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태사 대웅전작지만 많은 비밀을 간직한 고려 개국사찰 '개태사' 대웅전의 모습. 지난 8월에 촬영한 사진 ⓒ 김동이
주요 명승지를 여행할 때 우리는 보통 명승지에 대한 해박한 지식보다는 그 명승지가 어느 시대 문화재고 누가 누가 관련되어 있고,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은 무엇이다 정도의 얇은 지식만 갖고 명승지를 찾는다. 이로 인해 보통의 사람들 경우 주마간산(走馬看山)식 관광을 하게 된다. 물론, 시간이 넉넉하게 허락되는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특히, 사찰(寺刹)을 찾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나 같은 경우도 절에 가면 그 절이 그 절 같아 대웅전에 한번 가보고 그 절에 유명한 탑이라든가 문화재가 있으면 그거 한번 보고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날 지인과 함께 찾은 절은 유명하지만 초라한 고려의 개국사찰 개태사였다. 이제부터 비록 초라하지만 많은 비밀과 이야기를 간직한 개태사 여행을 시작해 보자.
“정말 감나무에서 엄나무 가지가 뻗어 나왔었나요?”
“그럼요, 그런데 지난 1995년에 죽었다네요. 지금은 볼 수 없으니 안타깝죠.”
“죽었다고요? 지난 여름에 보니까 그 감나무 가지 사이에서 또 다른 가지 넝쿨이 자라나고 있던데요?”
“그렇더라구요. 이게 또 무슨 징조일까?”
이날 나와 동행했던 지인과 나눈 대화다. (나와 동행한 지인은 현재 계룡지역의 구석구석을 파헤쳐 지역신문에 '계룡의 묘미'라는 주제로 가볼 만한 여행지를 설화와 역사 사건을 들어가며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글을 연재하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의 나무에서 개체가 완전히 다른 나무가 나오다니? 이것이 무슨 조화인가?
감나무에서 엄나무가 자란 것은 미륵불의 출현을 알리는 계시?
지인은 나에게 이 전설 속의 감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전설속의 감나무예전에는 갈라진 가지 사이에서 엄나무 가지가 나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엄나무가 죽고 난 뒤 요즈음은 이름을 알 수 없는 가지넝쿨이 다시 자라고 있어 무슨 징조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 김동이
“예전에 이 감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로 엄나무가 뚫고 나와 자라고 있어 매우 희귀한 일로 커다란 화제가 되었는데 몇 년 전만해도 이 엄나무가 자라고 있어 이를 보라고 사다리도 갖다놓았으나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으니 도깨비에게 속은 것 같더라고요.
이 감나무에는 전해내려오는 일화도 있는데, 내용인 즉 '일제하에서 독립할 당시 주지승의 어머니인 김광영 여사가 이 절에서 수도를 하면서 매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던 중 계시를 받았는데, 감나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하면 미륵불이 출현하는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는 이어 '전설 속의 감나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태사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수십 년이 넘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1970년대에 그 감나무의 굵은 가지 사이에서 엄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답니다.
예전에 그 감나무에 엄나무를 접목한 사실도 없고 또한 자라나는 그 부위에 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종류가 다른 두 나무가 한 뿌리에서 동시에 자라고 있어 화제가 된 겁니다.
그런데, 엄나무는 1995년경에 죽었고 이 감나무 단목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으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실이 없다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라 죽은 엄나무 고목이 감나무 가지 사이에 거시기 만하게 불쑥 솟아 있었는데 이것을 보라고 사다리까지 비치되어 있었어요.
엄나무가 감나무를 아래서 몸을 파고 들어가 감나무 윗가지 사이로 자라고 있었으니, 이런 것은 자꾸 부연해보면 엄나무가 감나무를 뚫고 들어가는 뿌리의 모습이 남녀의 성행위와 흡사하여 보는 이가 민망스러웠는데, 지금은 아쉽지만 그런 것도 없어요.
불교 신도 분들은 종교성지에서 웬 음란한 생각을 하느냐고 힐난할지도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 이 뿌리에서 자라던 엄나무를 태워버린 흔적이 있었던 것을 보면 피장파장 아니겠어요?”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감나무의 같은 곳에 웬 이름모를 넝쿨이 자라고 있더라구요.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궁금해서 ‘TV는 신비 속으로’에 나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어요. 상상의 자유는 무한대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활력소를 찾는 것이 여정의 기쁨이 아니겠어요?
원래 나무 두 가지가 서로 휘어 감고 자라는 것을 연리목(連理木)이라 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것이 상서롭고 좋은 기운을 준다고 하여 인위적으로 만들곤 했는데, 이들은 한 몸이 된 이상 수분과 영양도 함께 나누면서 그렇게 한 나무인 양 살아갑니다.
마치 부부가 포옹한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여 옛날부터 부부의 금실을 표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이곳 개태사의 전설 속 감나무는 원래 동티나는 나무인지라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엄나무가 자랐으리라 생각되지만요.”
