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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구경 갔다가 내 그림자도 못 이겼네

-괴산 화양동 계곡의 문화 유산 답사기-

등록|2007.11.05 21:40 수정|2007.11.06 09:43

화양이곡 운영담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따 화양구곡을 선정했다. 운영담은 구름의 그림자가 비치는 못인데, 구름 한 점 없는 가을에는 운영담이 아니었다. ⓒ 신병철

나는 계절마다 꼭 해야 되는 구경 혹은 놀이가 하나씩 있다. 봄의 꽃구경, 여름의 물놀이, 가을의 단풍구경, 겨울의 눈구경이 그것이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다는데 이 가을 어디 단풍놀이를 갈까 고민에 빠졌다. 불현듯 떠오르는 괴산 화양동 계곡, 왜 진작 여기를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마음이 바빠졌다.

화양동은 조선 중기 송시열 선생이 중화의 화(華)자와 일양내복(一陽來腹)의 양(陽)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뜻인즉 중화가 밤이 지나면 낮이 다시 오듯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뜻이다. 오랑캐인 만주족 청나라에게 멸망한 중화 명나라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담은 표현이었다.

송시열은 화양동의 뛰어난 경치 중 아홉 곳을 골라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 했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은 것이었다. 주자와 같은 경지의 유학을 이룩하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송시열은 후학들에게 송자라 불리며 조선의 주자로 비유되기도 했다.

일곡은 화양계곡 입구의 경천벽(擎天壁)이다. 개울과 안개를 건너 저 너머에 희미하게 하늘로 높이 솟은 벽이 보인다. 이름만큼 웅장하지는 않다. 뭐 화양구곡이 이 정돈가 하는 실망이 일어난다.

화양이곡은 운영담(雲影潭)이다. 물가에 큼직한 바위돌이 높이 서 있고, 그 앞에는 넓게 물이 고여 있다. 최근에 아래에 보를 막아 운영담의 운치를 나타내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아무리 구름의 그림자를 찾아도 못에는 없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라니. 구름 그림자가 비치는 못 운영담은 오늘은 없는 셈이다.

화양삼곡 읍궁암송시열이 효종이 죽은 후, 이 바위 위에서 효종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 신병철

화양삼곡은 읍궁암(泣弓岩)이다.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자 북벌정책을 함께 추진한 정치적 동반자였다. 송시열은 이곳에서 북벌을 실행에 옮겨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은 효종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한다. 중국의 순임금이 죽자 신하가 칼과 활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읍궁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북벌운동은 명을 멸망시킨 청을 정벌하자는 운동을 말한다. 송시열은 소현세자를 대신해서 봉림대군을 적극 옹립한 신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에 패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후금의 도읍인 심양에 잡혀갔다. 소현세자는 청의 회유의 대상이 되어 조선의 현실적 불이익을 줄이는 과정에서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대의명분 하나로 광해군을 패륜으로 몰아 정권을 잡은 아버지 인조와 서인정권은 청의 입장을 일부 수용하는 소현세자를 배반자로 간주하였다. 소현세자는 명의 패망과 함께 1644년 환국하였으나 두 달만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반면에 봉림대군은 시종일관 대의명분에 입각한 숭명반청의 기치를 천명하고 다녔다. 그 결과 봉림대군은 서인과 인조의 옹립으로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효종이었다.

즉위한 후 효종은 성리학의 정통론에 입각하여 숭명반청의 기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나아가  청을 공격하자는 북벌론을 앞세워 백성들을 전쟁 준비로 내몰았다. 서인의 중심 인물인 송시열의 대의명분 정통론이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청은 국력이 막강한 전성기였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북벌이 실행에 옮겨졌더라면 엄청난 국난을 겪었을 것이다. 화양동은 서인세력과 서인 강경파가 중심이 된 노론세력의 비현실적 대의명분론을 구체화한 지역이었다. 읍궁암은 이런 효종에 대한 송시열의 충절을 나타낸 바위였다.

화양사곡 금사담과 암서재모래가 마치 금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금모래못이 되었다. 건너편 바위 위에 송시열은 암서재라는 공부방을 지었다. ⓒ 신병철

화양사곡은 금사담(金沙潭)이다. 금모래가 반짝이는 못이란다. 맑은 물이 흐르고 물가에는 곱고 깨끗한 모래가 깔려 있으니, 당연히 금모래가 되었다. 금모래못 바로 위쪽 바위 위에 송시열은 조그만 집을 짓고 공부했단다.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떠서 만든 집으로 금사담의 맛깔스런 풍광이 집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송시열이 주자의 정통성을 이은 학파임을 이렇게 곳곳에 표출시키고 있다.

