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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쥐새끼처럼 숨어있었군

추리무협소설 <천지> 299회

등록|2007.10.30 08:51 수정|2007.10.30 08:57
그들은 술래가 되어야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성격 역시 술래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었고, 지금 가장 상대에게 타격을 많이 주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술래가 되지 않고, 숨는 자들이 되었다. 아니 덫을 놓고 앉아서 먹이를 기다리는 자들이 되었다.

이런 인물들이 술래가 되지 않고 숨는 자가 되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누군가의 지시에 의한 것이고, 또 하나는 시간을 끌어야 하는 경우다. 후자의 경우에는 되도록 빨리 승부를 보지 않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흑백쌍용과 이군이 그러하였다. 이군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흑백쌍용은 절대 숨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격상 술래가 되어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허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기다렸고 마침내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풍철한이라…대어가 걸렸군.’

백룡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얼마 전 풍철한의 무위는 그들이 상상했던 것과는 정말 딴판이었다. 일대일이라면 풍철한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풍철한의 곁에 더구나 반효가 같이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허나 지금 흑백쌍용과 이군은 서로 호흡을 맞춰놓은 상태였다. 간단하게나마 사상진(四象陣)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안에만 들어선다면 사상에 입각한 완벽한 연수합격으로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혼을 빼놓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리 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싸움에 앞서 몸이 긴장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백룡은 흑룡과 이군이 몸을 숨기고 있는 쪽을 쭉 돌아다보았다. 그들 역시 풍철한과 반효의 등장을 알고 감지하고 있을 터였다.

‘조금만 더…’

위치로 봤을 때 가장 먼저 손을 써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쌍첨검으로 순식간에 필살의 칠교난비(七巧亂飛)와 추창망월(推窓望月)의 두 초식을 연달아 쏟아낸다면 갑작스런 공격에 두 사람은 우측으로 물러날 것이고, 거기에 있는 흑룡이 그들의 뒤를 노릴 것이다.

흑룡의 공격이 실패해도 이군의 심후한 내력을 바탕으로 쏟아내는 매서운 장공(掌功)은 분명 상대를 죽이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중상을 입힐 터였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공격권 내로 들어오던 풍철한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저 자식… 왜 멈추는 거야?’

백룡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대여섯 발자국만 들어오면 공격을 하려고 잔뜩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풍철한이 걸음을 멈추자 오히려 초조한 쪽은 백룡이었다. 오히려 풍철한은 얼굴 가득 아주 능글맞은, 그것을 지켜보는 백룡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싫은 미소를 띠며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쥐새끼처럼 숨어있지 말고 속 시원히 나타나 한 판 붙는 게 어때?”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던 백룡을 비롯한 세 명의 맥을 탁 풀리게 하는 장난기 섞인 풍철한의 음성이었다. 이미 자신들이 매복해 있음을 알았다는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하다가 상대에게 감지되었을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정말 저 자식이 우리가 숨어있는 것을 알고 그러는 건가? 아니면 그저 슬쩍 떠보는 건가?’

백룡이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데 한술 더 떠 옆에 있는 반효마저 비웃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닌가?

“흑룡인가 뭔가 하는 자식아! 아까 끝내지 못한 승부는 봐야할 것 아닌가?”

더 이상 주저할 일이 없었다. 이미 풍철한과 반효는 자신들이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백룡이 나서기 전에 이미 성질이 급한 흑룡이 모습을 드러내며 쏜살같이 반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건방진 놈. 아까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라.”

흑룡이 노갈을 터트리며 반효를 휩쓸어갔다.

“역시 쥐새끼처럼 숨어있었군.”

반효 역시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흑룡을 향해 권을 뻗으며 마주쳐갔다. 그순간 백룡은 아차 싶었다. 반효의 말을 들어보니 이들은 자신들을 확실하게 감지한 것이 아니라 있을 것 같다고 추측하고 던져본 말에 스스로 몸을 드러낸 꼴이다.

허나 이미 흑룡이 몸을 드러낸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백룡 역시 장내에 모습을 드러내자 소리 없이 좌우에서 이군도 모습을 드러냈다.

“꽤 많이 숨어있었구먼. 좋아.”

풍철한이 씨익 웃으며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풍철한은 겉으로는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이미 한 시진 전 쯤 충격을 받은 터였고, 백룡과 이군, 세 인물이라면 혼자 상대하기 벅찼던 것이다.

백룡 역시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베어 물었다. 흑룡은 충분히 반효를 상대할 것이고 최소 이백초 이내에는 끝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군과 합세해 풍철한만 죽이면 의외의 소득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큰소리군. 죽는 순간까지 큰소리치는지 두고 보자.”

백룡이 쌍첨검을 뽑아들며 풍철한에게 두발자국 달려들자 어느새 이군 역시 풍철한을 품자형으로 에워싸며 살기를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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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공기는 아무래도 쌀쌀하다. 특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렇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혈도를 제압당한 함곡에게는 더욱 쌀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서인지 용추는 어느새 주위의 나뭇가지를 모아놓고 모닥불을 피웠다.

용추와 함곡. 두 사람에게는 지금 이 생사림 안에서 벌어지는 술래잡기 놀이는 더 이상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결과에 따라 운명이 확연하게 갈릴 터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전혀 없는 것이다.

“회의 회주였던 철담어른이 자네와 함께 이 모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일이었네. 나는 정말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있는 함곡을 보며 용추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자신과 말을 섞기 싫어서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

“…”

함곡은 눈을 뜨지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용추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함곡의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함곡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용추 역시도 함곡을  질시하며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다만 그저 이렇게 결과만 기다리며 있기가 거북해 말을 던진 것뿐이었다.

“상대인이 어제 나에게 그럴지 모른다는 말을 할 때까지도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네. 그러나 혈서에 찍힌 이름 없는 장인이 누구 것인가를 생각하다보니 알게 되더군. 역시 그런 면에서는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네.”

함곡은 아까운 인재였다. 그가 허무하게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는 매우 좋은 여건이 되겠지만 나라나 백성에서 보면 커다란 손실이 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동림당원들을 숙청할 때에도 되도록 함곡을 감싸고 돌았던 것.

“역시 용추형이구려. 허나 이미 늦지 않았소?”

함곡이 눈을 뜨지 않은 채 대꾸했다. 함곡에게도 용추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주위나 상황이 그와 언제나 경쟁자로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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