지인은 이렇게 말을 마치면서도 개태사의 전설 속 감나무를 신기한 듯 한참동안 바라다보았다. 눈앞에서 보고 있지만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한, 전해 내려오는 일화처럼 감나무 가지 사이에서 예전과 같은 엄나무는 아니지만 이름 모를 넝쿨이 다시 자라고 있다는 것은 그 옛날의 계시처럼 미륵불의 출현을 알리는 조짐은 아니더라도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한 메시지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위적일 수도 있고 자연적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지인의 말에 따르거나 직접 가서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상서로운 조짐인지 불길한 조짐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나무에서 다른 종류의 가지나 넝쿨이 뻗어 나온다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화젯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고려 개국사찰 ‘개태사’의 비밀
아무튼 그 옛날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후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축조했다고 전해지는 개태사에는 '전설속의 감나무' 이외에도 우리가 알면 흥미진진해 할 비밀들이 많다.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개태사 초입의 일주문 상량과 정문상량의 연도 표기가 상이하다
▲ 일주문 상량(위)과 정문상냥일주문 상량에는 불기 3007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문 상냥에는 불기 2542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465년의 차이가 난다. ⓒ 김동이
개태사 초입의 일주문상량에는 불기 3007년으로 씌어있고 정문상량에는 불기 2542년으로 다르게 적혀있다. 한 건물인데도 불구하고 상량일 차이가 무려 465년이나 차이가 난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 불교가 도래한 고구려 시대로부터 1962년까지 약 1300년 동안은 석가부처의 탄생을 1027BCE로 하는 북방불기를 사용해오다,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 불교도대회에서 불법의 기원에 대해 당해 연도인 1956년을 2500년으로 공통적으로 적용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태국과 미얀마 등의 남방불교에서 쓰던 불기가 채용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본래 쓰던 불기 3000년과 약 500여년의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태사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으로 인해 북방불기를 고수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북방불기(불탄 3007년=서기 1980년, 일주문상량)와 불멸을 기원으로 하는 남방불기(불기 2542년=서기 1998년, 정문상량)을 함께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계룡의 묘미 中에서)
새로 축조한 우주당은 뫼산(山)자 형태를 하고 있다?
▲ 뫼산(山)자 모습을 하고 있는 우주당개태사를 들어서면 전설속 감나무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 3동 있다. 바로 우주당으로 뫼산(山)자 모습을 하고 있다. ⓒ 김동이
개태사를 들어서면 전설속 감나무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 3동 있다. 그런데 건물이 조금 이상하다. 3동 중 가운데 한 동이 약간 튀어 나와 보이는데 이것은 건물의 설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뫼산(山)’자 형태를 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이 바로 우주당이라고 하는 건물로 ‘뫼산(山)’자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이 3동의 건물은 사찰 종무소와 다실, 요사채 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일설에는 석조삼존불의 세 분 부처가 뫼산(山)자 형태요, 이곳 우주당의 요사채의 3동 건물이 뫼산(山)자인 바 서로 어우러져 뫼산(山)자 형태로 가람배치를 한 것이라고도 한다.
살아있는 영물이라 불리는 거대한 ‘철확’은 스님들의 국을 끓이는 데만 사용했을까?
▲ 개태사 철확개태사 가마솥인 ‘철확(鐵?)’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가마솥으로 스님들의 식사를 준비하는데 쓰이는 것 이외에도 다른 용도로도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김동이
개태사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개태사 가마솥인 ‘철확(鐵鑊)’이다.
이 철확의 크기는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가마솥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철확이 과연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것으로만 사용되었을까?
이 철확에 얽힌 설화를 보면 분명 개태사 철확은 국을 끓이는 단순한 기능보다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던 신물에 가깝지 않았나 생각된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이렇다.
“어느 해의 일이다. 큰 스님 한 분이 개태사를 찾아와 얼마 후 대홍수가 나서 본당의 부처님이 위험할 것이니 이 솥으로 본당에 이르는 물길을 막으면 불상은 안전할 것이다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은 가마솥으로 본당 앞을 막았다. 과연 대홍수가 났는데 불상은 안전했지만 가마솥은 떠내려가 지금의 고양리 다리 근처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쇠솥으로 제방을 쌓으면 수해를 막아주고 풍년이 들게 한다고 한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 가마솥의 뚜껑은 인근 천의 어디엔가에 묻혀 있어 지금도 흐린 날에는 ‘윙’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계룡의 묘미 中에서)
설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단한 물건임이 틀림없다.
