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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 우리 ‘말’

[우리 말에 마음쓰기 139] ‘얼핏’ 보기와 ‘일견’ 보기

등록|2007.11.13 10:57 수정|2007.11.13 10:58
.. 이처럼 일견 당연한 일로 보이는 사실을 이들이 구태여 애써 지적해 둔 점이야말로 ..  <김윤식-우리 문학의 넓이와 깊이>(서래헌,1979) 17쪽

이제는 안 쓰는 말이라 할 수 있으나, 글쟁이들 손과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사람들 손과 입에서는 찾아볼 길이 없으나 글쟁이들은 끝끝내 안 놓을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손쉽게, 어디에서나 즐겁게 쓰면 좋은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을 일부러인지 몰라서인지 안 쓰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 일견(一見) : (주로 ‘일견’, ‘일견에’ 꼴로 쓰여) 한 번 봄. 언뜻 봄
 │   - 그는 일견 착한 듯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
 │     쌍둥이를 일견에 구별하기는 어렵다 /
 │     그가 이번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일견에 알 수 있었다
 │
 ├ 일견 당연해 보이는
 │→ 얼핏 보면 당연한
 │→ 가만히 보면 당연한
 │→ 한편으로는 당연한
 └ …


 ‘일견’ 말풀이를 보면, 이 낱말이 우리 말 “한 번 보다”를 한자로 옮겼을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우리 말로 하면 “한 번 보다”입니다. 이렇게 쓰면 그만입니다. 이런 말을 굳이 ‘한 낱말로 갈무리해 쓰려고 억지를 부리’니까 ‘일견’ 같은 말이 튀어나오고 맙니다.

국어사전에 나온 ‘일견’ 보기글은, “얼핏 착한 듯 보이지만(←일견 착한 듯 보이지만)”, “쌍둥이를 한눈에 가려내기는(←쌍둥이를 일견에 가려내기는)”, “바로 알 수 있었다(←일견에 알 수 있었다)”처럼 고쳐서 써야 알맞습니다.

우리 말은 우리 말 빛깔에 따라 살피면서 낱말책에 담아야 알맞습니다. 우리 말은 딱히 ‘한 낱말’로 그러모으지 않으면서도 널리 쓰이는 말입니다. “얼핏 보면-가만히 보면-지긋이 보면-어찌 보면-그러고 보면” 같은 말투가 모두 그래요. 이런 말은 ‘한 낱말’이 아니라 ‘관용구’이자 ‘상말’입니다.

그렇지만 나라안에서 나온 낱말책들은 하나같이 서양 말법과 말틀을 따라서 엮느라, 이런 상말(관용구)이 거의 다 빠졌습니다.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일견’ 같은 한자말만 쉴새없이 올려놓습니다. 그러면서 둘러대기를, ‘토박이말로 말하면 낱말이 모자라서 내 생각을 펼치기 어렵다’. ‘잦기(빈도)에 따라 낱말을 모아야겠는데, 우리 말은 잦기가 떨어진다’.

딱딱 어떤 낱말로 마무르는 우리 말 빛깔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움직씨와 그림씨는 많아도 이름씨가 적은 우리 말은, ‘말이 모자란’ 말이 아니라 ‘말이 다른’ 말입니다. 미국말 사전 엮듯이, 프랑스말 사전 엮듯이 한국말 사전을 엮으면 딱히 올릴 만한 낱말이 적어 보일 수 있습니다.

