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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도 노란 단풍색이 물드는 산

[전국 100대 명산을 찾아서 14] 전남 장성 백암산

등록|2007.11.05 16:12 수정|2007.11.05 16:22

▲ 쌍계루 앞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운 백학봉과 단풍 ⓒ 이승철


“내장산은 내일 가기로 하고 먼저 백암산부터 오르는 게 어때?”
“그게 좋겠는 걸, 아무리 평일이지만 내장산은 이 시간쯤이면 몰려든 차량들 때문에 길이 막혀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공연히 고생만 할 것 같은데.”

지난 11월 1일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호남고속도로 내장산 나들목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단풍이 한창인 이맘때쯤의 내장산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기에 모두 선뜻 백암산을 먼저 오르자고 동의를 한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내장산에 먼저 오르고 다음날 백암산으로 가기로 했었다.

내장산 대신 먼저 백암산으로

내장산은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다음날 아침 일찍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전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내장산 나들목을 지나쳐 백양사 입구로 들어서니 넓은 주차장이 아직 한산한 모습이다. 그러나 하얗게 우뚝 솟아있는 백학봉을 배경으로 두둥실 떠 있는 커다란 애드벌룬에는 3일부터 단풍축제가 시작됨을 알리고 있었다.

▲ 백양사 입구 풍경 ⓒ 이승철

▲ 백학봉을 배경으로 세워진 백양사 풍경 ⓒ 이승철


주차장과 공터 곳곳에도 축제를 준비하는 천막과 시설물들이 세워지고 있는 모습이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연못 건너편으로 곧 쌍계루가 나타난다. 쌍계루 주변에는 단풍나무들이 곱게 물들어 여간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연못 주변에서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젊은 커플들은 연인의 한창 아름다운 모습을 고운 단풍풍경과 함께 추억 속에 담으려고 이런저런 포즈를 잡으며 열심이다. 아름다운 연못과 날아갈 듯 멋들어진 자태의 정자, 그리고 주변풍경과 연못 속까지 붉게 물들인 단풍이 어우러진 모습이 젊은 연인들의 발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리라.

호남지역 대찰 중의 하나인 백양사도 아직은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젊은 승려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서성이는 모습이 낙엽으로 떨어져 내린 가을을 비질이라도 했던가 보다. 경내에는 새빨갛게 물든 몇 그루의 단풍나무들이 절집 추녀와 어우러진 모습이 백학봉을 배경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전설이 가득한 고찰 백양사와 단풍물이든 바위

전남 장성에 있는 이 백양사는 서기 631년(무왕 32)에 세워진 고찰이며 대한 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그가 독경을 할 때면 뒷산인 백암산에서 하얀 양떼들까지 내려와 그의 설법을 들었다는 환양선사의 전설이 깃든 대찰로 창건자는 여환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피해를 보았고, 동학 농민혁명 때는 이 사찰의 승려들도 농민군에 참여하여 순절하기도 한 역사가 있다고 한다.

“백학봉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른 길이야, 천천히 올라가자고.”

전에 한 번 이 산을 오른 경험이 있는 친구가 미리 경고를 한다. 불교신자인 일행 한 사람이 참배를 하는 동안 사찰을 둘러보고 다시 등산길에 나선 것이다. 길은 예상했던 것처럼 가파른 길이었지만 지그재그로 만들어 놓아서 전보다는 많이 쉬워졌다고 한다.

“어, 저길 좀 봐, 하얀 바위에 노란 물이 들었어.”
“정말 그러네, 노란 단풍 물이 바위에 밴 건가?”


백학봉의 아랫면인 것 같았다. 바위는 온통 하얀 색이었는데 주변에 노랗게 단풍든 나뭇잎들이 많은 곳이었는데 그 단풍잎들 주변의 바위가 정말 노랗게 변색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단풍잎들처럼 군데군데 노란빛이었다.

하얀 바위 면에 노란 단풍이 배어든 것처럼 물이 들다니 모두 신기해하며 계단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뒤를 따르던 아주머니들은 너무 힘들다고 계단 중간에 주저앉아 버리기도 했다.

▲ 백양사 경내의 거대한 단풍나무 ⓒ 이승철

▲ 하얀 바위절벽에 단풍잎처럼 노란 색이 물들었다. ⓒ 이승철



“이것도 산이라고 힘들어 하네.”

그러나 약사암으로 오르는 길은 역시 가파른 나무와 철계단 길이어서 무척 힘이 들었다. 힘든 계단 길을 천천히 오르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오르노라니 위에서 내려오던 다른 등산객 두 명이 하는 말이었다.

“이 정도의 산은 산 중에 끼지도 못합니까?”

우리는 힘들어 죽겠는데 이 정도는 산도 아니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내가 그 사람에게 물어본 것이다.

“그럼요, 이 정도야 뭐 산이랄 수 있습니까, 설악산이나 지리산 정도는 돼야 산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은 여전히 싱거운 표정으로 빙글거린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 사람들과 우리들의 등산실력의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저 사람들 싸가지 없는 기라 예! 남들은 힘들어 죽겠다 카는데, 뭐라? 산도 아니라꼬. 우째 그딴 말을 하고 가는교?“

그 사람들이 내려가고 나자 우리들의 뒤를 따르던 멀리 포항에서 왔다는 50대 아주머니 둘이 뒤를 돌아보며 그 사람들을 향해 눈을 흘긴다.

낮은 산이라고 깔보는 사람들

이 아주머니들은 우리보다도 더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그들의 말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날씨는 시원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약사암 아래 쉼터에 도착하니 몇 사람이 단풍나무 그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즐거운 표정들이다.