암서재 아래 암각한 글자들왼쪽에는 충효절의, 오른쪽에는 창오운단 무의산공이라 새겼다. 숭명사대주의 사상이 바위글에 덕지덕지 묻어나고 있다. ⓒ 신병철


암서재 아래의 바위벽에 이런 유교적 대의명분론을 나타내는 글귀들을 즐비하게 새겨 잊지 않으려 했다. 명나라 태조의 글씨로 새긴 충효절의(忠孝節義)로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고 했다. '(명나라)황제가 사는 곳의 구름은 끊어지고 주자가 살던 무이산은 비었다'라는 뜻의 창오운단 무이산공(蒼梧雲斷) 武夷山空)으로, '멸망한 명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유학자들이 앞장서자'고 선동했다. 숭명반청 사대주의 대의명분론이 계곡 곳곳에 이렇게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송시열의 정치∙ 인생 역정은 개인적으로는 파탄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숙종 때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당시 서인의 반대당파인 남인이 장희빈을 지원하고 있었다. 숙종은 이런 반대를 서인세력을 약화시켜 자신이 정국을 장악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숙종은 1689년에 서인들을 정계에서 몰아내었고,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을 유배보냈다가 끝내 사약을 내려 죽이고 말았다. 대신 남인이 집권했으니 이를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1694년에 장희빈이 축출당하고 서인이 재집권했고, 죽은 송시열도 복권되었다. 암서재 맞은 편에 있는 화양서원은 서인 그 중에서도 강경파인 노론 세력이 송시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노론이 키운 국왕 영조는 송시열을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광인 문묘에 배향하였다. 이로써 송시열은 완전 복권했고, 화양서원의 위세는 막강해졌다. 아울러 송시열을 내세운 노론들은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양서원의 공문인 화양묵패는 이 지역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명령서였다. 고종이 즉위하기 전 대원군조차 화양서원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서원이 양반의 정치중심지가 되었고, 백성 수탈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화양서원이 그 대표격이었다. 그랬으니 대원군이 서원을 혁파할 때 화양서원을 놔두었을 리 만무하였다. 현재의 화양서원은 문화재 복원차원에서 얼마 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화양동의 만동묘임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의 황제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사당이다. 숭명사대의식의 발로로 저렇게 높게 지었다. ⓒ 신병철

화양서원보다 더 숭명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유적지는 만동묘일 것이다. 만동묘는 임란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의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신위를 모셔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중국의) 모든 강이 아무리 꾸불꾸불해도 반드시 동쪽으로 향한다'라는 뜻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백만번 고쳐 죽어도 명에 대한 의리를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숭명사대의 정신(?)이라 하겠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1704년에 화양서원 안에 건립되었고, 이후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으며, 노론 집권 세력에 동참하려는 유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고종 때 철폐당하였으나 비밀리에 제사는 계속되었고, 이것마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일제가 글자를 읽지 못하게 쪼아버린 만동묘정비가 지금은 만동묘 정원 한 구석에 서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니 할 수 없다.

화양동의 가을첨성대 꼭대기에서 본 화양계곡의 모습이다. 개울이 저 멀리서 구불구불 이어 내려오고 산은 개울을 교묘히 피해가고 있다. 단풍으로 장식하고 있다. ⓒ 신병철

다시 화양구곡으로 돌아가자. 화양오곡은 첨성대(瞻星臺)이다. 별구경하기 좋은 곳이란 뜻일까. 그런데, 어느 바위가 첨성대인지 헷갈린다. 냇가에서 보기에 가장 높은 곳 바위에 올라가니 온 천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불구불한 화양계곡과 주변의 단풍으로 단장한 산들이 기막히게 어울린다. 바위 아래에 선조임금이 다른 곳에 써 새긴 것을 그대로 옮겨 새겼다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이 큼직하고 멋있게(?) 새겨져 있다.

냇가 주변의 반반한 바위에도 많은 글자들을 새겼다.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은 명에 대한 사대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숭정은 의종의 연호이므로 숭정이 바로 해요 달이란 뜻이다. 비워져 있는 네모칸에도 무엇인가 글자가 있었을 것이다.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뜻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란다. 암각한 글자들은 지워지지도 않고 끊임없이 수백년 동안 명나라를 섬기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첨성대의 암각 글자대명천지, 비례부동 등의 많은 글자를 새겨넣었다. 명나라 황제의 글씨도 있다. 역시 명에 대한 대단한 짝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 신병철

