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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을 살려줄 이유도, 마음도 없었다

추리무협소설 <천지> 298회

등록|2007.10.29 08:49 수정|2007.10.29 08:55
또 지풍을 날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목덜미를 잡아왔다.

“헉!”

다섯 줄기의 지풍(指風)이 갑작스럽게 쏘아오자 설중행은 벌렁 다시 누워버렸다. 이미 질문하는 옥청량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옥청문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그래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어떤 방법으로든 피하는 것이었다. 지쳐있어서 손만 쓰면 될 줄 알았던 옥청량이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그의 눈에 예사롭지 않은 살기가 줄기줄기 쏘아 나왔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놈은 누구냐?”

독 안에 든 쥐라 생각하고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옥청문의 공세마저도 보기 흉한 모습이지만 피해내는 것을 보고 퍼뜩 경각심이 들었다. 저 자가 구룡의 무공과 운중보주의 무공을 익힌 몸이라는 사실을 잠시 무시했던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을 주다가는 자칫 커다란 낭패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자신의 궁금증이 저 자에게 시간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대 저 놈을 살려줄 이유도, 마음도 없었다. 저 놈을 죽이고 추태감을 죽이면 형님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덧붙여 능효봉이란 놈은 일단 나중의 일이었다.

‘어렵게 되었군.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내심 곤혹스러운 마음으로 설중행이 몸을 비틀며 일어섰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어떻게 할 것인지가 아니라 지금 당장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가 문제다. 핏자국이 배어있는 옷에 흙이나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설중행은 잠시 먼지를 터는 척 했다.

“남들이 그럽디다. 구룡 중 혈룡의 자식이라고….”

그러면서 마치 남의 말 하듯 하는 말을 뱉었다. 그 말에 옥청문 형제는 내심 크게 놀랐다. 이것은 정말 놀랄 일이었다. 구룡의 후예… 그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옥청문과 옥청량의 가슴 속이 서늘해졌다.

죽여야 했다. 반드시 죽여야 했다. 혈룡의 후예란 사실까지 안 이상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는 정말 형님의 복수를 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동시에 검을 휘두르며 설중행을 향해 덮쳐갔다.

헌데 그들은 잠시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한 탓에 설중행의 입에서 ‘혈룡의 자식’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주위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나뭇잎이 잠시 부르르 떨렸던 사실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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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의 귀로 우슬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언니…그녀가 왔어요….'

기척은 없었다. 움직임도 느낄 수 없었다. 다시 온 몸을 긴장하며 이목을 최대한 높였지만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었다. 허나 무화는 우슬의 특이한 능력을 믿었다. 인간의 오감(五感)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우슬에게는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감각이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은 육감이라고도 하지만 그것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슬에게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이미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우슬에게서 누군가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우슬은 그것이 이신 중 하나인 매교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움직여야겠군요. 우리 쪽이 가장 취약한데….’

한군데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언제라도 소리가 들리면 도와주리라 생각하고 야간 범위를 넓혀 자리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어찌 보면 잘못된 판단이었다.

우슬과 무화, 그리고 선화를 제외하고 이쪽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인원은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시비들은 물론 호조수 곽정흠도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부상을 입었고 귀산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껏 지금 이곳에서 제몫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무화뿐이다. 선화 역시 함곡의 일로 피로한 기색을 띠고 있고 우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풍철한을 비롯한 중원사괴와 같은 인물들은 한 곳에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술래 되기를 자청했다. 그 때였다. 무화가 선화에게 전음을 보냈는지 두 사람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그 순간 우슬의 귀로 선화의 다급한 전음이 들렸다.

‘당했어요!’

우슬이 그 말에 급히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함곡을 움직이느라 진기가 소진되기는 했지만 한 시진 이상 쉬자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었는지 그녀의 몸놀림은 아주 가벼웠다. 그녀가 두세 번 나무를 타고 신형을 날리자 무화와 선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나무등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인물은 바로 호조수 곽정흠이었다. 자신의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하면서 한쪽을 맡았던 터였다. 마치 잠이 든 것 같은 자세로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미 숨은 멈춰 있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자 미간에 손톱만한 혈흔이 있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선명하게 매화(梅花)를 닮아있었다. 마치 화산의 매화장(梅花掌)의 흔적과 비슷했는데 그 크기는 절반도 안 될 정도로 작은 것이었다.

우슬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곽정흠의 귀밑을 살피자 풍지혈(風池穴)에도 혈흔이 있었는데 그것은 미간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고 뭉개져 있었다. 우슬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교신이 맞아요.”

아마 곽정흠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뒤에서 먼저 곽정흠의 풍지혈을 제압해놓고는 미간에 결정적인 살수를 가한 것이리라. 이것은 자신이 살수를 가했다는 일종의 과시이자 경고로 남겨놓은 것이다. 무화와 선화가 주위를 경계하며 긴장된 빛을 띠었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선화가 아직도 피로한 기색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였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우슬이 고개를 쳐들며 신음성과 같은 음성을 흘렸다.

“그렇군요…귀산 어르신…!”

그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측 십여 장 밖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악!”

우슬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비명이 난 곳으로 급히 신형을 날렸다. 선화와 무화 역시 곽정흠의 시신을 놔둔 채 급히 우슬의 뒤를 따랐다.

맹수는 먹이를 노릴 때 새끼나 병든 것 등 가장 약한 부류를 먼저 공격한다. 인간이라고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다음 공격 대상은 귀산노인 쪽. 그곳에 무공도 모르는 시비 세 명과 함께 있다. 조금 전 비명은 그 중 한 시녀의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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