우리도 잠깐 쉬며 간식을 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백학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면서도 아기자기한 길이었다. 바위가 돌출한 안부위에 올라서면 산 아래 풍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깊은 골짜기 가운데 자리 잡은 백양사의 풍경이 아스라하고, 저 멀리 작은 들이 추수가 끝나 텅 빈 풍경도 모두모두 아름답고 정다운 모습이다.

▲ 바위 절벽 아래의 약사암 ⓒ 이승철

▲ 영천굴의 불상 ⓒ 이승철

약사암에서 조금 더 올라가자 산 속에서 갑자기 낭랑한 독경소리가 들린다. 머리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것 같은 동굴이 나타난다.

동굴로 오르기 전 밑에 있는 약수터에서 한 모금의 약수로 목을 축이고 동굴 앞으로 올라가니 동굴은 크기만 할 뿐 깊지는 않은 모습이다. 동굴 안에는 병풍처럼 세워져 있는 시설물 앞에 커다란 부처상 하나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불전함이 놓여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영천굴이었다.

“야! 이 산, 이게 산이냐? 이건 산책 코스지.”

영천굴을 나와 다시 힘들게 철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위에서 내려오다가 우리에게 길을 비켜주고 있던 40대 후반쯤의 남성등산객 두 명이 하는 말이었다.

“오늘은 웬 등산베테랑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어디 기죽어서 등산하겠나?”

올라오는 도중에 두 번째 같은 말을 듣는 것이 신기했던지 일행이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고 올라가며 씁쓸하게 내뱉는다. 이 보다 낮은 산에서도 이런 말은 아직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이날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영천굴을 지나 잠깐 올라가자 백학봉 위였다. 백학봉 위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골짜기 건너 맞은편에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는 사자봉이었다. 오른편으로는 백암산의 정상인 상왕봉이 바라보인다.

“이제. 고생 끝 행복시작이구먼.”

가파른 길을 힘들게 올라왔는데 정상인 상왕봉으로 가는 길도 능선길로 이어져 있어서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던지 제일 어렵게 올라온 일행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일행의 말처럼 백학봉에서 상왕봉으로 가는 길은 그리 힘든 코스가 아니었다.

등산 중 다리에 쥐났을 때는 물파스를 발라주세요

도중에 잠깐 쉬며 과일을 나누어 먹고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날 밤은 내장사 근처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내장산 등산을 할 예정이어서 모두 마음이 느긋했다. 일행들의 맨 뒤를 따라 그렇게 40여분쯤 걸었을 때였다.

▲ 산 위에서 내려다본 아름다운 풍경 ⓒ 이승철

▲ 정상으로 가는 능선길에서 만난 멋진 소나무 ⓒ 이승철



“어이! 위생병, 아니 대장, 빨리 좀 와봐! 서교수가 문제가 생겼어.”

문제가 생겼다니 누가 넘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깜짝 놀라 급히 앞으로 나아갔다. 상왕봉 직전이었다. 오르막길 한쪽에 체중이 제일 무거운 일행이 다리를 감싸 쥐며 쩔쩔매고 있었다. 왼쪽 다리 허벅지에 쥐가 났다는 것이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하지? 무슨 약이 있기는 한 거야?”

다른 일행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나는 다른 일행에게 쥐난 다리를 곧게 펴 잡아당기게 하고 급히 배낭에서 물파스를 꺼냈다. 그리고 바지를 끌어내린 다음 허벅지 쥐난 부위와 주변에 넓게 물파스를 발라주었다.

“어때? 시원하게 펴지지 않나?”
“어! 정말 그래, 신통하게 시원해지는 걸.“

일행은 쥐난 상태가 심하지 않았던지 금방 몸을 추스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깐 더 걷자 백암산의 정상인 상왕봉이었다. 정상의 높이는 741미터, 서울의 도봉산보다 1미터가 더 높은 산이었다.

“저 쪽을 보세요? 바위가 툭 튀어나온 산, 보이지요? 저 산이 내장산입니다.“

백암산에서부터 내장산까지 종주등반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서 다른 등산객에게 물으니 자세히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너무나 멀고 힘들어 보이는 산이었다.

“자! 이제 내리막길을 찾아서 내려가는 거야. 사자봉은 다음에 다시 오면 오르기로 하고, 오늘은 정상인 상왕봉을 밟은 것으로 만족하고 내려가자.”

쥐난 다리가 가라앉았다고는 해도 또 다른 봉우리까지 오르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하산을 결정한 것이다.

다시 백양사로 내려가는 길은 길도 평탄하고 쉬운 길이었다. 단풍이 아직 절정은 아니었지만 곱게 물들어가는 백암산을 둘러보고 내려가는 발길이 그렇게 가볍고 상쾌할 수가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 들른 백양사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 백양사입구 가게들, 온통 노란 감 천지다 ⓒ 이승철

흐렸던 날씨가 맑게 개어 있어서 쌍계루 앞 연못가의 단풍 빛깔도 더욱 고운 모습이었다. 특히 연못 속에 가라앉아 있는 백학봉의 그림자가 주변의 빛깔 고운 단풍그림자, 그리고 물 위에 떠 있는 낙엽들과 어울려 가히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백양사 입구로 나오는 길에서는 가을의 짧은 해가 기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늦게 도착한 관광객들이 계속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지역이 감 고장인가 봐? 산에도 골짜기에도 온통 감나무 천지던데, 저기 좀 봐 가게들도 모두 노란 감으로 가득하잖아?”

백양사 입구 도로변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가게들은 정말 하나같이 노란 감들로 가득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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