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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바다는 잠들지 못한다

[소설 속 강원도 18] 이경자의 <천개의 아침>

등록|2007.11.13 17:06 수정|2007.11.13 18:14

▲ ⓒ 이룸

동해바다는 언제나 새로운 아침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밤의 바다를 가보면 더 명확해진다. 모든 생명이 멸절된 듯한 밤바다는 습관처럼 출렁이면서 이것은 보이는 가시세계에서의 눈속임일 뿐이며, 이 속에는 하루에도 천 개씩의 태양들이 빚어지고, 또 태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바다에서 태어나고 또 바다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바다의 본원적 숙명 같은 것을 공 굴리는 것처럼 뒤척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로 간다. 허무하거나, 힘들거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툭툭 일상을 털어버리고 바다 행 표지판에 몸을 싣는다. 바다는 또 이 모든 푸념과 원망과 절망을 묵묵하게 토닥여주고 위로해준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주인공인 정환도 나름의 상처를 안고 바다가 베풀어놓는 파도의 넓은 협곡으로 숨어들게 된다.

항구, 룸펜, 양귀비, 민주화운동, 밀수, 매음굴, 밀항, 기다림 혹은 미망…. 나열된 단어만으로는 얼핏 연관되기가 어려운 조합이다. 소설가 이경자는 이 소설을 쓰고 자신의 젊을 적 상처 혹은 부채에 대한 홀가분한 청산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한다. 무엇이 환갑의 나이를 맞는 페미니즘 문학의 거장에게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절절함을 안겨 주었을까.

소설은 납북 어부의 딸이라는 치명적 가족력을 지닌 여주인공 수영과 가난 때문에 저지른 한 번의 실수로 절망에 빠진 청년 정환의 짧고도 애절한 사랑 이야기이다. 세상의 거친 풍파를 혈혈단신으로 맞선 어머니의 의구에 찬 시선에도 수영은 첫 번의 대면만으로 어떤 동질감을 느끼게 된 정환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이점은 세상의 아웃사이더로 내치게 된 정환도 마찬가지여서 미칠 듯이 수영을 갈구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로 번민하다가 이내 불 같은 사랑에 빠져들고 만다.

▲ 말없이 파도치는 바다 ⓒ 최삼경


"당신께 예쁜 걸 사 줄 돈은 없지만 달빛을 엮어서 목걸이와 반지를 만들어 줄 순 있으리. 천 개의 언덕 위에 비친 아침을 보여 주고 입맞춤과 일곱 송이 수선화를 주리니…"라는 노랫말처럼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법이다. 온통 어두워져 세상의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에 사랑은 태양이 되고 아침이 되어주는 법이다. 사랑은 이렇게 미천한 처지를 강요하던 세상과 단숨에 화해하도록 해서 희망의 돛 폭이 팽팽하게 펼쳐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세상문물은 나날이 발전한다. 그렇지만 세상이 진화를 말한다면 실상은 그만큼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경쟁은 살벌한 창칼의 번쩍임만이 아니라 때때로 화사한 외양을 내세워 세련됨과 프로정신을 키우라고 북돋는다. 그래서 '강한 것이 아름답다'라는 광고 카피가 아무런 저항감 없이 익숙해지는 정도가 되면 오히려 진리니, 진실이라는 것이 불편해지는 금단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랑은 아마추어다. 첫사랑은 처음이어서 그렇고, 이어지는 두 번, 세 번의 사랑도 그것만으로 온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무언지 모를 설렘과 열정 때문에 무모하고 절박하게 달려들었던 첫사랑은 어정쩡하고 서툰 어떤 것으로 자신의 깊숙한 곳에 기억된다. 그렇게 박힌 첫사랑의 원형질은 내내 모든 사랑에 대해 간섭하기 일쑤이다. '잊었다'고 믿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실상은 재 속에 숨은 숯처럼 여전히 생글거리는 잉걸불로 타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덮인 재를 털어주면 그 불씨는 언제나 다시 황덕불로 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 밤에 본 동해바다 ⓒ 최삼경


왜 사랑의 추억은 깊게 패는 걸까. 그리고 또 왜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주인공 수영은 수십 년 만에 보내온 정환의 편지를 보고 데는 듯한 아픔과 설렘을 느낀다.

"글을 그림으로 이해하는 아이처럼, 혹은 눈이 나쁜 노인처럼, 들여다보고 읽어 보고 의미를 따져보고 느껴보고 심지어 종이의 앞뒤를 매만지고 쓰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마흔두 살의 수영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스물아홉 정환의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가 아닌 사랑은 또 얼마나 유치하고 측은한 것인가. 당사자들의 열정이 그토록 각별 하다손치더라도 국외자들이 보기에 오해 이상의 이해를 하기는 쉽지 않다.

이 점에서 사랑은 개인적이다. 그렇지만 이 막막한 지구상의 삶에서 사랑마저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면, 또 무슨 힘으로 끝까지 완주할 것인가. 사랑이 온통 비합리적이고 상처를 주기 쉬운 것이지만, 그때가 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었으므로 많은 이들은 그 기억을 보듬으며 조금씩 상실되어 가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사람들은 아물지 않는 상처를 핥으며 바다를 향한 길 위에 나서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 바닷가에 놓인 폐선 ⓒ 최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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