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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목숨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추리무협소설 <천지> 307회

등록|2007.11.13 08:18 수정|2007.11.13 08:31
그들은 한결같이 털이 숭숭 난 팔뚝만 드러낸 채 나머지 부분은 몸에 착 달라붙는 아주 새까만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바다에 사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흑룡이 소리쳤다. 허나 대답은 없었다. 말 대신 그들은 일제히 손에 든 병기를 놀리며 흑룡을 비롯해 세 사람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들이 든 것은 한결같이 물 속에서 사용하는 분수자였다. 흑룡은 지친 몸으로 황급히 몸을 놀리며 대항했고, 백룡과 이군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들은 검은 폭풍이었다. 분명 베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병기는 그들이 입고 있는 이상한 가죽옷으로 인해 약간씩 빗나갔다. 더욱이 그들은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부상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쪽은 흑백쌍용과 이군이었다. 이러한 싸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일각도 지나기 전에 흑백쌍용과 이군은 전신이 분수자에 난도질당한 채 목숨을 잃었다. 탈진해 숨을 몰아쉬는 풍철한의 동공에 흐릿하게 눈에서 노기를 뿜어내고 있는 해룡신 위일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분노가 섞인 걸걸한 목소리를 들으며 혼절했다.

“좌측으로!”

검은 폭풍은 또 다시 나뭇잎을 헤치며 해일이 몰려가듯 순식간에 빠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꼬리를 무는 인원들의 수를 헤아릴 만큼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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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감 일행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숨는 자가 되었고, 그것도 술래와 상관없이 아주 숨는 자가 되었다. 술래는 흑교신과 매교신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승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싸움은 상만천이 해줄 터였다. 술래잡기라는 말이 나왔을 때 흔쾌히 동의한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만약 상만천을 비롯한 전체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수하들이었다면 추태감은 술래잡기 따위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전력이 우세한 상황 속에서 굳이 이런 번잡스러운 놀이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경쟁상대는 이들이 아니라 바로 상만천이었다. 술래잡기를 통해 상만천의 전력을 최대한 약화시켜 놓는 것이 필요했다. 물론 상만천 역시 그런 속셈을 가졌을 것이지만 그런 점에 있어서는 이신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훨씬 유리할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나타나 앞을 지나가도, 또한 누가 바로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어도 손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움직일 시기는 흑교신과 매교신이 돌아올 때였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추태감은 삼수검 엽락명이 오는 바람에 몸을 드러내야 했다.

“어찌되었나?”

그래도 성한 몸을 가진 쪽은 간번(艮幡) 뿐이었다. 천과는 풍철한과의 드잡이 질로 인해, 그리고 곤번(坤幡)은 선화의 소수인장을 맞은 탓으로 아직까지 정상 몸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 처리되었습니다. 다만 상대인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엽락명은 공송하게 두 손을 모으며 읍했다. 추태감의 반보 뒤에 서 있던 천과가 검미를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도 역시 움직이지 않고 숨어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군과 오위 그리고 흑백쌍용은?”

“그들은 잠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저들과 동패구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엽락명은 천과에게 역시 공손하게 대답했다.

“시체는 확인했는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이 생사림 안에 움직이는 자들이 많아서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좌총관이 창월에게 당했고, 귀산노인 역시 매교신에 의해 죽은 것은 확인했습니다.”

“좌등이 창월에게?”

뜻밖의 소식이다. 창월이 왜 좌등을 해쳤을까? 언뜻 듣기에는 매우 좋은 소식 같지만 추태감과 천과는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인물들이 아니었다. 불길한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창월이 감히 좌등에게 손을 썼다?”

추태감이 얼굴을 굳히며 뇌까리자 천과는 단숨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분명 추태감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바로 창월을 움직인 장본인이 상만천이라는 사실로 이어졌다. 아니 상만천이 아니다.

“성곤! 결국 성곤이 상만천과 손을 잡은 것인가?”

천과가 세밀하게 파악한 바로는 창월은 다른 사람의 명령을 들을 인물이 아니다. 창월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성곤이 유일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아니 애써 배제했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신을 빨리 불러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천과가 다급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또한 자신들이 이 생사림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만천 역시 이 생사림 안에 있을까? 아니었다.

그가 성곤과 손을 잡았다면 그는 이미 운중각으로 향했을 터였다. 상만천은 자신들보다 한 수 위였다. 그가 여유를 잃지 않고 은근한 자신감을 내비친 것은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무위에 대한 자만감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겠지만 바로 성곤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매교신은 몰라도 흑교신은 오지 못합니다.”

엽락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뭣이라고? 그가 당했단 말인가?”

천과가 다시 다급하게 묻자 엽락명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 애송이는 혈룡의 후예입니다. 혈룡장을 완벽하게 익힌 아이입니다. 아무리 흑교신이라 해도 혈룡장을 완벽히 익힌 자를 쫓아간 것은 실수였습니다.”

“흑교신이 정말 그 놈에게 당했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 듯 다시 한 번 물었다. 엽락명이 재차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습니다. 매교신 역시 압습에 있어서는 탁월한 솜씨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그리 뛰어난 여자는 아닙니다. 무화나 선화를 동시에 상대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천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추태감이 믿고 있던 인물들이다. 처음으로 천과는 세상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졌다. 동창 내에서, 그리고 추태감의 울타리 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면 휘둘렀던 그다. 허나 그것은 등에 업은 권력의 힘이 작용했던 결과다.

갑작스럽게 자신들이 나약하게 느껴졌다. 결국은 지금까지 많은 몰이꾼을 이용해 편하게 사냥을 즐겼던 것에 불과했다. 몰이꾼이나 방조해 주는 사람 없이 직접 내생에 뛰어들어 사냥을 하기 시작하자 자신들의 위치는 사냥꾼이 아니라 오히려 사냥감이 되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엽락명이 숙였던 고개를 들며 말을 끌었다.

“그리고?”

천과가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엽락명의 말을 따라 되물었다. 엽락명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당신들도 모두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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