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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의 싹수가 노란 것을 어떻게 알까?

그 아이의 눈물, 혹은 눈물의 삼중주

등록|2007.11.25 18:44 수정|2007.11.25 18:44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다. 눈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착하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가끔은 내가 진실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울기도 하니까 말이다.

학교에서 아이들 문제로 마음이 상해서 울 때도 많다. 그때만큼 막막하고 억울하고 슬픈 적도 드물지만, 가끔 내 자신이 싫어지거나 더럽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을 때 나를 구원하는 것은 아이들 때문에 울었던 기억들이다.

돌이켜 보면, 내 마음에 고통을 느끼거나 슬퍼 있었을 때만큼은 죄악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먼 일가처럼 가끔씩 찾아오는 아픔이나 슬픔을 박대할 일만은 아니다.

더욱이 나는 타고난 성정이 명랑 쾌활하여 웬만큼 슬퍼도 마음의 병으로 도지는 일은 없으니 안심하고 슬픔에 푹 젖어 있어 볼 일이다. 슬픔이 다녀간 뒤 내 마음에 새파란 싹처럼 돋아나는 것들과 마주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내놓고 보면
고통만한 청량제도 없다


구석구석 밟히고서야
서늘한 길이 생긴다고


생명을 준 것은
깊고 어두운 땅 속이었다고


흙밭, 막 머리를 내민
새파란 것들이 내게 말한다.  -자작시 ‘싹’

    
흔히 자라나는 아이들을 ‘싹’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싹수가 노랗다’라는 말이 있다. ‘싹수  없는 녀석’이란 말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싹’에 관한 비유는 대개가 이렇듯 부정적이다. 학교에서도 “싹수가 노란 놈들은 모가지부터 잘라버려야 해!”라는 극단적인 언어 표현을 종종 듣는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아이가 싹수가 노란 것을 어떻게 알지요?”

시비를 걸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정말 궁금한 것이다. 아이의 머리 부분에 노란 싹이 돋아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말 그런 것을 잘 아는 비상한 능력이 있다면 그는 상담전문가가 되면 좋으리라. 암도 초기에 발견하면 치료가 가능한 세상이 아닌가. 아이의 인격적인 결함을 미리 알아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준다면 아이를 위해서나 학교를 위해서나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유감스럽게도 아이의 노란 싹수를 식별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내 앞에 있는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할 때도 많다. 물론 그것은 내 능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숙함’이 아이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미숙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싹수가 노랗기 때문인지 평범한 눈을 가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골고루 물을 줄 수밖에 없다.

지난주에 두 아이가 학교를 떠났다. 이른바 ‘사고’를 쳐서 전학을 전제로 한 퇴학처분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나는 두 아이의 담임 자격으로 그들의 잘못을 가리고 벌을 내리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 학생부장 선생님이 두 아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6하 원칙에 의거하여 낱낱이 이야기할 때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한 아이의 모친께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사실은 나도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던 터였다. 아이를 바로 잡아주지 못한 책임감과 함께 이제 막 양심의 눈이 떠진 아이의 손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팠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의 모친처럼 드러내놓고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이를 악물고 울음을 삼킨 채 허공으로 눈을 돌리다가 한 순간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도 속울음을 우는지 눈이 젖어 있었다. 눈물의 삼중주라고나 할까?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만약 퇴학처분이 내려진다면 아이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전날 나는 그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만약 학교에서 널 퇴학시키면 네 마음에 학교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이 있을 것 같니?”
“조금은 요.”

“그래? 그럼 네가 괴롭혔던 아이들에 대해서는? 그들 중에서 네 이름을 댄 아이들을 찾아내서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니?”

“그런 마음은 없어요. 그땐 몰라서 그랬지만 지금은 제가 잘못한 거 알고 있어요.”
“그래. 그래야지. 근데 네가 잘못한 것을 깨달은 게 언제부터야?”

“선생님이 저 때문에 우셨잖아요. 그때부터….”

“그래. 고맙구나. 한 가지만 부탁하마. 난 널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하지만 잘 안 되어도 학교를 원망하면 안 돼. 네가 잘못한 거니까. 그리고 이제 잘못을 깨달았으니까 된 거고.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선생님.”

그런 대화가 오고가긴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난 아직 아이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그가 인격적으로 미숙한 아이인지, 아니면 이미 싹수가 노란 아이인지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겐 없으니까. 나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 아이에 대한 눈이 제대로 떠졌다. 그날 저녁 아이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급우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으니 하루만 더 학교를 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이는 급우들에게 울먹이며 진심어린 사과를 했고, 슬픔이 복받치는 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는 동안 나 또한 아이들 몰래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바로 그때, 교실 어느 쪽에선가 손이 눈가로 가는 아이가 보였다. 가만 보니 그 아이 말고도 눈알이 벌게진 아이가 서너 명이 더 있었다. 그들 모두 평상시 행동이 썩 좋은 아이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싹수가 노란 아이들도 결코 아니었다.

다행히도, 학교를 떠난 두 아이는 학부모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새 학교가 정해져서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두 아이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기도해야겠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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