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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받고 팔 만한 가치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

오미자 즙을 거르면서 드는 생각

등록|2007.11.02 14:01 수정|2007.11.02 14:08
어제 오미자를 걸렀다.

오미자 우러난 색깔이 은근한 포도주 빛이었다. 갓 한 달 된 오미자를 독에서 걸러내 다른 독에 담으면서 최근 와인 바를 즐겨 찾는다며 내게 프랑스 산 포도주를 선물해 주셨던 지인이 생각났다.

그래서일까? 그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연히 오미자 걸러내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 고향마을까지 트럭을 몰고 가서 잘 익은 오미자를 사 온 이야기며 비싼 흑설탕을 사용하여 한 달 만에 즙을 추출해 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스스로세상학교>의 학생이 경제적 자립을 하는데도 중요한 사업일 수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나눴다.

귀담아 듣던 그분의 첫 마디는 “그거 돈 받고 팔아야 겠다”였다.

오미자 독 뚜껑을 열어보면서 잘 뜨고 있는지 살펴 볼 때마다 어떻게 하면 돈 안 받고 잘 나눌 수 있을까를 골똘히 궁리해 오던 나였다. 어머니 마실거리가 첫째요 그 다음은 내가 신세진 사람은 물론 이웃들과 나눠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오미자를 내년에도 담글 수 있는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담보하느냐를 고민하고 있었다.

오미자 즙 거르기오미자 즙을 한 달만에 거르고 있다. ⓒ 전희식



돈 받고 팔라는 그 지인의 지적은 내 노동력에 대한 존중과 함께 내 생산품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 것이라 본다. 유기재배한 오미자를 공기 좋은 산촌에서 흑설탕을 사용하여 익숙한 솜씨로 만들어냈으니 돈 받고 팔아도 되지 않겠냐는 의미도 있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돈 줄 테니 나도 좀 먹자’는 뜻도 있을지 모른다. 이럴 때는 돈이 참 유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남의 정성에 대해 적절하게 성의를 표현할 수 있는 편리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 편리함에 언젠가부터 나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돈으로 환산되는 순간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인격성이 박탈되어 버린다. 삭막한 시장의 논리가 스며든다. ‘몇 만원의 돈’으로는 내가 정성으로 빚은 오미자 주스도 살 수 있지만 칼도 살 수 있고, 담배도 살 수 있다. 담배일 수도 있고 칼일 수도 있는 물건(돈)과 내 정성인 오미자 주스를 맞바꾸는 것이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매우 비약된 논리라고 할지 모른다. 돈은 비약되는 속성을 지닌다. 물물교환의 수단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돈이 그 원래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변질 된지는 아주 오래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급기야는 인격의 측도로까지 돈은 타락해 버렸다.

각종 지역화폐운동, 호혜시장운동, 신시와 홍익시장운동이 돈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자각된 사람들의 움직임이다. 아담 스미스가 얘기한 고전적 시장의 기능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시장이 아니다. 내 오미자 주스가 숙성기간이 끝나는 석 달 후에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인격성을 지닌 정성과 사랑으로 유통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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