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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봉에 밀린 주봉정상이 찬밥 신세로군"

[전국 100대 명산을 찾아서 17] 보은 속리산

등록|2007.11.15 20:52 수정|2007.11.15 21:20

▲ 비로봉길의 바위협곡 ⓒ 이승철


“왜 문장대가 아니고 그쪽이지?”
법주사를 지나 좌우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오른편 골짜기로 방향을 잡자 일행 한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오른편 골짜기로 가는 길은 천황봉으로 가는 길이었다.

“속리산의 주봉은 천황봉이거든, 우리는 항상 정상을 목표로 삼았잖아?”
우리일행들이 전국 100대 명산을 목표로 등산을 시작했을 때 입산금지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목표는 당연히 주봉의 정상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럼, 문장대가 속리산의 주봉이 아니라는 말이야?”
전에도 몇 번인가 속리산을 올랐다는 일행 한 사람은 주봉이 문장대라고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일행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곳까지 올라온 대부분의 등산객들도 당연하다는 듯 문장대쪽 길을 택하여 왼편 길로 오르고 있었다.

지난 11월 13일(화) 충청도 지역 최고의 명산이라는 속리산을 찾은 날은 서울을 출발할 때부터 희뿌옇던 안개가 청주를 지날 때까지 걷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속리산 입구에 이르렀을 때는 안개가 걷히면서 날씨가 맑아지고 있었다.

“이건 나뭇잎들이 비처럼 떨어지는군.”
“정말 그러네. 그럼 이걸 낙엽비라고 해야 하나?”
“아니야. 살랑살랑 떨어지는 모습이 비가 아니라 눈발 같지 않아? 낙엽눈이 내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늦가을의 정취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 모양이다. 매표소를 지난 법주사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자 길 양편에 서있는 나무에서 눈발처럼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들이 모처럼 늦가을의 낭만에 푹 젖어들게 한다.

문장대에 밀려 대접받지 못하는 천황봉으로

법주사는 내려올 때 들르기로 하고 우선 등산길에 나섰다. 천황봉을 향해 오르는 길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 한적한 느낌이 좋다. 술을 즐기는 친구가 운전당번이어서 하산 후에는 마실 수 없는 아쉬움을 덜어내려고 인삼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나섰다.

▲ 호서제일가람,이라쓰여 있는 법주사 일주문 ⓒ 이승철


▲ 등산로에서 만난 공예품처럼 생긴 멋진 바위 ⓒ 이승철


“인삼 막걸리 파는 할머니가 그러는데 이쪽 길은 매우 험하다고 하던데.”
“어, 그럼 오늘 또 고생 좀 하게 생겼잖아?”
험한 바윗길을 싫어하는 일행이 지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아서 오르기에 별 무리가 없었다. 능선을 넘어서자 커다란 바위 밑으로 통과해야 하는 석문이 나타났다. 그 능선 옆에는 누군가 공예품처럼 만들어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바위들이 눈길을 끈다.

“저 봉우리가 천황봉 아닐까? 높고 웅장한 바위봉우리잖아?”
“정말 그러네, 웅장하고 멋진 바위봉우리가 아무래도 주봉인 천황봉 같은데.”
골짜기의 제법 넓은 개활지를 지나자 앞쪽에 높직한 바위 봉우리가 나타났다. 그런데 근처에 서있는 이정표를 살펴보니 이 봉우리는 너무 가까운 거리다. 조금 더 걸어가자 길이오른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 그 봉우리는 천황봉이 아니라 비로봉이었다. 그러나 곧 다다른 능선길을 걸어 천황봉까지 가는 길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수월했다. 능선길 왼편의 헬기장을 지나자 저만큼 정상이 보인다. 속리산의 주봉인 천황봉 정상은 웅장한 바위봉우리가 아니라 별로 크지 않은 너덜바위들로 이루어진 초라한 모습이었다.

정상의 넓지 않은 바위 위에는 “천황봉(天皇峯)해발 1058m” 라고 쓰여 있는 검은 색의 정상 표지석이 서있었다. 일행들은 정상 표지석 옆에서 한 사람씩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한 쪽 귀퉁이에 둘러앉아 간식을 들었다.

“길이 험하지 않아서 다행이구먼, 자, 막걸리 한잔씩 하자고.”
산 위에 올라 먹는 간식이야 항상 꿀맛이지만 밑에서 짊어지고 올라온 인삼막걸리까지 곁들이니 그 맛이 더욱 좋다고 모두들 좋아한다.

