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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추리무협소설 <천지> 306회

등록|2007.11.12 08:14 수정|2007.11.12 08:23
새벽이 되면서 안개가 자욱하게 흐르고 있었다. 서호(西湖)에서 피어난 안개는 구릉을 타고 돌아 운중보를 덮으며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 안개와 함께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분노는 또 한사람의 몫이었다. 귀산노인의 시신을 보며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참았다. 불쌍한 노인네였다. 젊어서 자신이 선택한 주군(主君)의 죽음과 그 주군의 마지막 명으로 인하여 모든 꿈을 접고 주군을 죽인 원수를 위해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오직 주군의 명이었기에 노인은 끝까지 자신이 할 일만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리고 주군의 아들과 주군의 형제들이 남긴 그 후예들을 기다리며 평생을 보냈던 인물이었다. 모든 준비를 해놓았지만 과거로 돌리기에는 상황은 변해 있었다.

원수라 해야 할 보주를 향해 칼끝을 내미는 것은 그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나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와 같았다. 갈등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고, 주군의 후예 역시 마찬가지였다.

복수를 하고, 하지 않고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주군의 아들이 결정할 문제였다. 주군에게 그랬듯이 그는 주군 아들이 선택한 길을 그저 따를 것이었다. 허나 그 결정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

지독한 살기를 몸에서 뿜어내고 있는 능효봉의 모습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그는 분노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듯 했지만 그가 더 이상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능효봉이 한참이나 무화의 손에 안겨있는 귀산노인의 시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모두 죽인다!”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는 나직한 그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천룡의 형상이 그의 머리 위로 선명하게 나타나더니 곧 바로 그의 신형은 안개 속으로 묻혔다. 그제야 무화와 선화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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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챗살 같은 장검의 잔영이 상하 좌우를 가르며 뿜어졌다. 미증유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 했다. 허나 반대편에서 몰아치는 낙뢰와 해일은 그에 못지않았고, 거대한 굉음을 울리며 네 개의 기류는 중앙에서 마주쳤다.
 
파파파팟. 쿠쾅!

절정고수 세 명을 혼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이미 몸이 완전치 못한 상태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를 악물고 마지막 진기까지 끌어올려 세 명을 한꺼번에 상대한 풍철한의 모습은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십여 걸음이나 뒤로 떠밀려난 풍철한은 아직까지 서 있었다. 전신 어느 한군데 성한 곳이 없어보였다. 옷은 이미 걸레처럼 너덜거리고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신을 피로 뒤집어쓰고 있었다.

“우엑!”

억지로 참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입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동시에 그는 더 이상 발로 땅을 밟아 지탱할 수 없었다. 뒤로 신형이 넘어가자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진기가 한 줌도 남아있지 않은 듯 했고, 기혈이 역류되는 것이 심상치 않은 내상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허나 풍철한이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폭풍우가 휩쓸어간 자리에는 핏자국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장내에 팔 하나가 잘려져 흉측한 모습으로 떨어져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드러눕듯 쓰러져 있는 이군 중 한 명의 팔이었다.

“으음.”

백룡 역시 쌍첨검을 힘겹게 들은 채 신형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도 가느다란 혈선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상을 입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의 옆으로 이군 중 한 명이 서 있었는데 비교적 사정은 나은 것 같았다. 가슴과 어리 쪽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네놈이…대체 인간인가?”

백룡이 입술을 짓이기며 말을 뱉었다. 저렇게 강한 인간이 존재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버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백여 초가 흘렀지만 거의 동패구상의 형국이다.

“으드득!”

그의 옆에 있던 이군 중 한 명이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으며 걸음을 떼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는 두자 정도 길이의 쌍도가 들려있었는데 하나는 이미 한 자 정도가 부러져 나간 상태였다.

지금이 기회였다. 저 자의 숨통을 지금 끊어놓지 못하면 오히려 자신들이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을 줄 수 없었다. 자신들도 완전히 탈진해 있는 상태였지만 상대인 풍철한의 상태는 더욱 심했다. 자신들이 휴식을 하면 풍철한 역시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억!”

그 때였다. 둔탁한 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옆에서 터져 나왔다. 흑룡과 싸우던 반효가 지른 비명이었다. 대형인 풍철한의 위급함을 알고 마음이 급해진 반효가 무리한 공격을 하다가 흑룡의 발에 정통으로 옆구리를 걷어차인 것이다.

털썩--!

이미 흑룡과 팽팽한 대결을 벌이면서 두 사람 모두 지친 상태였다. 일장이나 날아간 반효의 몸이 지면에 나가 떨어졌다. 그의 몸이 날아간 선을 따라 핏줄기가 호선을 그렸다. 고수들의 대결에 있어 잠시간의 방심은 곧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이렇게 지친 경우 그 결과는 더욱 치명적이다.

“중원사괴의 명성도 이것으로 끝이다. 흐흐.”

흑룡이 숨을 몰아쉬더니 서서히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반효가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앉으려 했다. 그의 입으로는 계속 피가 흘러나왔고 두 눈에는 절망적인 기색이 흘렀다. 절망적인 기색과 함께 떠오른 의혹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반효로 하여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

어디선가 나뭇잎이 계속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그것은 벌써 들렸던 것인데 더욱 커지는 것이 계속해서 무언가 장내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마치 둑이 터져 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이 무언가가 밀려들고 있었다.

사사사삭!

그 소리는 흑룡도 들은 것 같았다. 그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그 소리는 더욱 커졌고 급기야는 무언가 장내로 불쑥 튀어 나왔다. 검은 빛깔의 사람 형체였는데 이상하게도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웬놈들이지?’

허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흑영은 분명 사람이었고, 하나가 아니었다. 계속해서 숲에서 쏘아져 나오는 흑영은 적어도 열 명은 넘는 것 같았다. 아니 언뜻 나타난 인원이 그렇다는 것이지 계속해서 쏘아 나오는 인원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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