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마을의 이름은 성사동(星沙洞), 그러니까 ‘별모래 마을’이다. 별모래 마을의 햇살 좋은 동쪽 나지막한 ‘성라산’에 나는 어린 벗들과 함께 숲을 만나고 바람을 만나고 가을을 만나러 여행을 간다.
성라산은 유명한 산도 아니고, 크고 장엄한 산도 아니며, 세련된 산도 아니다. 그렇다고 깍쟁이 같은 산도 아니고, 볼품없는 옹졸한 뒷산도 아니다. 그 유래된 이름 그대로 저녁에 산에 오르면 별이 비단같이 많이 늘어선 하늘을 볼 수 있는(성라, 星羅), 작고 아담하여 오르는 누구나 차별없이 맞아주고 품어주는 편안한 산이다.
시원하고 맑은 바람이 부는 27일(토) 아침. 운동화를 신고 모자도 쓰고 배낭에는 맛난 도시락과 물병 그리고 약간의 기대와 흥분을 담아 든 아이들이 하나 둘 아파트 단지 공터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이 밝다. 건강하다. 환하고 상쾌하다.
우리는 서로를 반갑게 맞아 눈인사, 낯 인사, 마음 인사도 하고,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책은 많이 읽고 있는지 재미난 일은 없었는지 말문을 열어 안부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서 우리는 ‘어울림 누리’의 뒷편으로 난 길을 가벼운 걸음으로 삼삼오오 걸으며 성라산으로 향했다.
왼쪽 아파트 담장에 ‘스트로브잣나무’가 즐비하고, 오른쪽에는 그저 예쁘다는 표현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노랗고 붉게 물들어 가고 있는 ‘느티나무’가 가지런하다. 또 그 옆에는 키가 큰 근위병 같은 모습의 ‘메타세콰이아’ 가로수가 오늘의 숲여행 길을 에스코트 하듯 절도있게(?) 도열하여 미소 짓는다.
산으로 향하는 언덕 입구 아래턱에 아직 이슬로 세수하고 얼굴을 말리지 못하여 축축히 늘어선 강아지풀 군락이 펼쳐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릴 적 해보았던 강아지풀 놀이를 가르쳐 줄 요량으로, 강아지풀 머릿대를 잘라 줄기를 가르고 수염을 만들어 코 밑에다 붙여 보았다. 아이들은 모두 깔깔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서로들 해 보겠다고 아우성이다. 그 중 한 사내 녀석에게 강아지풀 콧수염을 달아주고 표정을 보니 영락없는 애 늙은이의 모습이다. 우스꽝스럽다.
나는 강아지풀 머릿대를 거꾸로 손아귀에 살며시 잡아 가볍게 조물락거려 강아지풀 머리가 손아귀 위로 빠져 나오게 하는 싱거운 마술(?)을 보여 주었다. 아이들은 별것 아닌 놀이를 가지고도 흥미로워하고 소리를 지르며 좋아라 한다. 강아지풀 하나로 애고 어른이고 모두들 표정이 맑아지고 행복해 하니 참 좋은 일이다.
행복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들에게 “당신 발 밑에 떨어져 있는 것들을 먼저 주우시죠”라고 말했다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나의 주변에 내가 인식하지 못하여 버려져 있고, 방치돼 있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무수한 관계와 존재들… 그것을 겸허히 찾아보고, 진실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나의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고 정돈하는 자세가 정녕 필요한 모양이다.
강아지풀 콧수염을 달고 언덕을 올라서 나무계단이 차곡차곡 층계를 이룬 비교적 가파른 경사지 앞에 아이들을 둘러 모았다. 작은 아까시나무를 빙 둘러 휘돌고 감아 올라간, 겉모습은 귀엽지만 성깔 있는 가시를 가진 싱아(며느리 배꼽)를 가리키며 한 장 잎을 따서 맛도 보고 그 이름이 갖고 있는 유래를 아이들과 함께 더듬어 보았다. 며느리 밑씻개, 며느리 밥풀, 며느리 배꼽….
