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왜 이리 조용한 것일까?

추리무협소설 <천지> 302회

등록|2007.11.02 08:08 수정|2007.11.02 08:15
“헙!”

옥청량은 갑작스럽게 두 개의 혈룡 형상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말로만 듣던 구룡의 무공. 그 중에서도 가장 패도적이라는 혈룡장이다. 무의식 중에 겁이 덜컥 났으나 옥청량은 독한 마음을 먹고 본래대로 공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파파파팍!

내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혈룡장은 본래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사실 지금의 고갈된 내력으로는 옥청량 하나 상대하기도 벅찬 상태다. 급격하게 혈룡의 형상이 흐려지며 옥청량의 냉기 흐르는 검광이 혈룡의 잔영을 헤집으며 설중행에게 파고들었다.

더구나 아직 옥청문이 펼친 검막의 공격권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옥청문의 신형은 일 장여 허공에 솟구친 채 설중행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끝이다!'

설중행은 이미 체념했다. 더 이상 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진기까지 쏟아 부어 옥청문을 향해 쌍수를 밀어낼 뿐이었다.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스슷!

허벅지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지며 뿌연 혈막이 앞을 가렸다. 설중행이 비틀하는 사이 옥청문의 차가운 검은 곧 바로 그의 목을 노리고 찔러왔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다. 아득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더구나 뒤쪽 머리위에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살기는 이미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난자할 터였다. 눈앞이 캄캄해왔다. 보이지가 않았다.

파팟 팟!

갑자기 화끈한 느낌이 전신에 밀려들고 최선을 다해 발출한 쌍수가 옥청문의 몸을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에서 피화살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의 몸은 이질적인 기류에 밀려서 옆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이미 자신의 몸은 옥청문 형제의 검에 의해 난자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

편안했다. 몸의 통증보다는 그저 벌렁 나자빠져 숨이라도 마음대로 쉴 수 있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다른 생각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몸 전체에 무수한 통증이 있기는 한데 그것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귀찮았고,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머리가 빙빙 돌고 어지러웠다. 사고는 마비되었고 극도로 지쳐있어 손끝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혼절해 있는 것과 같은 상태로 얼핏 비몽사몽을 헤매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왜 이리 조용한 것일까? 최소한 옥청문 형제들의 득의의 웃음소리라도 들렸어야 마땅한 일인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는 순간에는 모두 이리 조용해지는 것일까? 이런 것이 죽는다는 것일까? 그렇다고 눈을 뜨는 것조차 귀찮고 힘들었다.

“나약한 놈! 그 정도도 버티지 못한 놈이 구룡의 후예라니!”

갑자기 고막이 윙윙거릴 정도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목젖이 울려 나오는 노인의 목소리여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저승사자의 목소리인가?’

설중행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자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아무리 지쳐있고 정신이 없어도 모를 바 아니다. 자신은 운 좋게 분명히 살아있었고, 이대로 죽는다 해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인간이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육체나 정신이 너무 지쳐 수인의 한계를 넘게 되면 삶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지금 설중행의 상태가 바로 그러하였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떠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명 떴는데도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다. 상체라도, 아니 머리라도 약간 들어 음성이 들린 곳을 보고 싶은데 모든 것이 희미하고 형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크흐…흐…누…구…요?”

목에 핏물이 고여 있었는지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알아들을 수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이렇게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용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어찌되었든 자신은 죽지 않았고 이 괴상한 사태에 호기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너 같이 나약한 놈을 본다면 지하에서 형님이 통곡을 하실 게다.”

설중행의 눈동자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뿌연 것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몇 개의 사람 형체가 들어오고 있었다. 헌데 저들은 왜 저러고 있는 것일까? 아직까지 완전치 못한 시야로서는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뒤엉켜 있는 두 인영은 분명 옥청문과 옥청량 형제였다.

그런데 왜 옥청량의 검이 옥청문의 몸을 관통하고 있는 것일까? 환각일까? 환각은 아니었다. 점점 시야가 회복되면서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옥청량은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자신의 목을 노리고 찔렀던 그 자세 같았다.

‘어떻게?’

그 검은 옥청문의 가슴을 관통하고 등 뒤로 삐쭉 한자나 튀어나와 있었고, 옥청문은 서 있는 자세 그대로 몸을 옥청량의 검에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 뒤로 끔찍한 모습의 파면괴인(破面怪人)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저 괴인 같았다. 헌데 괴인 역시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는 가는 혈선이 턱을 타고 가슴으로 이어져 있었다. 괴인이 옥청문 형제를 지나 설중행에게 다가오자 굳어있던 옥청문 형제의 몸은 동시에 옆으로 쓰러졌다.

“네놈이 정말 혈룡의 후예냐?”

동공을 파괴할 것 같은 안광과 함께 위압감이 느껴졌다. 상체라도 일으키고 싶었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인 반항심이 스물거리며 피어올랐다.

“내가 정말인지 아닌지 그걸 어찌 알겠소? 어제까지도 나 역시 알지 못했던 사실인데.”

순간 괴인의 몸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설중행의 목은 우악스런 괴인의 손길에 옥죄어 있었다.

“사실이 아니란 말이냐?”

“커컥!”

숨이 막혀왔다. 뭐라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설중행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변하자 괴인이 조금 느슨하게 손을 풀었다.

“네놈이 구룡의 후예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구냐?”

“허헙”

설중행은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괴인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쏴주려다가 온통 예리한 것으로 그어져 망가진 얼굴을 보며 마음을 돌렸다. 사실 설중행도 누구에게 위협을 받으면 오히려 더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지금 파면으로 인하여 그런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아미의 회운사태께서 그럽디다. 몇 시진 전에….”

그 말에 괴인의 눈빛이 순식간에 몇 번 변하더니 멱살 잡은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설중행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과거 누군가의 모습을 설중행에게서 찾아보려 한 것일까?

“그녀가 말했다면 맞겠군. 운중과의 약속까지 깨고 밖으로 나온 것이 헛일은 아니었군.”

파면괴인의 얼굴근육이 씰룩거렸다. 아마 웃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운중이 운중보에 있는 한 지하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깬 것은 구룡의 후예라는 말 때문이었고, 약속을 어기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는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