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설교가 아닌, 목사쟁이 삶을 담은 책
[사라진 책 23] 김재준 <죽으며 산다>
▲ 겉그림판이 끊어진 아쉬운 책 하나, <죽으며 산다>. 이 책을 써내고 엮어낸 분들 뜻과 생각이 좀더 널리 읽히지는 못할 테지만, 작은 씨앗 하나가 되어 우리 삶터 구석구석에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 최종규
- 책이름 : 죽으며 산다
- 글쓴이 : 김재준
- 펴낸 곳 : 사상사(1975.9.1.)
<1> 이 나라 아이들을 생각하며
… 오늘의 세계는 물건을 얻고 인간을 잃어간다 … (33쪽)
엊저녁, 인천에서 일산까지 전철을 타고 왔습니다. 주엽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꼭 세 시간이 걸립니다. 자가용으로 일산에서 인천으로 오면 한 시간 조금 더 걸리지만, 전철은 에돌고 또 돌기에 세 시간 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천에서 수원 가는 데까지, 또 안산에서 인천 오는 데까지도 멀고 멉니다. 왜냐하면 둘 사이를 곧바로 잇는 대중교통 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산에서 서울로, 인천에서 서울로, 안산에서 서울로, 수원에서 서울로, 군포에서 서울로, 안양에서 서울로, 광명에서 서울로 가는 빠른 길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산에서 광명으로, 안양에서 인천으로, 군포에서 일산으로 가는 빠른 대중교통은 없습니다.
…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 거기에는 무덤이 있을 뿐이다.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교회만이 부활을 체험한다… (7쪽)
무엇이든지 서울로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서울로만 바라게 되어 있습니다. 제 사는 인천땅은 예전부터 공장이 참 많았고 지금도 많은데, 이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물건은, 인천에서 쓰이는 일이 드물고 거의 서울로 가서 쓰이게 되어 있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놓은 첫 기찻길과 첫 고속도로는 ‘서울로 보낼 물류가 빨리 많이 한꺼번에 가도록’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인천과 서울 두 곳 문화와 사회를 북돋우면서 두 곳 사람들 삶을 넉넉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안산도 마찬가지요, 포항 울산도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이름은 ‘지방자치제’이지만, 지역마다 고유한 문화와 사회를 가꾸어 나가면서 홀로 꿋꿋하게 설 수 있도록 이끄는 흐름이 없습니다. 대학교를 가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야지, 지역에 있는 대학교에 가서는 어딘가 모자라다는 듯 여깁니다. 일터를 다녀도 ‘서울에 있는’ 곳을 드나들어야지, 지역에서 일하면 뭔가 어설프다는 듯 여깁니다. 출판사를 차려도 ‘서울에서 차려’야지, 서울을 떠나거나 벗어나면 아예 찬밥 대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 형편임을 잘 아는 우리 스스로 ‘서울은 임금이다’는 틀을 깨거나 고치거나 바로잡으려고 힘쓰지 않습니다. 힘드니까요. 고단하니까요. 따돌림받으니까요. 먹고살기 어려우니까요. 한자리 얻을 수 없으니까요. 이름을 날릴 수 없으니까요.