정성들여 귀하디 귀하게 기른 아들을 장가보내어 며느리를 맞은 시어머니가 제 어미는 별 안중에 없이 마누라 사랑에 폭 빠져 지내는 아들 꼴을 보고 질투가 생기고 미운털이 박혀 며느리를 골탕먹이고 애태우려는, 심술이 배어 있는 정감 있는 우리 토종의 아름다운 풀이름, 꽃이름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왜 그리도 가깝지만 먼 사이가 된 걸까? (짐작은 가지만 한 번 연구해 볼 일이다.)
나무 계단을 하나 둘 세며 아이들과 언덕을 오르는 중간중간 빨간빛과 분홍빛, 흰빛이 조화롭게 섞여 열매를 맺은 ‘여뀌’밭이 여기저기 넓게 나타난다. 그 밭 속에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고 버젓이 고개를 내민 ‘바랭이’ 군락이 또 보인다. 참 예쁘다.
자신의 터전에 경계를 짓고, 벽을 세워 주변의 사람과 격리되고 격리하는 폐쇄적 일상에 피곤히 살아가는 뭇 사람들의 불쌍한 삶이 떠오른다. 경계, 긴장, 경쟁, 갈등… 서로의 곁을 아무렇게나 편하게 내주어 서로 보듬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서로 살림의 모습은 우리가 진정으로 본 받아야 할 야생초의 가르침이 아닌가!
상수리 나무 친구들이 숲 속에 난 오솔길 옆에 늘씬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여럿이 살고 있다. 작은 언덕이지만 아이들과 신나게 말하고 수다떨며 오르느라 약간 숨이 차 오르지만, 진하개 빨간(혹은 자줏빛) 꽃과 진청색의 열매를 머금은 ‘누리장나무’의 무리도 보고, 성라산의 가을을 서둘러 붉게 채색하고 있는 ‘붉나무’의 마치 후기 인상파적인 느낌의 강렬한 천연의 붉은빛도 구경했다. 렘브란트와 고흐가 이런 빛을 보고 미친 듯이 붓을 휘둘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장난감 기차처럼 조르르 기다란 열을 이루어 오솔길을 걸어간다. 가면서 복분자 딸기와 산딸기나무의 모습도 비교해 보고, 이파리가 어쩌면 얇은 고뭇잎같은 느낌을 주는 ‘팥배나무’ 잎도 만져보며, 그 생김새와 촉감과 냄새를 체험해 가고 있다. 아이들의 눈빛과 표정에 초록의 숨결, 숲의 기운이 싱싱한 에너지로 충전되고 있는 듯하다.
성라산의 정상인 국사봉으로 향하는 제법 경사진 언덕을 따라 우리는 쉼없이 그러나 급하지 않게 올랐다. 정상에 가까이 왔을 때 나는 숲 속 오솔길가 옆에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상처받은 나무 형제들의 고통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부채꼴 모양으로 빙 둘러 서게 했다.
사람들의 눈높이쯤의 높이에 하나같이 커다란 상처와 패임의 흔적을 갖고 있는 나무들. 그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치며 신음했는지 온통 상처투성이와 피부암(축령)의 흔적이 끔찍스럽다. 일렬로 늘어선 채 죽어가고 있는 대여섯 그루의 아까시나무 오솔길은 사람들이 나무를 찌르고, 후비고, 부벼 판 철없는 죽임의 현장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나무와 풀, 새와 꽃과 흙이 어떻게 사람과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서로를 아끼고 살피며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대화했다. 아이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지고 한층 차분해진다.
우리는 국사봉 정상 바로 가까이에서 약수터로 향하는 중턱 숲길로 접어들었다. 가면서 샛노랗게 물든 손바닥 모양의 ‘생강나무’ 잎을 따 비벼서 냄새도 맡아보고 특이한 모양을 한 ‘난티 개암나무’잎도 하나씩 따서 만져보고 신기해 하며 호호거렸다.