“자 저길 보라고, 저 뾰족한 봉우리가 월악산. 저쪽 편의 저 높은 봉우리는 희양산인 것 같구먼.”
간식을 먹은 후 일행 한 사람이 주변을 둘러보며 수수께끼를 풀듯 산 이름을 댄다. 그러나 희부연 하늘 빛 때문에 아스라하게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희미하기만 하다.

“그런데 저쪽의 바위봉우리들 중에서 문장대가 어느 것이지?”
“문장대? 글쎄. 오래전에 몇 번 올랐었는데 여기서는 어느 봉우리인지 알아보기가 어렵네.”
근처에서 간식을 먹고 있는 다른 등산객들에게 물었지만 그들도 모른다고 한다.

▲ 천황봉 정상표지석 ⓒ 이승철


▲ 비로봉 능선길의 바위모습 ⓒ 이승철


“저 맨 뒤에 탑 같은 것이 서있는 바위봉우리 보이시죠?  저 봉우리가 바로 문장댑니다.”
일행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던 다른 등산객이 문장대를 가르쳐 준다. 천황봉에서 바라보는 문장대 쪽 속리산의 모습은 정말 대단했다. 기암괴석과 암벽, 그리고 쑥쑥 솟아있는 바위봉우리들이 속세를 잊게 하는 웅장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이 속리산이 충청권에서는 최고의 명산이라는 말이 실감나는군.”
“그래서 대한 8경중의 하나라고 하잖아?”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천황봉이 속리산의 주봉인데 왜 이렇게 초라한 거야? 저쪽에 비하면 이 봉우리는 너무 쪽팔리는 모습이잖아?”

천황봉정상에서 바라보이는 비로봉과 신선대, 그리고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빼어난 경관을 바라보며 누군가 천황봉을 탓한다.

“주봉이 제2봉에게 밀려 찬밥신세가 된 이유를 알 것 같구먼.”
정말 천황봉은 속리산의 주봉인데도 불구하고 찾는 등산객들이 많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일행들이 간식을 먹는 동안에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불과 10여명이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다시 문장대쪽으로 가는 길에서도 천황봉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충청권 최고의 비경에 푹 빠지다

“자! 가자고, 저 멋진 비로봉을 넘어 문장대 쪽으로.”
우리들은 다시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다가 능선을 타고 비로봉과 신선대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능선 곳곳에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절벽들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길은 험하지 않았다. 그 바위들과 절벽사이로 뚫린 길은 의외로 평탄했기 때문이다.

속리산은 신라 선덕여왕 때 진표대사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진표를 따라 입산했다하여 속리(俗離)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그러나 봉우리가 9개로 이루어진 산이라 하여 구봉산, 그리고 광명산, 미지산, 형제산 소금강산 등 몇 개의 다른 이름도 갖고 있는 산이다.

그런 산 이름 외에도, 구름 속에 솟아 있다고 하여 운장대라고도 불렸던 문장대를 비롯하여 입석대, 신선대, 경업대, 봉황대, 산호대, 등 8대와 8석문이 있고 깊은 계곡과 폭포가 많은 산으로도 유명하다.

“아니 그런데 입석대는 어느 것이고 비로봉은 또 어느 봉우리야?”
일행들이 불평을 한다. 능선을 타고 걸으며 몇 개의 봉우리와 멋진 바위 절벽을 지나왔지만 어느 곳에서도 봉우리 이름이나 대 이름을 써놓은 안내판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산 입구에 세워놓은 등산안내지도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 키를 넘기는 산죽사이로 뚫린 등산로 ⓒ 이승철


 

▲ 세심정의 돌절구통 ⓒ 이승철



“이 산 정말 대단한 비경이야. 멋진 경치는 골고루 다 갖추고 있잖아?”
앞서 걷던 일행이 길쭉한 직사각형의 바위가 더 큰 바위 위에 서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다. 주변에 보이는 바위들은 하나같이 우람하고 빼어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산죽들도 대단하잖아? 등산로에 이렇게 키를 넘기는 산죽들이 빼곡하게 자란 산은 이곳이 처음인 것 같은데.”
우리들은 정말 우리들의 키를 넘기는 푸른 산죽 사이로 난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런 산죽은 곳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능선에서 퍼져나간 완만한 경사지는 어김없이 산죽 밭을 이루고 있었다.

상당히 높은 산이어서 능선길의 활엽수들은 모두 잎이 지고 앙상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푸른 산죽과 하얀 바위가 어우러진 모습도 여간 멋진 풍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개의 봉우리와 대를 지나쳤다.

