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새가 슬피 우는 사연을 이제야 깨달았다
(가이드 일기 9) 매우 가엾어진 민둥산 억새
▲ 민둥산 억새억새는 사그라들고 단풍은 색옷을 입는다. ⓒ 이현숙
그런데 그날 새벽 진눈깨비가 내렸다. 나는 괜찮았지만 산행을 처음 하는 모녀 팀 때문에 거의 한 시간동안이나 사투를 벌였다. 내가 올라갔다 오는 동안 꼼짝 않고 나무를 붙잡고 버티던 모녀는 나를 보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가워했다. 가져간 신문지를 깔고 한 발씩 떼다가 겨우 단단한 땅을 밟았을 때의 감격스러움. 그게 다 민둥산을 깔보고 구두를 신고 온 탓이었다. '민둥산' 하면 편평한 산일 거라 짐작한다. 사실은 정상에 나무가 없고 밋밋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 가을 겆이올라가는 길에 만난 농부들의 가을겆이... ⓒ 이현숙
앞자리 달라고 전화했었다는 손님은 바로 뒷자리로 정해드렸다. 그럴 때 내가 하는 말, '멀미가 심해지면 제 자리로 오세요. 제가 보조석으로 가면 되니까요.' 그러나 여태 그런 적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말 한 마디에 그분들은 이미 위로를 받았고 자연스레 치유가 되어 옮길 필요가 없어진 것.
그런데 서울 잠실에서 올라온, 본래 앞자리 주인 대단하시다. 이분 올라오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 앞을 왔다갔다 한다. 자신은 앞자리에 앉지 않으면 토해서 도저히 못간다는 것. 워낙 강하게 말하니까, 특별 손님이 내 옆자리로 자동 이동, 본래 주인 그 자리를 제대로 차지한다. 뒷자리 손님, 그 분 제스처에 기가 찼는지 그들을 보면서 조소를 머금는다. '맞어 저렇게 강해야 하는 겨' 하는 표정이다.
▲ 새끼뱀길에서 새끼뱀을 만났다. 다른 때 같으면 몸서리를 쳤을 텐데, 오늘은 새끼뱀의 앞날이 궁금했다. 이 놈도 겨울 잠을 잘까? ⓒ 이현숙
어찌 됐든 그 손님은 마음이 불편할 게 뻔하다. 나는 즉시 손님에게 가서, '마음이 편치 않으시죠?' 하고 묻는다. 그렇단다. 그래서 '그렇지만 이왕 오셨으니까, 그 사항은 뒤로 미루고 오늘은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부드럽게 제안한다. 그제야 그분 얼굴을 펴며 미소를 짓는다.
앞자리 손님들 내내 궁금하다. 얼마쯤 올라가야 억새가 있는지가. 마이크를 잡고 설명을 한다. 억새는 꼭 정상에 올라가야 볼 수 있다. 14만평에. 14만평의 환상을 당장 보고 있는 듯 잠시 황홀한 표정들이지만 깔딱 고개 같은 가파른 길을 설명하자 모두 먹먹. 그래도 난 씩씩하게 앞장선다. 골목대장처럼 모두 나를 따르라(?) 무언의 한 마디를 외치면서.
▲ 발구덕 마을발구덕 마을에서 증산초교 가는 길도 오랜만에 평화를 되찾았다. ⓒ 이현숙
그러나 신경이 좀 쓰였다. 산행하는 사람들이 적으니까, 딴 길로 갈까 봐서. 길 중간중간에 서서 뒤에 오는 분들을 기다려주었다가 간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먹을 게 저절로 들어온다. 초콜릿, 과일, 곶감. 그걸 다 먹으면서 올라가기도 곤욕스럽다. 더러 배낭에 넣어 가기도 하지만 가다가 배낭을 내려 넣는 것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게 편하니 씩씩거리면서도 하나씩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걷는다.
극성스럽게 파헤치고 들어가 수세미를 만들어 놓았던 억새 숲이 이젠 잠잠하다. 꼭 머리 풀어헤친 미친 여자의 머리칼 같은데, 이젠 버림까지 받아 내팽개쳐진 느낌이다. 두 명이 사진을 찍으려고 억새 숲으로 들어간다. 정상에서 장사를 하던 분이 소리친다. '거기 들어가지 말아요! 거기 나와요!' 거듭거듭 나올 때까지 외친다. 장사가 안되니까 바야흐로 억새 숲이 보이는가.
▲ 억새숲이젠 바람도 타지 않는 듯 고요하다. ⓒ 이현숙
▲ 계단 길증산초교에서 올라오는 길. 사람은 적지만, 사진 찍으러 억새숲으로 들어가는 건 여전... ⓒ 이현숙
▲ 억새쓸쓸하지만 장한 억새... ⓒ 이현숙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찰칵, 기념사진 찍어주고 홀연히 하산. 풍성해서 요란했던 가을은 이렇게 가고 있다. 앞산의 단풍은 점점 색을 더해가고 있는데, 은빛마저 잃은 억새는 스스로 가라앉아가고 있다. 서걱서걱 비벼대던 찬란했던 기억을 뒤로 하고.
▲ 단풍민둥산에서 바라보이는 길과 단풍...억새를 보다 돌아보니 이 풍경이 무심한듯 달리 보였다. ⓒ 이현숙
▲ 마을 길민둥산에서 내려 오는 길...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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