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 ⓒ 책세상
과학과 주술의 만남이 변함없을진대 예술과 주술은 어떨까? '천지창조' '만종'이 점집에 걸려 있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예술을 모욕한 것이라 비난할까? 새로운 점집이 등장했다고 호응을 할까? 인터넷 시대에 사람들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비판과 옹호가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예술을 규정하는 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예술을 세계와 자연을 재현하는 잘 훈련된 기술로 자리매김 하는 태도이고, 또 하나는 평범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신비한 현현으로 보는 태도다." (본문 10쪽)
예술에 대한 두 갈래 의견 중 앞의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예술세계이며, 뒤의 것은 무당과 같다. 전자는 르포 작가처럼 일상에서 치열한 고민과 삶, 취재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며, 후자는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진실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과연 오늘은 어떤가. 후자와 같은 예술에 대한 갈래를 인정할 수 있을까? 비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김융희 생각이다.
사람이 삶을 영위하면서 경험하는 일들은 분명 합리성과 논리성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부분이 많다. 어떤 신비와 영적 실체가 존재함을 경험한다. 김융희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밤의 어두움과 모호함 그리고 침묵 세계가 밝은 낮 세계의 자양분이라 말하고 싶다. 세계에는 합리적으로 질서를 이루는 경험 과학적 담론들이 채 다 퍼올리지 못한 신비가 숨쉬고 있으며 그 수맥을 탐사하고 드러내는 통로는 이미지에 있을 것만 같다. 말과 논리는 조금만 더 가면 금방이라도 세계의 진상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뻗지만 실제는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긴다. 그 잡히지 않는 여분의 것, 그러나 잡히는 세계 모태이기도 한 세계의 또 하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 몫이다." (11쪽)
예술을 통하여 그 잡히지 않는 여분 캐내기를 시도하는 것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지만 역사 속에서 인간이 남긴 각종 예술 작품은 분명 신비한 무엇을 말하고 있다. 절에 가면 '산신도'가 있다. 절에서 보는 산신도는 영성과 신비함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미술관에 걸려 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미술관에 걸려 있는 산신도와 절에 있는 산신도를 달리 보는 경향이 있다. 미술관 산신도는 예술이고, 절에 있는 산신도는 종교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김용희는 이런 이중적 태도를 비판한다. 그림이 주체가 아니라 장소가 주체가 되는 현실을.
김융희는 말한다. "예술은 주술에서 시작되었다." 라스코의 동굴벽화와 빌렌도르츠의 비너스는 분명 예술이지만 당시 그들에게는 주술적 상징이라고. 이런 주장은 물론 비판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보기에는 '예술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냥 그들의 들소 사냥이 잘될 수 있도록 신에게 제사지낸 것이지 예술작품으로 그린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고대에 등장하는 것 중 '뱀과 새'가 있다. 아마 거의 모든 나라와 민족의 신화에 등장할 것이다. 성상 - 예수, 성모 마리아, 성인. 불상 이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들의 얼굴을 항상 기억하기 위하여 만들었을까?
아닐 것이다. 상징과 영성, 숭배의 의미가 있다. 인간이 남긴 많은 작품들 속에 담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무조건 미신이라 비판하지 말고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술을 더 깊은 상상 세계 속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김융희는 말한다.
예술 속에서 영성을 찾는 작업.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예술 모두를 상징, 이미지, 영성으로 이해하고자 함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예술일 뿐, 어떤 상징과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문제다. 예술은 박물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 밖으로 나와 인간과 함께 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예술품을 보고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고 의미를 찾아야 하리라.
"예술이 태고적에 지니고 있던 하나의 역할, 다시 말해 인간과 우주와의 간극을 매개하여 행복한 화해에 이르게 한다는 주술적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일은 그래서 필요하다."(127쪽)
예술이 돈벌이로 전락한 시대다. 미술관 안에만 고이 모셔 놓은 미술작품(예술품)은 예술을 도외시 하는 일이다. 감상과 미술만을 위한 장소, 평안한 안치소에만 존재하게 하는 일은 예술을 비하하는 일이다.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 혼을 담아 구현했던 그 시대, 그 작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주술과 신비함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며 그 노력을 미신으로만 취급해 비하하는 것은 예술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방해된다는 것이 김융희의 생각이다. 과연 독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덧붙이는 글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 김융희 지음 ㅣ 책세상 ㅣ 3,900원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