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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의 탐정

[불멸의 탐정들 12] 할리 퀸

등록|2007.11.12 15:08 수정|2007.11.12 17:26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할리 퀸이 등장하는 단편 12편이 실려있다. ⓒ 황금가지

수수께끼의 탐정. 할리 퀸에게는 이런 수식어가 적당하다. 이거 이외에 다른 표현은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할리 퀸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에 대한 신상명세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상명세는 물론이고 그의 외모에 대한 묘사도 거의 없다. 할리 퀸이 어디에 사는 사람인지, 평상시에 뭐 해먹고 사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는 키가 크고 홀쭉한 체격에 검은 머리털을 가지고 있다.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할리 퀸의 프로필은 이렇게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할리 퀸의 행동이나 말투도 기이하기만 하다. 그는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범죄가 있다.

그 범죄는 아주 오래 전에 발생된 미해결 사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앞으로 곧 일어날 사건일 수도 있다. 할리 퀸은 마치 범죄를 예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길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실제로 그곳에서 잔인한 범죄가 발생한다. 할리 퀸은 몇 마디 말로 사건의 해결을 돕고 곧 사라져 버린다. 그가 나타나는 장소는 어두운 술집이기도 하고, 커다란 대저택이기도 하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는 해변일 때도 있다.

이런 행동만큼이나 그가 하는 말도 신비롭다. 그는 다른 탐정들처럼 자신의 생각을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단지 핵심을 찌르는 말을 몇 마디 던질 뿐이다. 주변의 사람들은 할리 퀸이 암시하는 대로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결론에 이른다. 할리 퀸은 말이나 행동 모두 기이하기만한 인물이다.

이렇게 기이한 인물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할리 퀸에게 집중되는지 모른다. 아무리 보아도 할리 퀸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사람이다. 특징은커녕 호감조차도 생기기 힘든 인물이다. 말도 없고 감정표현도 없다. 하지만 뛰어난 직관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할리 퀸의 의견을 존중한다. 할리 퀸이 입을 열면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그의 말을 듣는다.

소리없이 사건현장에 나타나는 할리 퀸

할리 퀸의 재능을 인정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새터드웨이트라는 사람이다. 그는 60세를 넘긴 노인으로, 할리 퀸 시리즈의 모든 작품에 등장한다. <퀸의 등장>에서 새터드웨이트는 62세였다. <바다에서 온 남자>에서는 69세의 나이로 바닷가를 거닌다. 할리 퀸 시리즈에서 실제로 중요한 인물은 어쩌면 새터드웨이트일 것이다.

할리 퀸과 새터드웨이트의 관계는 어찌 보면 셜록 홈즈와 와트슨의 관계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좀 더 복잡하다. 새터드웨이트는 와트슨보다 더 능동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할리 퀸에게 추리의 방법을 전수받지만, 나중에는 할리 퀸 못지않은 날카로운 추리력을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새터드웨이트는 돈 많은 미혼의 노인이다. 백만장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부인도 없고 자식도 없다. 취미로 미술품을 모으고 사진을 찍는다. 60살이 넘도록 많은 경험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새터드웨이트가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하다.

새터드웨이트는 풍족한 여생을 즐기는 노인이면서, 동시에 끝없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길가에서 쓰러져 죽은 개를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바닷가에 주저앉아서 외로운 노인의 고독감에 몸을 떨기도 한다.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얻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자신에게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새터드웨이트는 호기심이 많다. 그는 나이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인물이다. 할리 퀸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새터드웨이트보다는 한참 어릴 것이다. 새터드웨이트는 이렇게 나이 어린 할리 퀸을 추종하는 사람이다. <퀸의 등장>에서 새터드웨이트는 할리 퀸과 처음으로 만난다. 그 장소는 신년파티가 열리는 대저택이다. 새터드웨이트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파티를 하고 있을 때, 할리 퀸이 마치 유령처럼 그 집에 나타난다.

자동차로 그 주위를 달리다가 차가 망가져서 잠시 신세를 지기 위해서 그 저택에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저택의 예전 사건 하나를 명쾌하게 해결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이때부터 새터드웨이트는 할리 퀸의 추종자로 변하게 된다.

할리 퀸과 새터드웨이트의 콤비플레이

<쥐덫>할리 퀸이 등장하는 단편 <연애탐정>이 실려있다. ⓒ 동서문화사

<퀸의 등장>이라는 작품에서 그나마 할리 퀸이 어떤 인물인지 조금 알 수 있다. 할리 퀸은 이방인으로 등장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능숙하게 이야기를 주도해나간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 기분 좋게 울린다.

모든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던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할리 퀸은 색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할리 퀸은 '사물을 어떻게 관찰하며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문제는 달라집니다'라는 말을 한다. 오래된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관점을 바꾸어서 바라보면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새터드웨이트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주도하는 할리 퀸의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본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된다. 할리 퀸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저택에 등장했다는 것을.

아니 지금의 모임 자체가 어쩌면 할리 퀸의 연출로 생겨난 한편의 연극이라는 것을. 할리 퀸은 마치 과거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부러 저택에 들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극 같은 상황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퀸의 등장> 이후로 새터드웨이트는 향하는 장소마다 할리 퀸과 마주친다. 새터드웨이트는 할리 퀸을 볼 때마다 노골적으로 반가워하지만, 할리 퀸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다. 새터드웨이트는 처음에 할리 퀸의 이야기를 주로 듣는 편이었다. 할리 퀸이 설명해주는 사건의 진상을 끝까지 듣고서 감탄하는 것이 새터드웨이트의 역할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터드웨이트의 모습도 변한다. 할리 퀸은 사건을 앞에 두고 새터드웨이트에게 추리의 방법을 알려준다. 할리 퀸은 새터드웨이트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고의 방법을 유도해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새터드웨이트는 사건의 본질에 다다르게 된다. 새터드웨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나중에는 할리 퀸이 없어도 스스로 범죄현장에서 트릭과 속임수를 간파해서 사건을 해결할 정도가 된다.

할리 퀸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모두 할리 퀸과 새터드웨이트 두 사람의 단막극이나 마찬가지다. 할리 퀸도 중요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오히려 새터드웨이트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 살인사건이 연극처럼 펼쳐지고, 새터드웨이트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연기하고 있다. 자기 차례가 되어서 자신의 대사를 말할 때 실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할리 퀸이라는 신비의 인물을 창조한 작가는 영국의 애거서 크리스티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별명답게, 애거서 크리스티는 여러 명의 명탐정을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은 에르큘 포아로 일테지만, 가장 신비로운 탐정은 바로 할리 퀸일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인물을 만들었을까. 할리 퀸이 살인사건의 단막극을 연출한 사람이라면,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소설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연출한 작가다. 할리 퀸이 새터드웨이트에게 추리의 과정을 전수한 것처럼, 애거서 크리스티도 할리 퀸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추리의 방법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작품 속에서 할리 퀸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터드웨이트의 분신(分身)처럼 변해간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만들어낸 명탐정의 또 다른 분신, 그가 바로 할리 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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