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정녕 북한 땅인가

등록|2007.11.09 18:18 수정|2007.11.09 18:34

만물상 오르는 길만물상 오르는 관광객들의 행렬. 늦은 탓인지 단풍은 거의 다 지고 없었다. ⓒ 김석규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던 한민족의 땅, 북한.

<거제신문>과 세계항공여행 거제지사가 함께한 금강산 기행은 <거제신문> 직원 및 가족 10명과 일반시민 21명 등 모두 31명이 참여,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꾸며졌다.

첫날인 10월 30일 오전 8시 거제도를 출발하면서 시작된 금강산 기행. 전날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뒤척였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속초에서 묵은 첫날밤은 더 그랬다. 몇 시간 뒷면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휴전선을 지나 북한땅으로 들어선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처음으로 밟아보는 북한땅에 대한 기대와 약간의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10월 31일 새벽 5시 숙소인 콘도를 떠나 현대아산휴게소(강원도 고성군 화진포)로 향했다. 새벽 6시쯤 관광버스 속 TV에서 애국가가 나왔다. 오늘따라 애국가가 다르게 들린다. 새벽 6시40분쯤 금강산 관광객 집결지인 현대아산휴게소에서 도착, 관광버스에서 임시여권을 받은 일행들은 다시 동해선도로남측출입사무소에서 출국수속을 밟은 뒤 전용버스로 옮겨 탔다.

정각 오전 8시. 이날 금강산 관광객을 태워 북으로 향할 전용버스와 관광버스들이 번호판을 가린 채 북을 향해 달렸다. 번호판을 가린 이유를 전용버스 기사에게 물었다. “남한에서 쓰는 모든 것들은 사용하지 않는데다 경남, 전남, 전북, 강원 등 남한의 행정구역을 북한주민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일행을 태운 전용버스는 북쪽을 향했다. 현대아산 측 조장(가이드)는 “금강산 관광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16일과 10월 27일 각각 소떼 500마리와 501마리를 몰고 방북하면서 금강산 관광의 물꼬를 터 1998년 11월 18일 시작됐다”고 설명해 주었다.

또 그는 “남과 북을 잇는 길을 내기 위해 우리 군인들이 비무장지대의 지뢰를 제거하다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주었다.

이 길은 끝까지 지켜야 할 길이다. 길을 내기 목숨을 바친 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길이 영원히 막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쪽 군사분계선을 지나 휴전선을 표시한 사각기둥의 시멘트 말뚝(1290번째)은 15도 기울어진 채 서 있었다. 통일을 향한 몸부림에 기울어진 듯 조만간 휴전선을 알리는 1292개의 시멘트 말뚝이 모두 사라지길 바라본다.

차디찬 철책을 뒤로하고 비무장지대를 지나 북측 군사분계선을 지난다. 손때 묻지 않고 말없이 고여있는 늪과 나무와 새, 그리고 억새만이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보듬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순식간이다. 불과 1~2분 만에 우리는 남에서 북으로 넘어와 있었다. 새로운 볼거리에 넋을 놓았다. 어느새 차창 밖으로 고동색의 커다란 모자를 눌러 쓴 북한 병사가 눈에 들어온다.
금강산 1만2천봉 중 첫째 봉우리인 구선봉과 거울 같은 호수 감호가 일행을 맞는다. 둘레가 3km 정도인 감호 주변으로 갈대가 일렁이며 일행을 환영하고 있다.

오전 8시 25분. 이내 버스는 북측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일행은 짐을 챙겨 내렸다. 처음으로 밟아보는 북녘땅이다. 입국수속을 밟기 위해서였다. 금강산 관광보다는 북한땅을 밟는다는데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내가 선 이곳이 정녕 북한 땅이란 말인가.

입국수속을 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에서 문제가 생겼다. 카메라를 담당하던 (40대로 보이는) 여자군인이 카메라를 압수했다. 여자군인은 “고배율의 카메라를 반입하기 위해 일부러 배율을 지워 들어오는 남한 관광객이 있다. 이 카메라도 배율이 지워져 있다. 160mm(실제는 95mm에 불과함)는 넘는 것 같다. 다년간 카메라를 봐 왔기 때문에 선생님보다 내가 더 잘 안다”며 카메라를 압수했다.