… 교회가 진리를 가졌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교회 안은 신비한 정숙일 경우가 많다. 교회 안의 진리는 진열장 속에서 만고의 고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깥 물결은 거세다. 그러므로 외향은 진리는 수난한다. 자기만이 아니라 소속체까지 희생될 위험이 육박한다. 그래서 안전자는 그 외향한 진리까지도 자기 모습대로 변형한다 … (8쪽)
인천에서 일산으로 나들이할 때마다 저나 옆지기나 몹시 힘듭니다. 대중교통이라는 전철 공기가 아주 나쁘기도 하고, 창문을 열 틈조차 없기도 하지만, 밀치고 치이는 사람들과 복닥이며 고달프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전철에서 내리지 않았는데 발 밟고 밀치며 타는 그네들 아주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어린이 젊은이 모두는 ‘불쌍하고 가녀린’ 사람입니다. ‘마음이 없고 가슴이 없는’ 딱한 사람입니다. 자기 이웃이 없는 사람, 자기 스스로 남들과 이웃이 되려고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전철에서 타고내리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고 할 때, 자기 어린 동생이라고 할 때, 그렇게 발을 밟고도 외려 눈알을 희번덕거린다든지, 팔꿈치로 명치께를 치면서 들어선다든지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어머니가 옆에 서 있어도 어머니 얼굴에 신문 끄트머리가 쓸리도록 펼쳐서 읽겠습니까. 자기 아들이 옆에 서 있어도 등에 멘 가방으로 사람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껄렁껄렁 서 있겠습니까.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는 것이 주어진 계율의 대헌장이다. 그런데 ‘내 몸’은 있지만 ‘이웃’이 없다. 있는 것 같다가도 당장에 알쏭달쏭해진다 … 예수는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엉뚱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했을 것이다. “내 이웃이 누구냐?”보다도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느냐?”가 문제다 … (14쪽)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돈이 있는 이름나고 높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다고 하지만 무슨 돈일지 모르는 돈이요, 이름나다고 하지만 무슨 이름이 나는지 모르는 이름이요, 높다고 하지만 어디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 모르는 높이입니다.
어려운 사람들 주머니에서 울궈낸 돈일는지, 검은 속셈으로 등쳐먹어 쌓아올린 돈일는지, 우리 자연 삶터를 죄 무너뜨리고 뽑아내는 돈일는지, 시세차익을 노리는 눈먼 돈일는지.
내 이웃과 동무를 쓰러뜨리고 짓밟고 올라서는 이름은 아닌지, 내 이웃과 동무가 어떻게 나뒹굴든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걸어가는 이름은 아닌지, 내 겨레와 내 나라뿐 아니라 이웃 겨레와 이웃 나라는 쳐다보지 않고 휘돌아치는 이름은 아닌지.
… 평화가 없는데, “평화다, 평화다!” 하는 지배층은 저주 아래 있다 … 바르게 싸우면 져도 이긴 것이다 … (16∼17쪽)
그제와 그끄제, 우리 도서관에 동네 아이들이 놀러 왔습니다. 도서관 계단을 신나게 쿵쿵쿵 뛰어올라온 아이들은,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야, 난장판이네?” 하고 한 마디를 내뱉습니다. 훗. ‘난장판’이라니. 이 아이들은 이 말을 누구한테 들었는지? 어디서 들었는지? 어떤 모습이 난장판이라는 셈인지?
아이들은 저보고 “남자가 왜 머리를 기르지?” 하고 묻습니다. 지지난주쯤 대여섯 달 만에 수염을 깎았는데, 수염 안 깎았으면 뭐라고 한마디 했겠네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아이들인데, 이 아이들은 어찌하여 벌써부터 ‘남자 = 짧은 머리’여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이 아이들이 품는 생각은 어디에서 얻은 생각이며, 어떻게 키우는 생각이고, 어떻게 살아가도록 맞춰지는 생각일까요.
▲ 예배당 불빛은…예배당 불빛은 무엇을 어디에서 왜 누구와 함께 밝히고 있을까요. ⓒ 최종규
엊저녁 일산에 닿아 바깥 밥을 사먹을 때입니다. 옆자리에 앉은 초등학교 낮은 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어머니한테 여러 소리를 듣습니다. ‘듣기’는 했는지, ‘영어’는 했는지, ‘읽기’는 했는지, 또 여러 가지 공부들….
아이들이 배워야 하는 영어는 어디에 어떻게 쓰는 영어일까요. 아이들이 읽어야 하는 책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낸 책일까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영재나 천재가 되도록 배워야 할까요. 모든 과목을 100점 맞아야 할까요.