이제는 내리막이라 아이들도 그다지 힘든 표정없이 자유로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약수터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에코 브릿지’처럼 만들어 놓은 나무다리를 지났다. 그런데 다리 옆에 자신의 줄기껍질(수피)을 너덜너덜 종잇장이나 마치 떼가 벗겨지듯 달고 있는 늘씬하고 키 큰 나무 몇 그루가 서 있으니 그의 이름은 ‘물박달나무’ 란다. 아이들과 함께 너덜너덜한 껍질도 만져보고, 눌러보기도 하며 그 느낌을 맘껏 체험했다.
약수터를 지나 모과나무, 꽃사과나무, 키작은 스트로브잣나무가 적당한 응달을 만들어 놓은 곳. 그 파릇한 잔디밭에 오붓하고 동그랗게 모였다. 그리고는 각자 준비해 온 맛있는 김밥, 유뷰초밥, 볶음밥, 그리고 잡곡밥과 김치 깍두기를 골고루 펼쳐 내려 놓고선, 성라산이 우리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단맛이 나는 맑은 공기와 숲의 향기를 맡으며 행복한 오찬을 나누었다.
숲속의 화려한(?) 오찬을 마치고선, 아랫쪽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방금 전 맛있게 먹었지만 아직 뱃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들을 잘게 부수어 소화도 시켜주고 영양분도 골고루 흡수가 잘 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접시로 나뭇잎 실어나르기’ 놀이를 했다.
밀짚모자 팀과 꽃다지 팀의 은근히 긴장이 도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똑같이 출발을 안 했다느니, 반칙을 썼다느니… 하지만 모두들 웃음을 머금고 열심히 뛰었고, 신나고 즐겁게 놀이 했다.
다음으로 조그만 접시 안으로 밤을 던져 모으는 놀이를 했다. 어느 팀이 접시 안에 많은 수의 밤을 모으는가 하는 놀이인데, 생각보다 쉽지 않으니 몇 몇 녀석은 짜증을 내기도 한다. 에이, 잘 안 되잖아!
그래도 소나무 숲 바닥에 깔려 있는 낙엽을 푹신하게 밟아도 보고 친구들과 힘을 모아 작전도 짜보고, 진 팀의 아이들이 이긴 팀의 아이들을 업어주는 싫지 않은 벌칙을 수행하며 그들은 숲에 안기고 묻혔다.
‘나무 얼굴 표정 만들기’는 오늘 숲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것처럼 아이들 모두의 환호성을 자아냈다. 흙과 자연물로만 자신이 고른 한 그루의 나무에 표정을 만들어 주는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 아이들은 혹 평소에 힘들었고. 상처받았을지 모를 자기 자신의 모습을 치료하고 어루만지기도 하며, 억압되어 있던 자유로운 상상력을 형상으로 표현해 보기도 한다.
제 각각의 표정과 개성을 가진 여러 개의 나무 얼굴 표정이 숲을 이루어 그야말로 자연미술관을 만들어 놓았다. 연이어 ‘흙과 자연물로 만들기’ 놀이를 했다. 밤송이 껍질을 이용한 고슴도치, 스트로브 잣나무 열매를 꼬리로 활용한 스컹크, 도마뱀과 다람쥐 그리고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그밖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이름 모를 동물들….
우리는 흙과 나무와 풀과 열매를 가지고 오직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훌륭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오늘 숲을 찾아 온 모든 이들에게 무료 전람회를 열어주었다. 그러니까 관람권은 예쁜 나뭇잎 한 장이고, 그러면 모두 무료이고 ‘공짜’였다.
하얀 보자기 하나를 바닥에 펼쳐 놓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색깔로 동그란 고리를 이룬 색환을 깔고서 아이들과 함께 숲에 있는 자연의 색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 나섰다. 빨간 찔레열매, 진초록의 솔잎, 노오란 황금빛의 은행잎, 손바닥 모양의 붉은 단풍나뭇잎,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빛과 색의 나무, 풀, 꽃, 열매….
