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모은 적금 깨, 아내에게 선물하다
12일이 결혼 13주년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님이여, 나랑 살아준 것만으로도 고맙소. 동갑내기로 만나 때론 티격태격하며 배가 뒤집힐 정도로 강풍이 몰아 치기도 했지만 우린 잘 버티는 부부로 아직 회로 하고 있소.
결혼 후 처음엔 기선제압을 위해 언제나 으르렁 거리며 살았지만 어느 날엔가 그것이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농간이란 사실을 가부장제라는 어리석음의 전유물임을 알게 되었소. 그래서 그 다음부턴 '당신이 내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소'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기로 마음 먹었소. 그렇게 한생각 바꾸고나니 모든게 달라 집디다.
보기 싫던 점 하나가 꽃점으로 보이고 듣기 싫던 수다가 기분좋게 들리더이다. 이제 우린 서로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넘어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졌고 거기 집중하기로 했소.
사랑하는 우리 자식들 잘 키우고 그 애들이 독립할 때까지 온 정성을 다 쏟아 붓기로 했지요. 결혼한 지 벌써 13년째가 되었군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우리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배려해 주면서 그렇게 알콩달콩 한세상 살다 갑시다.
자굼 우리 나이 40대, 아직 어린 자식들 독립시키고 나면 60대 노인네가 되어 있겠네요. 그때 가서도 여전히 나는 '당신이 내곁에 있어 주는것만으로도 고맙소'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도록 노력 할 것입니다. 그동안 힘들고 어려운 나날이었슴에도 참고 견디며 살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내는 결혼하고 편할 날이 별로 없었다. 돈 못 버는 나 때문에 몸고생 마음고생 참 많이도 한 거 같다. 지난 IMF 시절, 직장 잃고 백수로 지낼 적에 아내는 돈을 꿔 생활을 유지했었다. 그나마도 힘들자 아내는 내가 결혼 예물로 해준 귀금속을 모두 팔아 먹었다. 생활비 보태쓰려고... 그래서 결혼 예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이 늘 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큰 맘 먹고 아내에게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해주려고 했었다.
"난 귀금속 같은 거 싫어. 주려면 현금으로 주라."
아내는 늘 변함없이 그렇게 말한다. 자신의 치장을 위해 쓰려는 게 아니라 가정을 위해 쓰려는 것이다. 아내는 또 생일 때 케이크 하나 사들고 들어가는 것도 무지 화를 낸다. 쓸데없이 돈 쓴다면서... 참 알뜰한 아내다. 아내는 그럴 때도 말한다.
"그런거 사올려면 그냥 돈으로 줘."
▲ 결혼 13주년 기념 선물지난 1년간 용돈 생길때마다 모아온 적금통장. 찾으니 90만원이었다. 1백만원 채워 주려고 노력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 변창기
나는 지난 1년 동안 아내가 주는 용돈을 한푼두푼 저축해왔다. 1년 만기고 내년 1월 말에 타는데 해약을 해버렸다. 12일이 결혼 13주년 되는날이라 오늘 아침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쉬는날 가끔 공사장 일당잡부로 나가서 번돈이랑 이래저래 합쳤더니 90만원이 되었다. 사실 난 그것을 2~3년 더 모아 제주도 가족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결혼할 때 지인의 도움으로 싼값에 괌을 갔다 왔는데 아내는 외국보단 제주도를 가보고 싶어한다. 결혼 10년 넘게 TV방송이나 신문에 제주도 관련 기사만 나오면 언제나 소망처럼 이야기 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돈을 모아 꼭 제주도 여행 한 번 시켜 주겠노라고 마음 먹었었다. 그러나 보류해야 할 거 같다. 눈치빠른 아내는 용돈을 어디에 쓰기에 그리 빨리 사라지냐고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큰 선물 하나 주지."
오늘 아침 나는 아내에게 해지한 통장과 현금 90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아내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워 했다.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또 비밀리에 적금하나 들었다. 3년 정도 모을 작정이다. 용돈 한푼두푼 모아 목돈 마련하여 꼭 아내가 그렇게도 가보고 싶어하는 제주도 여행을 시켜 주고야 말리라.
덧붙이는 글
아침에 아내가 어제 저녁에 현근이 울고불고 생야단을 쳤다고 한다. 이유를 들어보니 황당하기도 했다. 현근이가 갑자기 "색시 그려줘"라고 해서 큰 딸이 "색시가 뭐야"라고 말한 게 발단이 되었단다. 7살 아들은 계속해서 "색시 그려줘"라고 말하며 때를 쓰더니 누나가 못알아 듣자, 막 울면서 그려 달라고 하더란다. 누나는 색시가 뭔지 이해를 못해 "그럼 여기다 한번 그려봐"라며 도화지를 내 밀었다. 아들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제야 딸은 뭘 그려 달라는지 알아 차려 그려 주었단다. "택시 그려 줘"라고 했더라면 첨부터 알아 들었을 텐데 혀가 짧아 '택'자를 '색'자로 발음해서 딸이 알아 듣지를 못한 것이었다. 딸은 그림을 곧잘 그리는데 도화지 하나에 큼지막하게 택시를 그려주니 그제야 울음을 그치더란다. 7살 아들은 아직도 때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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