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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숙에서 밤을 보낸 남녀는 어디로 갔을까

[춘양 기행①] 첫눈 내린 날 춘양에서 떠올린 옛 추억

등록|2007.11.22 13:50 수정|2007.11.22 14:39

장독대첫눈이다. 장독에 눈이 소복히 내려앉았다. ⓒ 강기희


눈이 내렸다. 밤새 내린 도둑눈이었다. 눈은 모든 이들이 잠에 빠진 시간에 내렸다. 그럼에도 아침에 일어나 "와, 눈이야!" 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은 추위 탓이었다. 이틀 연속 내린 눈은 10센티미터. 첫눈이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 지방에 첫눈이 내린다는 예보는 사실이었다.

춘양으로 가는 길은 '긴장의 연속'

오늘(21일) 아침도 세상은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추악한 세상을, 오욕으로 가득 찬 세상을 하늘도 알았던가. 세상의 더러움을 감추기 위함이었는지 하늘은 많은 눈을 뿌렸다. 그런다고 거짓의 세상이 참된 세상으로 변할까. 불행의 늪이 행복의 정원으로 변할까.

어제 아침 춘양으로 가는 차가 있어 낼름 그 차를 잡아탔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은 춘양목으로 알려진 고장이다. 춘양에서 벌목된 소나무가 춘양역을 통해 서울로 갔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춘양목은 금강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울진, 봉화, 청송, 영덕 등지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금강송 또는 적송이라고도 한다.

소나무가 많은 곳은 자연스럽게 송이도 많이 난다. 춘양은 송이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어슬렁거리며 뒷산을 오르면 이마에 땀도 차기 전에 한 아름의 송이를 딴다는 곳이 춘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 진한 송이향은 다시 소나무 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선에서 춘양으로 가는 여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정선의 쇄재를 비롯해 마차재, 수라리재, 조재, 도래기재 등 넘어야 할 고개가 몇 개나 되었다. 반드시 춘양으로 가야 할 차량이었기에 눈이 쌓여 있는 고개라고 하여 물러설 수 없었다.

영월 석항에서 녹전으로 가는 고개인 수라리재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1392년 폐위된 후 삼척으로 유배되어 가던 중, 고개에서 수라(왕이 드는 음식)를  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왕이 걸어 넘었을 고개를 편케 차량으로 넘지만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고갯길은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 길영월에서 봉화로 가는 조재. 세상엔 한 번에 오르지 못할 곳도 있었다. ⓒ 강기희


중국음식점 주방자취생이 사용하는 어설픈 주방처럼 보이지만 이곳에서 기가막힌 맛이 나온다. ⓒ 강기희


굽이진 고개는 해발 600m라는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인근의 만항재(1330m)보다도 높아 보였다. 아득하게 펼쳐진 산 아래 마을을 보며 공양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왕이 지녔을 그 시절의 상심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영월 하동면에서 봉화로 넘어가는 조재를 넘을 땐 눈길에 몇 번이나 미끄러져 급히 모래를 뿌린 다음에야 간신히 고개를 넘었다. 눈만 없었다면 주변의 경치에 빠졌을 길. 하지만 언제 미끄러질지 모르는 길을 향해 아득한 고개를 넘고 또 넘어야 했다.

백두대간의 한 축인 도래기재를 넘으니 비로소 춘양 땅이 나타났다. 경계란 것이 그렇던가. 춘양으로 들어서자 산세들이 급격하게 완만해졌다. 하늘로만 향하던 산들이 춘양에 이르러서 더러는 앉기도 하더니 간혹 넓은 터를 찾아 눕기도 했다.

춘양에서 소문난 중국음식점 '대성루'에서 맛본 '쟁반 자장'

길을 따라 20여리를 가니 춘양면이 나왔다. 춘양 거리는 장날(4일, 9일)이 아닌지라 인적이 드물었다. 인근에서는 제법 큰 장을 이루는 춘양장은 약초와 인삼, 사과, 송이 등이 주로 거래된단다. 그래서인지 춘양의 외곽지역은 인삼밭과 사과밭으로 펼쳐져 있었다.

춘양에 도착하자 점심때가 지나고 있었다. 아침식사도 거른 탓에 허기가 몰려왔다.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자 함께 간 일행은 춘양에서 유명하다는 중국음식점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미 그 집의 맛을 알고 있었던 듯 우리가 먹을 '쟁반 자장'을 입에 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춘양 시내를 지난 차량은 '대성루' 앞에 멈췄다. 한눈에도 중국음식점은 허름해 보였다. 음식 맛이라는 것이 외양만 번듯하다고 보장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선뜻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실내와 두 개의 방이 보였다.

손님들이 앉을 수 있는 탁자는 모두 6개. 소박한 음식점이었다. 방엔 두 패의 손님이 점심을 겸한 술자리를 하고 있었다. 실내에 있는 난로는 서둘러 피웠던지 아직 열기를 내지 못했다. 우리는 쟁반자장을 주문했고, 배가 고프니 많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하나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방엔 춘양 사람인 듯 두 사람이 짬뽕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디에 사느냐 물으니, 참새골에 산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행 중 참새골을 가본 적 있는 이가 의자를 돌려 앉으며 대화에 나섰다. 참새골에 대한 말들이 오갔다. 땅값이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한 편이라는 말도 나왔고, 사람이 살기 좋다는 말도 나왔다.