우리는 그것들을 예쁘게 모아 놓고 살펴보며 숲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창조성과 신비하고 다양한 아름다움에 대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상하고 감동하였다.
한 아이가 질문을 했다.
“밀짚모자! 왜 똑같은 단풍나무인데도 저 쪽에 있는 것은 잎이 붉은데, 이 쪽에 있는 나무는 아직 잎이 초록색이에요?”
“같은 사람끼리도 키가 다르고 얼굴표정도 다르고, 목소리도, 몸짓도 모두 다르잖니! 나무도 같은 과에 속한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는단다.”
“모두들 제 나름대로의 차이와 다름이 있더라도 서로 어울리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거지… .”
나는 그렇게 답을 주었고, 그 아이 아닌 다른 아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동그란 모양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서서 오늘의 숲 여행(체험)을 소박하게 정리해보고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녀석은 큰 소리로 즐거웠음을, 어떤 녀석은 수줍어선지 작은 목소리로 ‘참 좋았다’고 말했으며, 또 어떤 녀석은 말은 더듬거렸지만 참 행복했음을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숲의 향기와 추억을 묻히고 담아 이제 비로소 숲을 떠난다. 가을날 작은 숲에서 이루어진 이번 여행은 모두에게 감사하고, 값진 고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성라산은 유명한 산도 아니고, 크고 장엄한 산도 아니며, 세련된 산도 아니다. 그렇다고 깍쟁이 같은 산도 아니고, 볼품없는 옹졸한 뒷산도 아니다. 그 유래된 이름 그대로 저녁에 산에 오르면 별이 비단같이 많이 늘어선 하늘을 볼 수 있는(성라, 星羅), 작고 아담하여 오르는 누구나 차별없이 맞아주고 품어주는 편안한 산이다.
시원하고 맑은 바람이 부는 27일(토) 아침. 운동화를 신고 모자도 쓰고 배낭에는 맛난 도시락과 물병 그리고 약간의 기대와 흥분을 담아 든 아이들이 하나 둘 아파트 단지 공터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이 밝다. 건강하다. 환하고 상쾌하다.
▲ 성라산 가는 나무계단산에 오르는 길 옆에 나무와 풀을 살피며 ⓒ 이성한
우리는 서로를 반갑게 맞아 눈인사, 낯 인사, 마음 인사도 하고,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책은 많이 읽고 있는지 재미난 일은 없었는지 말문을 열어 안부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서 우리는 ‘어울림 누리’의 뒷편으로 난 길을 가벼운 걸음으로 삼삼오오 걸으며 성라산으로 향했다.
왼쪽 아파트 담장에 ‘스트로브잣나무’가 즐비하고, 오른쪽에는 그저 예쁘다는 표현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노랗고 붉게 물들어 가고 있는 ‘느티나무’가 가지런하다. 또 그 옆에는 키가 큰 근위병 같은 모습의 ‘메타세콰이아’ 가로수가 오늘의 숲여행 길을 에스코트 하듯 절도있게(?) 도열하여 미소 짓는다.
산으로 향하는 언덕 입구 아래턱에 아직 이슬로 세수하고 얼굴을 말리지 못하여 축축히 늘어선 강아지풀 군락이 펼쳐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릴 적 해보았던 강아지풀 놀이를 가르쳐 줄 요량으로, 강아지풀 머릿대를 잘라 줄기를 가르고 수염을 만들어 코 밑에다 붙여 보았다. 아이들은 모두 깔깔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서로들 해 보겠다고 아우성이다. 그 중 한 사내 녀석에게 강아지풀 콧수염을 달아주고 표정을 보니 영락없는 애 늙은이의 모습이다. 우스꽝스럽다.
