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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할 이유를 잃으면 선택은 오직 하나"

추리무협소설 <천지> 313회

등록|2007.11.21 08:13 수정|2007.11.21 08:27
순간 운중은 아주 통쾌한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핫핫. 돼지라…. 아주 재미있는 말이군. 노부는 너무 재미있어 배꼽이 빠질 지경이라네. 괜찮아. 자네는 이곳에서 자네 마음대로 떠들고 행동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지.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

“잠시만 참아주게. 노부 역시 또 한 마리의 돼지를 도살할 참이거든. 자네와는 같이 푸줏간을 차려도 좋을 것 같네.”

또 한 마리의 돼지라면 분명히 상만천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만천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달아오르며 붉으락푸르락했다.

“흐흐. 이젠 아예 난장판을 만들려는군. 본색을 드러내는 것인가?”

그때였다. 또 다시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돈이라면 게걸스럽게 배가 터져도 더 처먹으려 하던 네놈에게 돼지라는 표현도 과분하지. 더구나 이제는 권력이란 것까지도 먹어치우려는 네놈 아닌가?”

바로 설중행이었다. 그의 얼굴은 아직 약간은 창백한 기운이 감돌고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듯 보였다. 그는 보주에게 포권을 취하고 말했다.

“장인 어른께서는 더러운 돼지 피를 직접 손에 묻히지 말고 제게 맡기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장인어른?”

그 말을 잠시 뇌까리던 운중이 다시 대소를 터트렸다. 그는 우슬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다시 설중행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우슬의 볼이 어느덧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하핫핫. 듣기가 좋은데. 어색할 줄만 알았는데. 하지만 자네도 참게.”

“?”

운중은 대답을 하기 전에 제자들을 쭉 둘러보았다.

“노부는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좋은 사부가 아니었어. 가르침다운 가르침을 준 적이 없었지. 화두를 던지고 심득을 주려고 했지만 한번도 시연하며 가르쳐 본 적이 없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사부로서의 의무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네.”

직접 손을 쓰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 움츠리고 있었던 자신을 이제 깨고 새장에서 벗어난 새처럼 다시 세상에 나서겠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간혹 위대한 사람이나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도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운중은 그것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너희들은 이제 저쪽으로 가서 운기 하도록 해라. 너희들이 운기를 마칠 때까지 사부는 기다릴 참이다.”

사부는 어버이와 같다. 사실 무엇을 바라고 제자를 키우는 것은 아니다. 부모나 사부는 제자가 어찌 행동하든지 그저 주는 존재인 것이다. 운중은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직접 시연해 보임으로써 마지막 선물까지 주려고 하는 것이다.

“사부님!”

제자들이 각기 다른 복잡한 시선으로 사부를 올려다보았다. 관계야 어찌되었든, 그리고 사부를 배반했든 아니든 제자로서 사부에 대한 뭉클한 정이 솟아오름은 어쩔 수 없다. 사부의 그윽하고 인자한 미소를 받아보는 것도 정말 오래된 일인 것 같았다.

제자들은 고개를 끄떡이며 어서 운기를 하라는 사부의 재촉에 한족 귀퉁이에 모여 앉아 가부좌를 틀며 앉았다.

“그 정도의 시간은 참을 수 있겠지?”

운중이 상만천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상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성곤께서 나설 차례이구려.”

상만천은 아직까지도 겉으로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아마 운중이 나설 때이면 성곤이 맡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나설 수 없는 지경이라네. 무형독이 오장육부 깊숙이 중독된 사람이 나서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아니 멀쩡하다고 해도 나는 절대 운중을 이길 수 없네.”

말과 함께 성곤은 자신의 손에 들린 여러 개의 주머니를 양손 안에 놓고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머니뿐 아니라 그 안에 든 단약들까지 가루로 변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슨 말씀이오? 약속을 어기겠다는 것이오?”

상만천이 뒤를 돌아다보며 소리쳤지만 상만천은 이미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성곤의 이마에 맺혀있는 땀과 붉으레하게 변한 그의 안색을 보는 순간 무형독에 중독되었음을 알아본 것이다.

“왜?”

해약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분명 해약을 복용한 것 같다. 그런데도 무형독에 중독된 것일까? 더구나 해약이 든 주머니를 아예 없애버리기까지 하는 것일까?

“나는 해약을 복용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운중처럼 해독할 생각도 하지 않았지. 나는 내가 원하는 상황이 오지 않는다면 자네의 척추 뼈를 갈라놓을 정도의 힘만 남겨놓은 상황이었다네. 하지만 다행이야. 그럼 다행이고말고….”

그러고는 시선을 운중에게로 돌렸다.

“미안하이. 내 어찌 자네에게 다시 죄를 지을 수 있겠나? 나는 자네가 나서주기를 바랐네. 철담 역시 나에게 신신당부했네. 자네가 나서지 않는다면 모든 은원을 매듭지을 수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네가 직접 나서게 만들라고 부탁했다네.”

“자네…”

“좌총관을 그렇게 만들어 놓아 정말 미안하네. 허나 창월에게는 죄가 없다네. 내가 모두 시킨 일이지. 나를 용서할 필요는 없지만 창월만큼은 용서해 주게. 창월은 그래도 자네가 믿었던 여덟 명 중의 하나였고 자네를 위해 많은 것을 했다네. 물론 자네가 원치 않은 일을 내가 시켜 어쩔 수 없이 하기도 했지만….”

“어르신!”

창월이 안타깝게 부르자 성곤이 손을 저었다.

“나는 저 아이에게 내 모든 것을 주었네. 그리고 저 아이는 언제나 내 이상으로 자네를 존경했네. 비록 사제의 연은 정식으로 맺지 않았지만 나는 저 아이를 유일한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네. 용서해 주겠는가?”

운중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라 지워지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과 등을 돌리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을 끝까지 저 친구는 자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네는 정말 고약하고도 멍청한 친구로군.”

“철담이 죽고 혈간이 죽었네. 그리고 내 손으로 중의마저도 평생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폐인으로 만들어 놓았지.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창월 뿐 아니라 자네마저도 용서한다네. 아니 애초부터 용서할 일도 없어. 다만 자네는 왜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나?”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인간이 선택할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네. 나는 지금껏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지만 그만큼 고통도 컸다네. 또한 앞으로 더 산다 해도 그리 신날 일도 없을 것 같으이….”

성곤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그러고는 창월에게 다가가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상만천의 얼굴에 여유가 가시며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백도가 잡고 있는 용추를 잠시 보다가 다시 운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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