오지라고 소문난 봉화. 봉화에서도 춘양은 다른 동네에 비해 산골로 더 숨어든 마을이었다. 그런 탓에 몇 해 전부터 외부인들의 유입이 꾸준하게 늘고 있다고 했다.

춘양사람들춘양에서 태어나 춘양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이 집은 짬뽕도 맛있다고. ⓒ 강기희



넘치도록 담아 온 쟁반 자장,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러나 쟁반 자장의 접시가 작았던 걸까. 주인이 들고 나온 쟁반 자장은 큰 접시에 가득 담겨 나왔다. 얼마나 많이 담았든지 자장 소스가 사방으로 줄줄 흘렀다.

"정이 줄줄 넘치는 걸요?"
"하도 배가 고프다고 하시기에 많이 담았네예. 죄송합니더."

많이 담은 것을 가지고 죄송까지야. 배고프다고 너스레 떤 것이 오히려 미안했다. 경상도 소주인 '참'소주 맛이 궁금해서 해장 겸 반주 겸하여 술을 주문했다. 짜릿하게 넘어가는 술 맛은 역시 허름한 집이 최고였다. 더구나 하루 여정이지만 겨울여행으로 나선 길이었다.

쟁반 자장을 안주로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처음에 많다 싶었던 음식도 나중엔 안주로 쓰기 위해 아껴먹어야 할 정도로 맛이 기가 막혔다. 자장을 그렇게 맛있게 먹어 본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최근 몇 년 사이엔 그런 기억이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이 얼굴을 쳤다. 일행은 볼일을 보러 갔고, 따라갔던 나는 홀로 춘양 거리를 걸었다. 춘양은 처음 와본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거리는 낯설었고, 주변의 풍경 또한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춘양역에서 만난 미소가 아름다운 여자

춘양역으로 갔다. 영동선이 지나가는 춘양역. 영주에서 출발한 기차는 동해를 달려 강릉까지 간다. 춘양역으로 걸으면서 거리가 많이 본 듯했다. 처음엔 다른 지역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춘양역에 이르러서는 언젠가 와 본 곳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을 길에 세워둔 작은 간판도 눈에 익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말끔하게 단장한 춘양역엔 손님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춘양역만남과 이별이 있는 춘양역 플랫폼. 사람들은 이곳에서 영주로 혹은 강릉으로 흘러간다. ⓒ 강기희



역무원춘양역에 근무하는 역무원 김연화씨. 사진을 찍겠다니 대걸레를 놓고 활짝 웃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미소가 아름다운 여자였다. 춘양역을 이용하는 이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미소. ⓒ 강기희


대신 역무원이 걸레로 바닥을 훔치고 있었다. 시골 역에 근무하는 역무원이라고 하면 보통 남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청소를 하던 역무원은 근무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었다. 의외라는 생각에 말을 붙였다.

"시골 역에 여성도 있나 봐요?"
"그럼예."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가슴팍엔 '김연화'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은 얼마나 되나요?"
"하루 30여명 될까 하네예."
"승객들은 주로 어디로 가나요?"
"가끔 강릉으로 가는 분도 계시지만 대개는 영주로 가예."

춘양에서 영주까지는 40여 분 걸린다고 한다. 그녀도 영주에서 춘양으로 출퇴근을 한단다. 춘양역 한 켠에 예전 춘양역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사진을 본 나는 그제야 아, 하고 짧은 신음을 토했다.

"이제 기억이 나네요. 저 오래 전 이곳에 왔었어요."

다시 청소를 하려던 김연화씨를 향해 말했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그래예?" 했다.

"10여 전인데 많이 변했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플랫폼으로 나갔다. 플랫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겨울이거나 봄으로 가는 길목이었을 것이었다. 그 시절 어쩌다 춘양을 지나갔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역전여인숙에 머물던 남녀는 지금도 죽도록 사랑하고 있을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춘양역을 나왔다. 역 앞에 있는 '역전여인숙'은 그 시절에 들렀던 집이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춘양에서의 시간, 나는 역전여인숙에서 짧은 밤을 보냈다. 그 시절 여인숙 방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날 밤 나는 잠을 쉬 이루지 못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것은 어느 방에선가 들려오던 남녀의 교성과 다툼소리. 나보다 두어 시간 늦게 여인숙에 든 그들은 밤새도록 싸우다 사랑하다, 사랑하다 싸우다 했다.

한 번의 사랑이 끝나고 그들은 또 싸웠다. 술병 깨지는 소리가 났고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울음소리. 나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참으로 서글프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고, 그렇게 아침을 맞았다.

따듯한 물이 없어 세수도 하지 못하고 빠져나왔던 집.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여인숙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날 밤, 서로 욕설을 섞으며 싸우다, 뜨겁게 사랑하던 남녀는 지금도 그러할까.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그들의 지독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 낡은 여인숙 간판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인 일인지. 그날 밤에 엿들었던 그들의 사랑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다.

여인숙춘양역 앞에 있는 역전여인숙. 기차 역이 있는 마을이면 어느 곳에 가도 있을 법한 간판이다. 이곳에 남아있던 추억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 강기희

덧붙이는 글 춘양 기행은 다음 편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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