▲ 강아지풀 콧수염콧수염을 단 애늙은이(?) 친구 ⓒ 이성한
나는 강아지풀 머릿대를 거꾸로 손아귀에 살며시 잡아 가볍게 조물락거려 강아지풀 머리가 손아귀 위로 빠져 나오게 하는 싱거운 마술(?)을 보여 주었다. 아이들은 별것 아닌 놀이를 가지고도 흥미로워하고 소리를 지르며 좋아라 한다. 강아지풀 하나로 애고 어른이고 모두들 표정이 맑아지고 행복해 하니 참 좋은 일이다.
행복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들에게 “당신 발 밑에 떨어져 있는 것들을 먼저 주우시죠”라고 말했다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나의 주변에 내가 인식하지 못하여 버려져 있고, 방치돼 있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무수한 관계와 존재들… 그것을 겸허히 찾아보고, 진실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나의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고 정돈하는 자세가 정녕 필요한 모양이다.
강아지풀 콧수염을 달고 언덕을 올라서 나무계단이 차곡차곡 층계를 이룬 비교적 가파른 경사지 앞에 아이들을 둘러 모았다. 작은 아까시나무를 빙 둘러 휘돌고 감아 올라간, 겉모습은 귀엽지만 성깔 있는 가시를 가진 싱아(며느리 배꼽)를 가리키며 한 장 잎을 따서 맛도 보고 그 이름이 갖고 있는 유래를 아이들과 함께 더듬어 보았다. 며느리 밑씻개, 며느리 밥풀, 며느리 배꼽….
정성들여 귀하디 귀하게 기른 아들을 장가보내어 며느리를 맞은 시어머니가 제 어미는 별 안중에 없이 마누라 사랑에 폭 빠져 지내는 아들 꼴을 보고 질투가 생기고 미운털이 박혀 며느리를 골탕먹이고 애태우려는, 심술이 배어 있는 정감 있는 우리 토종의 아름다운 풀이름, 꽃이름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왜 그리도 가깝지만 먼 사이가 된 걸까? (짐작은 가지만 한 번 연구해 볼 일이다.)
▲ 개여뀌 밭열매를 맺은 개여뀌의 군락이 예쁘다. ⓒ 이성한
나무 계단을 하나 둘 세며 아이들과 언덕을 오르는 중간중간 빨간빛과 분홍빛, 흰빛이 조화롭게 섞여 열매를 맺은 ‘여뀌’밭이 여기저기 넓게 나타난다. 그 밭 속에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고 버젓이 고개를 내민 ‘바랭이’ 군락이 또 보인다. 참 예쁘다.
자신의 터전에 경계를 짓고, 벽을 세워 주변의 사람과 격리되고 격리하는 폐쇄적 일상에 피곤히 살아가는 뭇 사람들의 불쌍한 삶이 떠오른다. 경계, 긴장, 경쟁, 갈등… 서로의 곁을 아무렇게나 편하게 내주어 서로 보듬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서로 살림의 모습은 우리가 진정으로 본 받아야 할 야생초의 가르침이 아닌가!
▲ 도토리 나무 친척들상수리, 떡갈, 졸참, 신갈, 굴참, 밤, 갈참나무의 잎 ⓒ 이성한
상수리 나무 친구들이 숲 속에 난 오솔길 옆에 늘씬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여럿이 살고 있다. 작은 언덕이지만 아이들과 신나게 말하고 수다떨며 오르느라 약간 숨이 차 오르지만, 진하개 빨간(혹은 자줏빛) 꽃과 진청색의 열매를 머금은 ‘누리장나무’의 무리도 보고, 성라산의 가을을 서둘러 붉게 채색하고 있는 ‘붉나무’의 마치 후기 인상파적인 느낌의 강렬한 천연의 붉은빛도 구경했다. 렘브란트와 고흐가 이런 빛을 보고 미친 듯이 붓을 휘둘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장난감 기차처럼 조르르 기다란 열을 이루어 오솔길을 걸어간다. 가면서 복분자 딸기와 산딸기나무의 모습도 비교해 보고, 이파리가 어쩌면 얇은 고뭇잎같은 느낌을 주는 ‘팥배나무’ 잎도 만져보며, 그 생김새와 촉감과 냄새를 체험해 가고 있다. 아이들의 눈빛과 표정에 초록의 숨결, 숲의 기운이 싱싱한 에너지로 충전되고 있는 듯하다.