지친 일행을 따라 종주산행을 포기하고 하산 길에서 당할 뻔했던 사고

“이제 그만 내려가지, 난 이제 더 이상 못 걷겠어.”
세 갈래 길이었다. 왼편으로는 내리막 하산길이었고 앞쪽으로는 문장대로 이어지는 능선길이었다. 그 세 갈래 길에서 일행 한 사람이 그만 하산하자고 나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문장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 걷자고 했지만 도저히 더는 못 걷겠다는 일행을 어쩔 수 없었다. 우리들은 항상 제일 약한 사람의 수준에 맞춰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내려가자는 일행을 따라 조금 내려오니 이정표가 나타났다. 위치는 신선대에서 경업대를 거쳐 내려가는 길이었다. 길은 굉장히 가파른 돌계단 길이었다. 내리막길이어서 힘은 들지 않았지만 무릎에 상당한 충격이 느껴진다.

경업대도 특별한 표시는 되어 있지 않았다. 내리막길은 바위와 돌계단길이어서 조심조심 내려가는 것이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천황봉으로 올라갈 때와는 달리 내려가는 길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법주사에서 문장대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는 사람들과 상주쪽에서 문장대를 거쳐 오는 등산객들이었다.

▲ 당간지주, 희견보살상, 여래상, 석주 ⓒ 이승철



▲ 팔상전,쌍사자석등, 석련지, 범종각 ⓒ 이승철


“어, 어, 어 앗!”
그렇게 내려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일행 중 앞서 내려가던 사람이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것이 아닌가. 뒤따르던 일행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곳은 넘어지면 정말 큰일 날 곳이었다. 약간 경사진 길에 바닥과 주변은 모두 너덜바위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쿠! 큰일 날 뻔 했네.”
천만 다행이었다. 앞으로 고꾸라지던 그가 마침 길가에 서 있던 제법 커다란 나무에 부딪치면서 그 나무를 껴안은 것이다. 그는 나무를 껴안으면서 이마와 손에 약간의 통증을 느끼는 듯했지만 곧 괜찮은 듯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조심해. 애 떨어질 뻔 했잖아!”
그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다른 일행이 놀란 가슴을 진정하려는 듯 실없는 농담을 던진다. 내리막길, 그것도 바윗길은 정말 위험하다, 잘 못 넘어지기라도 하면 중상을 당할 염려가 크기 때문이다.

“나도 순간적으로 이제 죽었구나 했지 뭐야. 저 나무가 나를 살렸지만 말이야.”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큰 사고를 당할 뻔해서인지 그 뒤로는 아무도 별 이상 없이 법주사까지 곧장 내려왔다.

법주사로 내려가는 중간 지점의 세심정에 이르자 길가에 있는 두 개의 돌 절구통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는 모습이다. 이 돌절구통은 13~14세기경에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절구통으로 사용했는데, 당시 이 산에 은거한 학자와 승려들에게 제공하는 음식을 만드는데 이용되었다고 한다.

천년 고찰 법주사의 국보와 보물들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가에서 가끔씩 마주치는 단풍이 올라갈 때보다 한결 더 고와 보인다. 등산을 마친 여유로움 때문이리라. 천년 고찰 법주사는 조용한 모습으로 짧은 늦가을의 석양빛을 받아 안고 있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일행 한 명은 재빨리 법당으로 향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등산에서 지친 몸을 풀었다. 금강문을 들어서자 왼편으로 높직하게 서있는 당간지주와 거대한 금빛 불상이 성큼 다가온다.

그 사이에는 국보64호인 석련지가 작은 누각 속에 세워져 있고, 거대한 불상 앞 쪽에는 국보 55호인 팔상전이 예스러운 모습이다. 국보 5호인 쌍사자 석등도 근처에 있었다. 그 외에도 보물 165호인 사천왕석등이 있고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산 밑의 바위에는 보물 216호인 마애여래의상이 새겨져 있었다. 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으며 법주사의 3000명 승도가 이용했다는 직사각형 형태의 돌 물통도 아주 특별한 모습이었다.

▲ 법주사에서 세심정으로 가는 길과 단풍 풍경 ⓒ 이승철


법주사는 지금도 대사찰이지만 경내가 아주 넓고 평탄한 모습이 옛날에는 현재보다 훨씬 많은 전각들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우리들이 경내를 구경하고 돌아서자 법당에 들어갔던 일행이 곧 뒤를 따라 나온다.

“어휴 배고파! 빨리 밥 먹으러 가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어느 듯 오후 4시 30분이다. 산행을 시작한 지 7시간이 지나있었다. 모두들 상당히 지쳐 있었지만 만족한 표정들이다.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으로 먹은 전통두부보쌈과 몇 잔씩의 술이 일행들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내렸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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