화양육곡은 능운대(凌雲臺)라고 한다. 구름을 뚫고 높이 솟은 바위라는 뜻인데, 안타깝게도 그런 웅자한 모습은 사라졌다. 과장되게 이름붙이기도 했겠지만, 바로 앞에 길이 생기고 옆에 음식점이 들어서면서 까마득히 솟은 바위 모습은 지금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화양칠곡은 누운 용의 모습을 한 바위라는 뜻의 와룡암(臥龍岩)이다. 용이라고 보기에는 크기도 모습도 어울리지는 않는다. 길쭉한 바위가 냇가 쪽으로 드러누워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화양팔곡은 학이 둥지를 틀었다는 학소대이다. 냇가 주변에 높이 솟은 바위를 미화하여 학이 둥지를 틀만한 곳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학이 둥지를 바위에 틀었을 리는 만무하고, 선비들이 자처하는 고고한 자태를 상징하기 위해 학을 둘러댄 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화양 6,7,8,9곡들이다. 규모는 별로 크지 않지만 다양하고 맛깔스런 멋을 풍기고 있다. ⓒ 신병철

마지막 화양구곡은 파천(巴串)이다. 평평한 바위가 제법 넓게 개울에 깔려 있고, 그 위로 물이 살랑살랑 흘러가니 그 모습이 용의 비늘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파천의 모습보다는 학소대에서 파천쪽으로 펼쳐지는 단풍 익은 산경치가 더욱 이쁘다. 파천 부근의 노랑 빨강 단풍은 가을이 익을 대로 익었음을 말하고 있다. 저렇게 자연이 만드는 색은 원색에 가까우면서도 어째 천박하지 않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화양동의 가을파천 부근 화양동 단풍이 멋지다. ⓒ 신병철

화양구곡을 답사하고 다시 처음으로 내려간다. 사람들은 산을 오른다고 하는데, 계곡 주변만 맴돌다가 산은 놓아두고 내려가고 만다. 이제 없던 상념이 꼬리를 물고 기어 나온다. 단풍은 뒷전이고 궁금증이 자꾸만 도져 나온다. 조선 후기 양반지주 핵심 지배층은 왜 관념적인 숭명사대주의를 지성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까? 우리가 현재 그렇게 부정시하는 사대주의를 체질화하기 위해서 이렇게 온 바위에 명나라 황제나 숭명주의자들의 글씨로 사대주의 내용을 담거나 선동하는 글들을 새겼을까? 혼돈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일단은 그렇게 해야 그들은 잘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집권층은 다른 당파를 물리치는데도 더욱 강력한 대의명분론을 활용했다. 당파들은 대의명분론 정통론의 강도로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대의명분론은 조선후기 사림양반지배층의 이데올로기였다.

이런 사대부 사림들은 모두 양반지주층이었다. 조선후기는 아직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사회였고, 그것은 양반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고 농민들을 부려먹으며 지배층으로 살아가는 사회였다. 주자학은 수준높은 관념론으로 양반지주계급의 농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는 논리였다. 기질의 맑고 탁함으로 현명과 우매를 가르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분제를 합리화했다. 대의명분 정통론은 바로 지주계급이 농민을 장악할 수 있는 이념적 도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상공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경제 질서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공업의 경제적 진출로 위기감을 느낀 보수지주계급은 정통론에 입각한 본말의 논리로 사농공상의 차별을 합리화하여 신흥상공인들을 자신들 체제 안으로 흡수해나가려고 했다. 이때의 논리도 바로 양반지주층의 반동적인 관념론인 정통을 내세운 대의명분 사대주의였던 것이다.

이런 사대주의는 결국 주자학의 조선후기식 표현방식이었고, 일본이 주장하는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주의 근성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양반지주층의 시대착오적인 수구적 경향은 우리의 근대화에 큰 장애로 작용하였다.

화양동의 숭명사대주의는 사실 우리나라 곳곳에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보수우익세력의 시위 때 이런 경향을 우리는 종종 본다. 이들은 한국전쟁 때 베푼 '미국의 은혜'를 못잊어 하면서 시위 때마다 성조기를 휘날린다. 누군가 이들을 숭미사대주의자들이라고 규명하기도 하였다.


감당하기 힘든 내 그림자아침나절이라 긴 내 그림자가 졸졸 따라다니며 사진찍기를 방해하고 있다. ⓒ 신병철

올해의 괴산 화양동 단풍놀이는 혼자만의 조선 후기 사회 이데올로기 탐구 과정이 되고 말았다. 조금은 짜증나는 놀이이기도 했다. 그래도 아침 나절에 길게 따라 다니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아내가 문득 내뱉은 말이 남는다. "내 그림자 감당하기가 왜 이렇게 어렵지?" 맞다. 내 그림자도 버거운 내가 화양동에 퍼진 송시열의 너무나 크고 넓은 그림자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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