성라산의 정상인 국사봉으로 향하는 제법 경사진 언덕을 따라 우리는 쉼없이 그러나 급하지 않게 올랐다. 정상에 가까이 왔을 때 나는 숲 속 오솔길가 옆에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상처받은 나무 형제들의 고통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부채꼴 모양으로 빙 둘러 서게 했다.
사람들의 눈높이쯤의 높이에 하나같이 커다란 상처와 패임의 흔적을 갖고 있는 나무들. 그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치며 신음했는지 온통 상처투성이와 피부암(축령)의 흔적이 끔찍스럽다. 일렬로 늘어선 채 죽어가고 있는 대여섯 그루의 아까시나무 오솔길은 사람들이 나무를 찌르고, 후비고, 부벼 판 철없는 죽임의 현장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나무와 풀, 새와 꽃과 흙이 어떻게 사람과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서로를 아끼고 살피며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대화했다. 아이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지고 한층 차분해진다.
▲ 누리장 나무누린 장냄새가 난다고 하여 누리장 나무라나? ⓒ 이성한
우리는 국사봉 정상 바로 가까이에서 약수터로 향하는 중턱 숲길로 접어들었다. 가면서 샛노랗게 물든 손바닥 모양의 ‘생강나무’ 잎을 따 비벼서 냄새도 맡아보고 특이한 모양을 한 ‘난티 개암나무’잎도 하나씩 따서 만져보고 신기해 하며 호호거렸다.
이제는 내리막이라 아이들도 그다지 힘든 표정없이 자유로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약수터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에코 브릿지’처럼 만들어 놓은 나무다리를 지났다. 그런데 다리 옆에 자신의 줄기껍질(수피)을 너덜너덜 종잇장이나 마치 떼가 벗겨지듯 달고 있는 늘씬하고 키 큰 나무 몇 그루가 서 있으니 그의 이름은 ‘물박달나무’ 란다. 아이들과 함께 너덜너덜한 껍질도 만져보고, 눌러보기도 하며 그 느낌을 맘껏 체험했다.
약수터를 지나 모과나무, 꽃사과나무, 키작은 스트로브잣나무가 적당한 응달을 만들어 놓은 곳. 그 파릇한 잔디밭에 오붓하고 동그랗게 모였다. 그리고는 각자 준비해 온 맛있는 김밥, 유뷰초밥, 볶음밥, 그리고 잡곡밥과 김치 깍두기를 골고루 펼쳐 내려 놓고선, 성라산이 우리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단맛이 나는 맑은 공기와 숲의 향기를 맡으며 행복한 오찬을 나누었다.
▲ 친구 업어주기놀이에서 진 팀의 아이가 이긴 팀의 아이를 업어준다. ⓒ 이성한
숲속의 화려한(?) 오찬을 마치고선, 아랫쪽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방금 전 맛있게 먹었지만 아직 뱃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들을 잘게 부수어 소화도 시켜주고 영양분도 골고루 흡수가 잘 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접시로 나뭇잎 실어나르기’ 놀이를 했다.
밀짚모자 팀과 꽃다지 팀의 은근히 긴장이 도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똑같이 출발을 안 했다느니, 반칙을 썼다느니… 하지만 모두들 웃음을 머금고 열심히 뛰었고, 신나고 즐겁게 놀이 했다.
다음으로 조그만 접시 안으로 밤을 던져 모으는 놀이를 했다. 어느 팀이 접시 안에 많은 수의 밤을 모으는가 하는 놀이인데, 생각보다 쉽지 않으니 몇 몇 녀석은 짜증을 내기도 한다. 에이, 잘 안 되잖아!