그저께 인천에서 만난 아이 하나는, 어머니가 옆에 앉아서 숙제 닦달을 하느라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영어와 수학은 너무 지겹고 싫다’고 하지만, 이토록 싫은 영어와 수학을 안 할 수 없는 아이입니다. 또, 아이한테 들이대어지는 영어 교육과 수학 교육은 지겨울밖에 없습니다. 온통 달달달달 외워야 하는 것투성이니까요. 외워서 하나라도 틀리면 매를 맞든 벌을 받든 숙제가 산더미처럼 되든 하는 것투성이니까요. 이 아이들은 숙제에 공부에 학습지에 읽기와 독후감에… 숨돌릴 틈이 없습니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개혁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부단히 개혁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혁명에 있어서도 혁명한 것이 잘못이라기보다는 부단히 혁명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다 … (24쪽)
숨돌릴 틈이 없는 아이들은 어디에서 숨을 돌릴까요. 아이들은 숨을 돌리면서 살면 안 될까요. 아이들은 왜 학원에 다녀야 할까요. 왜 학교로만 모자라고, 서너 군데, 또는 대여섯 군데, 지나치면 열 군데도 넘는 학원에 끌려다녀야 할까요.
학교 공부를 마치면 학원버스가 학교 문앞에 길게 늘어서서 아이들을 맞이합니다. 아이들은 학교 시멘트 건물 골마루에 발을 디디고 있다가, 노란 봉고차에 실린 채 아스팔트 길 위로 지나간 뒤, 학원 시멘트 건물 골마루를 디딥니다.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옮겨다닌 다음, 아버지나 어머니가 몰고 온 자가용을 타고 집에 닿습니다.
집은 거의 모두 아파트.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밤부터 새벽까지, 흙 땅 한 번 밟아 볼 겨를이 없고, 모래 한 번 쥐어 볼 틈이 없습니다. 중학생부터, 또는 고등학생부터 ‘별 보고 집 나서서 별 보고 집에 돌아오기’가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별만 봅니다. 아니, 이 도시에 무슨 별이 있겠습니까. 별이 아닌 길거리 등불만, 아파트 불빛만, 상가 불빛만, 예배당 불빛만 보며 살겠지요.
… 위대하다는 인간들이 다 없어져도 인간은 여전히 사는 것이다. 전 세계 인구가 절반 이상이 없어진대도 인간 역사는 또 살아서 탑을 쌓기 시작할 것이다 … (26쪽)
고등학교 후배를 만났습니다. 열다섯 살 어린 고등학교 후배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태어난 아이들이었을까요. 후배 둘은 뒷날 교육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한 아이는 대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한 아이는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친구들은 앞으로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나중에 친구들이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할 때, 반 아이들이 서른 사람쯤 된다고 하면, 친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 서른 사람이 모두 교사가 되고 싶어한다면 어떻겠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 평화는 인간의 끊임없는 동경의 대상이요, 가장 고귀한 윤리이니만큼 그 대가도 고귀하다. 무상이나 염가로 평화를 획득하려는 것은 얌체에 속한다 … 가능하지 않다 하더라도 평화는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안락 위주의 무사주의가 아니다. 평화는 정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회정의가 서 있지 않은 고장에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억압과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에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정의는 질서를 요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필수로 한다 … (30쪽)
지금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어디로 가도록 이끌고 있을까요. 지금 우리나라 학교에서 교사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과 꿈을 키워 가고 있을까요. 달삯만 꼬박꼬박 받아가고 그치는 사람으로 있는 교사일지, 교과서 진도 잘 나가는 교사일지, 대입시험 문제를 잘 뽑아내는 교사일지요.
교사가 학생한테 잘 가르쳐야 할 것은 자기가 맡은 과목 교과서 줄거리일까요. 그러면 교사한테 주어진 교과서에 담긴 줄거리는 얼마나 아이들한테 가르칠 만할까요. 교과서는 얼마나 책다운 책일까요. 교과서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교과서는 이 나라 아이들을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고 있나요.
… 그리스도는 병든 자, 눌린 자, 버림받은 자, 죄인들을 찾아 그들의 인간됨을 치켜 올렸다. 상하고 이지러지고 땅바닥에 쓰러져 썩어가는 인간들을 만지고 쓰다듬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켰다. 그는 본래의 인간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그 격을 드높였다. 인간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대했다 … (32∼33쪽)
고등학교 후배들은 인천에 ‘공장이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공장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 공장에서 무엇을 만드는지, 공장이 얼마나 큰지 모를 테지요. 그 공장에서 만든 물건이 어디로 가며, 그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에 들어갈 재료를 어디에서 들여오는지도 모를 테고요. 그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며 나오는 쓰레기물과 쓰레기공기는 어디로 어떻게 흘러나오는지 알 턱이 없지만, 한 번이라도 생각한 일이 있을까요.