또 한가지 용도는 경판의 나무를 삼고 쪄내는데 일부 활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총지휘를 하신 ‘수기(守其)스님’이 개태사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팔만대장경 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과정상 나무를 삼고 쪄내야 하기 때문에 이 철확을 그러한 용도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대장경 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리산이나 완도 등의 자작나무를 벌채하여 삼년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어 다시 소금물을 넣은 가마솥에 찐 뒤 그늘에서 말리고 대패질을 한 후, 경문을 붓으로 쓰고 그에 따라 새겼다고 한다. (계룡의 묘미 中에서)
개태사에 관운장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개태사에 관운장의 영정이?의아해하겠지만 개태사에는 관운장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김동이
개태사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자, 재미있는 것이 바로 대충의전(大忠義殿)이라 하여 관운장을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를 들고 긴 수염을 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개태사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개태사만 생각하고 얼핏 보면 태조 왕건의 영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분명 관운장의 영정이다.
그렇다면 왜 관운장의 영정이 여기에 모셔져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 또한 ‘계룡의 묘미’에 제시되어 있다.
“관운장이 죽어서는 엄청난 신적인 위험을 떨쳤는데, 중국과 한국에서는 관운장 신명께 빌면 어떠한 원한신과 척신 등 삿된 귀신도 물러갔다 한다. 이와 관련된 설화가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선조 25년 어느 봄날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선조대왕께서는 춘곤을 못 이겨 깊은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위풍이 당당한 한 장군이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들고 삼각수를 날리며 늠름하게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선조대왕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아우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 나는 삼국시대 관우인데 우리들의 의리와 인정을 잊지는 않았겠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말일세. 우리 3형제는 살아서는 합심협력하고 서로를 도왔고 특히 형님(유비)이 촉한의 왕이 되자 나(관우) 와 동생(장비)은 촉한에 충성을 바치고 마침내 순국하지 않았는가? 우리 삼형제는 한 세대가 끝나고 영혼의 세계에서도 그 의를 지켜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형님은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되고 나는 전쟁에서 인명을 너무 많이 해쳐서 인간 환생이 안 되었고 아우는 현재 조선왕이 되었지. 머지않아 동생의 나라에는 큰 병란이 일어날 텐데 아무 방비도 없이 나날이 보내는 동생이 딱해서 지금 내가 일깨워 주러 왔네. 이 난리는 표독한 왜적이 쳐들어오는 난리인데, 7~8년이나 걸릴 테니 명나라 신종황제(유비)에게 구원을 청해서 수습하도록 하게. 내가 신종황제에게 도원의 고사를 들어 간곡히 부탁할 테니 주저 말고 시행하게.”
하고 선연히 사라졌다. 깨고 보니 이상한 꿈이었다. 그러나 꿈대로 임진왜란은 일어났고 선조는 명나라 신종에게 원병을 청하였다. 그 요청이 간곡해서인지 관우의 신종황제에 대한 현몽에 감동해서인지 신종황제는 이여송을 총수로 하여 5만의 군사를 파병하여 돕게 된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에 관우의 의리를 기린다는 뜻으로 수많은 관왕묘가 이 땅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다. (계룡의 묘미 中에서)
▲ 탱화개태사에 모셔져 있는 탱화 ⓒ 김동이
▲ 단군 영정개태사에 모셔져 있는 단군 영정 ⓒ 김동이
▲ 남북통일 세계평화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불상도 개태사에 가면 만나볼 수 있다. ⓒ 김동이
▲ 방석위 나반존자(那般尊者)나반존자는 일반적으로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시는데, 개태사에서는 삼일지상정천궁(三一地上正天宮)이라고 명명하여 다른 사찰과는 달리 팔각정에 모시고 있다. 또한 일반 사찰에서는 탱화를 모시는 데 반하여, 석조로 조각된 나반존자 상을 모시는 점이 특이하다. ⓒ 김동이
▲ 개태사 5층 석탑개태사 정문에 들어서자 마자 왼쪽편으로 보이는 개태사 5층 석탑의 모습 ⓒ 김동이
▲ 마당 한 편을 지키고 있는 이름 모를 석불좌상우주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전에 축대 옆에 소박하고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부처님이 앉아 있다. ⓒ 김동이
▲ 소원을 들어주는 문댐돌용화대보궁 내 석불입상 발 아래 놓여져 있는 소원을 들어주는 돌멩이, 이것을 '문댐돌'이라 부른다. 돌을 돌리거나 들었을 때 움직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진다. ⓒ 김동이
이외에도 탱화에 얽힌 이야기, 창운각 속에 모셔진 단군, 남북통일 기원하는 정법궁 부처 등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파헤쳐 보면 분명 개태사라는 절은 비록 웅장함은 없지만 아기자기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 있는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볼품없고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절 개태사
▲ 5층 석탑 밑 동자승개태사 5층 석탑 하단부에 놓여져 있는 동자승의 모습 ⓒ 김동이
짧은 시간 동안 개태사를 둘러보면서 사찰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크게 와닿지는 않았지만 건물 하나하나, 물건 하나하나에 새겨진 의미를 되짚어보며 음미했던 개태사는 분명 우리 민족과 운명을 같이 했고 또 앞으로도 운명을 같이 할 우리가 가꾸고 보존해야 하는 문화재임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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