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늦가을, 가슴 아리도록 슬픈 역사를 만나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 양민 학살의 현장을 찾아가다
▲ 널브러진 위령비4.19 혁명 당시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주민에 의해 세워졌던 위령비는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다시 허물어진 채 땅에 묻혀야 했습니다. '특별법'이 제정된 지금도 한 편에 스러져 있는 것은 흡사 억울한 원혼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 서부원
지도만 놓고 보면 경상남도 거창은 대전, 대구, 광주 등 어디에서도 지척인 곳입니다. 그러나 직접 찾아 가서 보면, 아무리 내륙을 사방으로 관통하는 고속국도가 놓였다고 해도 험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여전히 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 박산골 합동 묘소시신을 대강 수습해서 각각 남자, 여자, 아이들 것으로 나눠 봉분을 조성했다고 한다. 봉분 앞 상석에 '남자합동지묘'라는 글씨가 보인다. ⓒ 서부원
고속국도를 벗어나 산길을 30여 분 동안 오르내리면 거창군 신원면 소재지에 닿습니다.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이 전격 이뤄지면서 미처 퇴각하지 못한 많은 인민군들이 1948년 10.19 사건(여순 사건) 때 형성된 반정부군과 합세하여 제법 큰 규모의 게릴라전을 전개한 곳입니다. 지리산과 가야산 자락을 근거지로 국군 토벌대에 맞선, 이른바 '빨치산'의 활동 무대였던 셈입니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했던 빨치산들과 끝까지 그들을 색출해내 죽여야 했던 토벌대들의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대대손손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양민들이었습니다. 밤에는 산짐승처럼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왔던 빨치산들에게 시달려야 했고, 낮에는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치도곤을 당하는 등 이중의 말 못할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 학살당한 원혼들의 위패거창 사건 추모 묘역 입구 오른편에는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위패를 봉안한 위령각이 자리하고 있다. ⓒ 서부원
작전이 '충실하게' 전개된 며칠 동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학살당한 사람들 중에 노약자와 부녀자, 그리고 기껏해야 여남은 살 정도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과 주검들을 한데 모아 기름을 끼얹은 후 태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학살이 무차별적이며 의도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좌우가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맹목적인 냉전의 시대에 안타깝게도 힘없는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은 맨 앞자리에서 희생양으로 바쳐져야 했던 것입니다. 이 천인공노할 만행은 자유당 정권과 '반공'을 국시로 한 연이은 군사 정권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으며, 유족들이 외려 숨죽이며 살아야만 하는 한 맺힌 세월이었습니다.
▲ 묘역 안에 세워진 추모시비갓 글자를 익힌 어린 아이들이 띄엄띄엄 비석에 새겨진 추모시를 읽어내려가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우리 현대사가 '박제화'되지 않도록 기성 세대의 끊임없는 자성과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 서부원
옛 위령비는 누군가에 의해 비문이 패는 등 곳곳에 생채기가 남아 있습니다. 지붕돌과 함께 무덤가에 '여전히' 널브러져 있는 것은 이곳의 가슴 아픈 역사를 후세들이 보고 느끼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왜냐하면 참혹했던 그때의 상황을 '탈색'하려는 듯 그냥 '거창 사건'으로 이름 붙인 것이 무척 생뚱맞고, 건너편 산을 반쯤 헐어낸 자리에 넓게 조성한 묘역과 기념관이 마치 '공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거창 사건 추모 묘역의 묘비들각 묘비마다에는 국화꽃이 놓여있고, 학살당한 사람의 이름이 비석의 정면에 적혀있다. 아울러, 비면 양쪽에는 학살당한 사람의 생몰년과 유족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애절한 사연들이 교훈이 되어 남아있다. ⓒ 서부원
거창 사건의 역사와 현재를 보여주는 시구(詩句)가 비석이 되어 곳곳에 새겨져 있고, 억울한 사연을 담은 묘비마다에는 가슴 저미게 하는 외침들이 선명합니다. 하나하나 어루만지듯 순례하다보면 눈시울이 붉혀짐과 동시에 백 마디 글과 천 마디 말보다 더 큰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작 추모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생화인지 조화인지 알 수 없는 국화꽃들만 지천인 묘역을 나와 다시 신원면 소재지로 들어서려니 아까의 정겨움과는 사뭇 다른 오싹한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이름인 신원이 '귀신(神)들이 모여 있는 집(院)'이라는 뜻으로, 거창 사건을 굳이 대입시켜보자면 '이유조차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는 곳'이라니 더욱 그렇습니다.
▲ 추모 묘역에서 바라본 학살의 현장, 박산골새뜻하게 조성된 거창 사건 추모 묘역에 서면 대규모 학살이 자행된 박산골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건너편 산비탈 누각 주변이 박산골이다. 아울러, 한 유족이 슬픔을 억누르며 썼을 글귀가 가슴 깊이 사무친다. ⓒ 서부원
마을 곳곳에 거뭇한 갈색의 나뒹구는 낙엽이 무척 처연하게 보였던 것은 겨울을 코앞에 둔 늦가을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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