교과서에도 틀림없이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는 실립니다만, 아이들이 환경 문제를 살갗으로 느낄 수 있도록 얼마나 잘 가르치며 얼마나 꼼꼼하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아이들한테 ‘찻길을 새로 내야 하는 까닭’을 알려줄 수 있을까요. 자동차를 몰 때와 자전거를 탈 때와 두 다리로 걸을 때가 우리 삶터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우리 자신한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 십자가는…십자가는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고 있을까요. ⓒ 최종규
한 아이는 아침마다 아버지가 차로 학교까지 태워 준다고 합니다. 고등학생이나 되었어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이들을 차에 태워 학교로 데려다 줍니다. 차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고등학생쯤 되는 나이에도 학교까지 혼자 갈 수 없을까요. 아이들이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을 타고 학교에 다녀야, 비로소 자기 동네가 어떤 모습인지 코빼기만큼이나마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초중고등학교쯤 된다면, 집과 가까운 곳으로 다니기 마련이니, 대중교통조차도 아닌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침에 학교로 가는 삼사십 분 거리는 으레 걸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아침에 삼사십 분을 걸어서 학교나 일터로 갈 만한 넉넉함조차 없을까요.
… 예수는 말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금에 있어서도 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 (43쪽)
자가용에 태워 학교로 데려다 준다면, ‘어떤 시간을 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걸어갈 때보다 한결 빠르겠지요. 그러면, 학교에 빨리 가서 무엇이 얼마나 좋을는지요. 학교에는 꼭 빨리 가야 할는지요. 학교에 얼마나 빨리 가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나 어머니 차를 타고 가야 할까요. 아이들은 밤잠을 넉넉히 자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지요. 아이들이 밤잠을 좇아가며 공부를 해야 한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기에 그렇게 잠도 멀리해야 하는가요. 아이들이 밤잠도 잊은 채 하는 공부란 무엇이며, 이 공부는 아이들 스스로와 아이를 둘러싼 우리 삶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공부인가요.
아이들이 아침에 ‘시간을 벌’며 학교에 간다고 하는 자가용 태워 주기라지만,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으면 ‘시간을 잃’을까요. 자전거를 타거 학교에 갈 때와 두 다리로 걸어서 학교로 갈 때에는 아무것도 못 느끼고 아무것도 못 얻을까요.
… 예수가 인간을 찾고 인간이 예수를 찾건만 엇갈려서 만나지 못한다. 구유에 났는데 ‘맨션’을 뒤진다. 빈민촌에 계신데 ‘캐테드럴’을 찾는다. 땅에 계신데 하늘만 쳐다본다. 그래서 못 만나는 것일까? … (44쪽)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인천이든 부산이든 대구이든 광주이든, 또 서울이든, 이런 도시에서 살아간다고 할 때에는 아침에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어서 학교에 가는 ‘맛’이 거의 없을 듯해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느낄 수 없으니까요. 아니, 느끼기 어려우니까요. 언제나 똑같은 빛깔이요 우중충함이니까요. 하늘이라도 파란 적이 있어야지요.
새벽밥 지어먹기도 힘든 채 학교에 가야 한다면 아침놀이라도 볼 수 있겠습니까. 새들 지저귀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학교길인가요. 길가에 자라는 들꽃이라도 가만히 내려다보거나 쓰다듬어 볼 수 있는 학교길인가요. 길가에 자라는 나무는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에 숨이 막히고 길거리 등불 때문에 밤에도 쉬지 못해 시들시들 골병든 아픈 나무입니다. 푸른 잎사귀를, 붉고 노란 물이 든 잎사귀를 볼 수 없는 나무입니다.
그래도, 이런 학교길이라도 느껴야 뒷날 ‘우리 땅 우리 마을 우리 삶터 우리 자연 우리 사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부대끼고 있는가를 잊지 않을 텐데요. 아이들이 교육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사람이 사람으로 마주하는 일이잖습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마주하자면, 사람됨이 빵 점인 이도 있을 테고 사람됨이 오십 점인 이도 있을 테며 사람됨이 백 점인 사람도 있겠지요.