보기글(용례)을 모아서 잦기를 살필 때에도, ‘한 낱말’만 살필 뿐, 상말(관용구)은 하나도 살피지 않으니까, 또 굳이 한 낱말로 삼아서 안 쓰고 띄어서 쓰는 우리 말은 죄다 ‘보기글 잦기 찾기’에서 헤아리지 않으니까, 사전을 엮는다며 모으는 낱말은 우리 삶과 동떨어지고, 우리 말 문화를 가꿀 수 없습니다(‘신나다’라는 말도 지금 맞춤법에서는 ‘신 나다’로 써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잦기가 모자라서 국어사전 올림말이 되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신나다’라는 낱말을 올림말로 삼을 생각이 없었으니 띄어서 쓰라고 했고, 그러니까 보기글을 모을 때에도 ‘신 나다’밖에 없는데, 잦기를 모을 때 ‘신 나다’를 모으는 일이란 없으니, 잦기 숫자에서도 적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재미나다’는 국어사전에 실려 있으니 아리송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부대끼면서 입으로 하는 말을 모으는 국어사전이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나 책에 실린 낱말 가운데 살펴서 올림말로 싣는 국어사전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낱말책을 엮어야지요. 짧은 상말(관용구), 긴 상말(속담)을 넉넉히 채워 넣어야지요. 우리가 늘 주고받는 말에서, 우리들 입으로 두루 쓰는 말에서 올림말을 찾고 우리 말 문화를 가꿔야지요. 긴 상말만 모아도 2000쪽이 넘는 두툼한 낱말책 하나가 묶이는 판입니다(<우리 말 속담 대사전>을 보면).

그런데 이런 대목에 찬찬히 눈길을 두면서 알뜰히 살려서 쓰려는 글쟁이들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토박이말을 한자로 뒤집어씌웠을 뿐인 ‘일본 한자말’은 어디에서든 잘 찾아서 배우고 익혀서 쓰면서도, 우리 삶과 문화와 발자취를 담아내어 알뜰히 쓰는 상말만큼은 도무지 찾아보려 하지 않고 느끼려 하지 않고 쓰려고도 않습니다.

우리한테 남달리 있는 고유한 삶과 문화와 발자취는 차츰 힘을 잃고 사라집니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화를 안 배우기 때문입니다. 우리 발자취를 업신여기기 때문입니다.

 ┌ 이처럼 일견 당연한 일로 보이는
 │
 │→ 이처럼 참말 마땅한 일로 보이는
 │→ 이처럼 아주 마땅한 일로 보이는
 │→ 이처럼 틀림없고 마땅한 일로 보이는
 └ …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우리 말을 하면 좋습니다. 서양말을 흉내내어 우리 말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책들이 하나같이 일본 한자말과 일본 말투에 찌들고 물들어 있어도, 알맹이만 건지고 껍데기(얄궂은 낱말과 말투)는 덜어내면 좋습니다. 우리들이 익히고 우리들이 서로 즐겁게 나누는 문화요 생각이요 삶이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서로 즐겁게 나누자면 우리들 누구나 잘 알아듣고 받아들이며 곰삭일 수 있는 말과 글을 가려서 써야 알맞겠지요? 서양 문학을 좋아할 수 있고 중국 철학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 문학이든 중국 철학이든, 나라안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는 알맹이(중국 철학이나 서양 문학)를 말해야지, 껍데기(서양 말투나 낱말, 일본 말투나 낱말)를 앞세워 말해야 하나요.

“땡큐!”라 하면 깜찍해 보이고, “고마워!” 하면 시골스러운가요. “노!”라 하면 달라 보이고, “아니!” 하면 철없는가요. “긍정적으로 관찰”해야 철학이고, “좋게 보”면 개똥인가요. “정차할” 때까지 기다려야 문화시민이고 “차가 멈출(설)” 때까지 기다리면 바보인가요.

가만히 보면, 서양 명작동화나 명작소설은 ‘완역(완전 번역)’이니 뭐니 하며 온마음 다 바쳐서 꼼꼼히 내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네 옛문학과 현대문학은 제대로 된 판본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에, 애써 내려는 사람도 드물고, 애써 펴낸 책들은 따순 눈길 거의 못 받고 있습니다. 말이 말 대접 못 받는 세상에서 문화가 제 대접 받을 일이 없고, 우리 삶이 우리 삶이 아닌 지 오래인 세상에서 우리 말이 우리 말답기란 참으로 힘든 노릇인가 봅니다.
덧붙이는 글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에 놀러오시면, 우리 말과 글 이야기를 좀더 널리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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