할 말이 없었다. 계속 얘기하다간 돌아오는 날 찾을 때 벌금을 더 물어야 할 것 같아 포기했다(결국 10달러를 벌금으로 냈다). 다시 일행을 태운 버스는 북쪽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이동 중에 북한주민들의 모습과 사는 집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지만 사생활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대부분 이주를 다 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아니면 걸어서 일터로 나가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인다. 오전 9시 10분. 어느새 우리는 온정각 휴게소(금강산 관광의 시작점)에 도착했다. 속초에서 68㎞ 떨어진 온정각까지 오는 데 4시간이나 걸렸다.

온정마을은 따뜻할 온(溫) 우물 정(井)으로 따뜻한 물이 많이 나와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금강산, 봉래산, 풍악산, 설봉산(개골산)으로 계절마다 이름을 가진 산. 풍악의 가을은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다.

특히 북녘에서 첫날 찾은 만물상과 망양대, 그리고 둘째 날 찾은 구룡폭포, 상팔담은 진경(眞景) 중 으뜸이다.

단풍만물상 오르는 길, 단풍이 금강산을 감싸안았다 ⓒ 김석규


첫날 일행들은 셔틀버스에 나눠 타고 만물상으로 향했다. 오전 11시 15분 신(神)들의 지휘 아래 기암괴석이 빚어낸 만물상의 호위를 받으며 망양대(1014m)에 올랐다. 막걸리를 꼭 마셔보라는 지인의 말이 생각나 만물상을 오르기 전 막걸리를 마셔볼까 하다가 힘들 것 같은 생각에 내려와서 마시기로 하고 망양대로 향했다.

거의 60°~70°에 이르는 돌계단과 철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창 길을 재촉하는데 할머니가 옆을 지난다.

“할머니 힘 안드세요?”
“힘들지, 우리는 이 길이 마지막이어서 꼭 올라가야 되니까 없는 힘도 생겨나고, 젊은이들은 이번이 아니어도 다음에 또 올 수 있어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겠지.”

마음이 아프다. 언제고 어디서고 쉽고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물상의 장엄한 풍광은 단풍과 어우러져 일행을 감동시켰고, 3시간여를 힘들게 올라가 망양대에서 맞은 칼바람과 동해의 명사십리는 모든 근심 걱정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금강산 산악구조원이 망양대 정상에서 우리를 맞았다.

“어데서 왔습네까?”
“거제도에서요.”

“육지하고 거제도하고 다리가 연결됐습네까?”
“예~ 에, 30년 전에 다리가 연결됐습니다.”


“대우·삼성조선이 있는데 여성동무들은 놀기만 한다면서요?”
“대우조선, 삼성조선을 아나요?”


“고럼요, 거제도에서 온 여성동무들이 얘기해줬습네다.”

놀랄 뿐이었다. 생각보다 북한사람들은 많이 똑똑했고, 부끄러워하거나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대화에서도 지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 산악구조원은 단체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를 뺏어 들었다.

망양대 정상북한 산악구조원이 단체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를 뺏다시피 찍어주었다. ⓒ 김석규


“자, 찍습네다. 하나, 둘, 셋!”
“건강하세요.”
“동무도 건강하시라요.”


망양대서 본 명사십리망양대 정상서 본 명사십리. 칼바람이 땀을 식혀주었고, 모든 스트레스와 피로도 씻어주었다. ⓒ 김석규


아쉬운(?) 이별을 하고 우리는 내려오기 시작했다. 올라갈 때는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는데 내려오는 데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셔틀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다시 내려왔다. 오후 2시가 조금 넘고 있었다. 서둘러 막걸리 파는 곳을 찾았지만 이미 다 팔리고 한 병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회막급이다. '올라갈 때 사들고 갔다 망양대에서 드넓은 동해를 보며 막걸리를 마셨으면 좋았을걸…. 내일은 꼭 마셔봐야지.' 일행은 다시 온정각에 도착, 광개토식당에서 버섯전골로 늦은 점심을 먹은 후 오후 4시께 금강산 온천에 피곤한 몸을 담갔다.

따뜻한 온천수가 나의 몸에 스며들자 전혀 낯설지 않은 평온함으로 한민족 한겨레의 동포애가 내 몸에 서서히 녹아든다. 오후 6시 30분 금강산 교예단 공연은 금강산 관광의 백미(白眉)였다. 가슴 뭉클함을 느끼지 않은 관광객들이 없었을 것이다.