그래도 소나무 숲 바닥에 깔려 있는 낙엽을 푹신하게 밟아도 보고 친구들과 힘을 모아 작전도 짜보고, 진 팀의 아이들이 이긴 팀의 아이들을 업어주는 싫지 않은 벌칙을 수행하며 그들은 숲에 안기고 묻혔다.
▲ 나무 얼굴 표정흙과 나뭇잎, 열매를 가지고 나무의 표정을 만들었다. ⓒ 이성한
‘나무 얼굴 표정 만들기’는 오늘 숲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것처럼 아이들 모두의 환호성을 자아냈다. 흙과 자연물로만 자신이 고른 한 그루의 나무에 표정을 만들어 주는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 아이들은 혹 평소에 힘들었고. 상처받았을지 모를 자기 자신의 모습을 치료하고 어루만지기도 하며, 억압되어 있던 자유로운 상상력을 형상으로 표현해 보기도 한다.
제 각각의 표정과 개성을 가진 여러 개의 나무 얼굴 표정이 숲을 이루어 그야말로 자연미술관을 만들어 놓았다. 연이어 ‘흙과 자연물로 만들기’ 놀이를 했다. 밤송이 껍질을 이용한 고슴도치, 스트로브 잣나무 열매를 꼬리로 활용한 스컹크, 도마뱀과 다람쥐 그리고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그밖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이름 모를 동물들….
우리는 흙과 나무와 풀과 열매를 가지고 오직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훌륭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오늘 숲을 찾아 온 모든 이들에게 무료 전람회를 열어주었다. 그러니까 관람권은 예쁜 나뭇잎 한 장이고, 그러면 모두 무료이고 ‘공짜’였다.
▲ 야, 멋지다!흙과 열매로 만든 고슴도치, 스컹크, 독사 그리고 … ⓒ 이성한
하얀 보자기 하나를 바닥에 펼쳐 놓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색깔로 동그란 고리를 이룬 색환을 깔고서 아이들과 함께 숲에 있는 자연의 색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 나섰다. 빨간 찔레열매, 진초록의 솔잎, 노오란 황금빛의 은행잎, 손바닥 모양의 붉은 단풍나뭇잎,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빛과 색의 나무, 풀, 꽃, 열매….
우리는 그것들을 예쁘게 모아 놓고 살펴보며 숲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창조성과 신비하고 다양한 아름다움에 대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상하고 감동하였다.
▲ 숲에 있는 자연의 색숲 속에 있는 나뭇잎과 풀과 꽃, 열매를 찾아 색환을 만들었다. ⓒ 이성한
한 아이가 질문을 했다.
“밀짚모자! 왜 똑같은 단풍나무인데도 저 쪽에 있는 것은 잎이 붉은데, 이 쪽에 있는 나무는 아직 잎이 초록색이에요?”
“같은 사람끼리도 키가 다르고 얼굴표정도 다르고, 목소리도, 몸짓도 모두 다르잖니! 나무도 같은 과에 속한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는단다.”
“모두들 제 나름대로의 차이와 다름이 있더라도 서로 어울리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거지… .”
나는 그렇게 답을 주었고, 그 아이 아닌 다른 아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 크흐흐, 잘 만져봐!눈 가리고 나무찾기, 웃음이 나오는 걸! ⓒ 이성한
우리는 동그란 모양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서서 오늘의 숲 여행(체험)을 소박하게 정리해보고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녀석은 큰 소리로 즐거웠음을, 어떤 녀석은 수줍어선지 작은 목소리로 ‘참 좋았다’고 말했으며, 또 어떤 녀석은 말은 더듬거렸지만 참 행복했음을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숲의 향기와 추억을 묻히고 담아 이제 비로소 숲을 떠난다. 가을날 작은 숲에서 이루어진 이번 여행은 모두에게 감사하고, 값진 고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나만의 테마여행>응모글입니다. 10월 27일 고양시 성라산 숲체험 여행을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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