이 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다 다른 값어치를 일깨워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며 다 다르게 어우러질 수 있는 길을 찾는 참 교육자, 참 스승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다면, 구질구질 잿빛투성이에다가 자동차 배기가스와 시끄러운 차 소리로 지겨울 수 있는 학교길이라 해도, 아이들 스스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오갈 수 있는 학교길일 때, 한결 크고 뜻있는 학교길로 마음에 남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혁명을 한다 해도 겉에 걸친 의복 빛깔이 붉었다 희었다 하는 것뿐, 그 속의 인간은 옛날 그대로다. 권세는 인간악과 결혼하고 돈도 인간부패에 편승한다 … 새 인간에게만 새 시간이 소유된다. 저절로 흘러가는 시간이 ‘내 시간’으로 되기 위하여는 나 자신이 영원에의 가치를 살아야 한다. 예수는 시간적으로 30년을 살았지만, 그 시간은 그에게서 영생으로 화했다 … (46쪽)
▲ 십자가는… 2십자가가 서 있는 자리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십자가를 세우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 곳에 세우려 할까요. ⓒ 최종규
만화책 <드래곤 볼>을 보면, 주인공 손오공뿐 아니라 다른 동무들도 ‘죽어야 비로소 삽’니다. 참말 목숨이 끊어지든, 목숨이 끊어질랑 말랑이든, 자기 무술 솜씨가 그다지 높지 않음을 깨달아야(죽음), 자기가 가야 할 더 높은 무술 솜씨(삶)를 느끼고 수련에 게을러지지 않습니다.
우리 사람은 어디에서나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곡식 한 알이 썩어 수백 알로 거듭나고, 목숨 하나 죽어 흙으로 돌아가며 새로운 목숨이 태어나도록 도움이 되는 거름이 됩니다. 밥을 먹었기에 똥오줌이 나오고, 똥오줌이 흙으로 돌아가기에 이 흙에서 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똥오줌을 흙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흙은 우리한테 밥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하늘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니, 공장 굴뚝에서 매연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니, 우리 삶터 공기가 이 모양 이 꼴로 지저분합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는 왜 나와야 할까요. 공장굴뚝 연기는 왜 나와 할까요. 우리가 쓰는 물건이 많으니 그렇겠지요.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가 많으니 그렇겠지요.
버리니까 쓰레기가 나옵니다. 버리지 않으면 쓰레기가 없습니다. 욕심을 부려 더 쓰려고 하니 쓰레기가 생깁니다. 한 끼니에 밥 한 그릇이면 넉넉하지 않을까요. 한 끼니 밥 한 그릇에서 한 숟가락을 덜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러나 ‘늙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 (48쪽)
김재준 목사님이 쓴 <죽으며 산다>는 고작 52쪽짜리 자그마한 책입니다. 게다가 이 자그마한 책은 ‘500부 한정판’으로 나왔습니다. 책이 자그마한 데다가 몇 부 찍지 않았으니, 이 나라 도서관에서 이런 책을 갖추고 있는 데는 드물겠지요. 개인으로 갖고 있는 사람도 드물 테니 헌책방에서 이와 같은 책을 찾아보는 일은 더욱 힘듭니다.
그런데, 이 손바닥책을 펴낸 문익환 목사님(책 엮은이)은 “집입이 울타리 너머 창 너머 기웃거리는 그 고운 얼굴 보아주는 이가 없으면 어떱니까? 우리의 어린 신랑은 마냥 너그러운걸요.” 하고 책 뒤에 붙임말을 답니다. 밤이 아무리 캄캄해도 아침은 찾아오고, 닭이 홰를 치지 않아도 새벽은 밝아온답니다. 그래요. 이 조그마한 책 하나 얼마 안 읽혔어도 우리들 가슴마다 깃들어 있는 빛줄기 하나 캐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요. 우리들 이웃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애틋한 사랑줄기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요. 우리 땅 모든 목숨붙이마다 고이 배어 있는 믿음줄기 하나 받아 안을 수 있다면 좋겠지요.
목사님 설교가 아닌, 목사쟁이 삶을 차곡차곡 담은 작은 책, <죽으며 산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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