교예단원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신이었다. 신들린 듯한 그들의 공연과 기술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로 나와 네가 하나 되는 느낌, 동포애로 다가오는 그 묘하고도 애잔한 감동 속에서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어쩌면 깊은 마음의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연을 보고 느낀 깊은 연민의 정을 글로 표현해낼 길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잔잔한 감동을 뒤로하고 일행은 숙소로 돌아갔다.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방이었는데 나름 포근한 잠자리였다. 북한의 대표적인 들쭉술과 맥주로 10월의 마지막 밤과 금강산에서의 마지막 밤, 그리고 11월의 첫날밤을 그렇게 맞았다.

북녘에서의 마지막 날 일행은 둘로 나눠졌다. 구룡연·상팔담, 해금강·삼일포 코스 관광으로 나눠져 각자 여행길에 올랐다. 구룡연·상팔담 코스를 선택한 일행은 서둘러 물을 챙기고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과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상팔담으로 향했다.

옥류동 계곡옥류동 계곡. 담소의 넓이는 630m, 깊이는 6m, 폭포의 길이는 58m. 수정같은 맑은 물이 누운 폭포를 이루며 구슬처럼 흘러내린다고 해서 '옥류동'이라고 한다. ⓒ 김석규


오르는 초입에 막걸리를 샀다. 어제 마셔보지 못한 후회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룡연(폭포) 오르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깊은 가을의 맛을 한껏 느끼며 산행이 시작됐다. 옥류동 계곡, 련주담, 비봉폭포 등과 여러 개의 구름다리, 그리고 금강문을 지나 구룡연(폭포) 관폭정에 닿았다.

구룡폭포 위의 달구룡폭포 가는 길에 파란 하늘위로 달이 떠 있다. ⓒ 김석규


기대가 커서였을까. 생각보다 구룡폭포는 우리를 압도하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아서였을까. 아쉽다. 서둘러 사진 몇 장을 찍고 막걸리를 꺼내 한 잔씩 돌려가며 마셨다. 달짝지근한 게 지인으로부터 들었던 말만큼은 아니다. 어떻든 시원한 막걸리 한잔으로 우리는 마른 목을 적셨다.

상팔담구룡폭포에서 30여분을 더 올라 우리에게 보여준 상팔담. 내려가기 싫었다. ⓒ 김석규


험하다는 상팔담으로 가기 위해 관폭정에서 내려와 깎아지른 절벽을 향해 올랐다. 철계단이 아니면 오르지도 못할 것 같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30여 분간 올랐을까. 눈에 펼쳐진 상팔담의 풍광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떤 전설이고 갖다 붙이면 뭐든 전설이 될 것 같은 눈 시리도록 푸른 물빛이 우릴 향해 금강산의 기상을 전해주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 막걸리를 사서 소고기 꼬치와 녹두전으로 허기를 달랬다. 참 맛있다. 북녘 아가씨는 막걸리를 파느라 피곤했는지 짜증도 가끔 냈는데 그래도 예쁘게만 보인다. 오후에 내려와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었다. 맛은 심심한 게 별로였지만 북한에서 북한아가씨가 건네 준 북한 냉면을 먹었다는 생각에 기쁘다.

삼일포삼일포에 외로이 선 정자가 주인을 외롭게 기다리고 있다 ⓒ 김석규


11월 1일 오후 4시 온정각 휴게소를 떠난 일행은 왔던 길을 되돌아 나섰다. 속초까지 68㎞. 되돌아오는 길, 한 북한 주민이 손을 흔든다. 자주 봐 왔던 풍경이어서인지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어 배웅한다. 그런데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10여 명의 초등학생들은 갑자기 서더니 쪼그리고 앉는다. 몸을 숨기는 것처럼 보였다.

서글프다. 북측출입사무소에서 카메라를 10달러 벌금을 주고 찾았다. 다시 휴전선을 넘어 자유의 땅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다시 가려면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할까. 아쉬움 속에 휴전선을 넘는다. 일행은 다음날 새벽 2시에야 신거제대교를 넘었다.

이렇게 금강산을 가는데 반세기가 걸렸다.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했던 곳이다. 반세기 만에 열린 이 길이 어느 순간 닫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 아프다. 아직 금강산을 보지 못한 분들이 훨씬 많은데…. 한겨레의 산하를 마음대로 오갈 수 없다는 것은 큰 아픔이다.

그 고통이 이젠 끝나면 좋겠다. 그리고 백두산 관광을 중국을 거치지 않고 관광할 수 있는 하늘길도 열린다는 말도 들린다. 언젠가는 한라산을 가듯 백두산도 가고 거기서 사진도 맘껏 찍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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