 귀한 건데, 그러면 안 되지뭐이!”
나는 만류하는 강씨 아주머니를 끝끝내 설득해 아이들을 내 밥상으로 끌어들였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젓가락을 집어 들기 무섭게 매미를 먹기 시작했다. 한 접시 가득 찼던 매미가 금세 동이 났다. 뜻밖에 귀한 음식을 함께 나누어먹은 아이들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느새 나에게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마련된 식사를 힘겹게 마치려는 순간 강씨 아주머니가 다시 요리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
“삼춘이. 아저씨(남편)가 그러는데 매미 요리는 나무에 달린 것 바로 잡아서 요리하는 게 제일 맛있다지 뭐이. 고저 날개를 쫙쫙 찢어가지고 바로 냄비에 기름 넣고 볶으면 맛이 그만이지 뭐이. 한국에 매미 없간디? 여기서 요리 배우고서 한국에 가면 그렇게 해드시라우!”
▲ 매미고기아이들이 밤새도록 잡았다는 탈피가 덜 끝난 매미 약충 ⓒ 차승만
식사를 마치고 20여리 되는 길을 다시 걸어오는데, 간밤에 밤을 지새우며 매미 약충을 구했을 아이들이 자꾸만 떠올라 고마움과 미안함에 발걸음이 한참이나 무거웠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네, 새터민이네 하면서 인권활동을 한다고 했지만 그날 나의 모습은 뭐였나 싶다. 내가 배워야할 일들이 아직은 너무나 많다. 현지인이 대접한, 조금 특이한 음식 하나도 그 앞에서 마음껏 먹어주지 못하는 내 ‘문화적 습관’이 이렇게도 옹졸할 줄이야!
길을 걷다 강씨 아주머니와 일행을 먼저 보내고 끝없이 이어진 수수밭으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는 중국의 오지. 그러나 한국과 같은 하늘.
여기는 중국의 오지. 하지만 한국과 같은 2007년.
우리는 이렇게 동시대의 비동시성에 갇혀있다.
그렇게 시작된 오지마을에서의 3박 4일. 돌아오는 길, 깊은 밤 마을 어귀에서는 손전등을 든 아이들이 백양나무 숲을 헤매고 있었다.
저 아이들은 누구를 위해서 매미를 잡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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