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마음 무거운 일 있어도 좋은 동행이 있어 그 무거움마저도 잊는다. 그와 걷는 길은 심한 갈증이 날 때 만난 시원한 한 모금의 물맛 같다. 마음이 나뉜 동행은 마음도 몸도 발걸음도 무겁기 마련이다. 좋은 풍경은 빛을 잃고 등에 진 가벼운 짐조차 천근만근 무겁다. 지척도 멀디 먼 천리 길이다.
▲ 마음 맞는 벗 있어 동행이 즐겁지 아니한가. 억새풀이 은빛으로 출렁이며 파도치는 능선길을 걷는다. 이 세상에 완전한 동행이 어디 있으랴. 부족한 모습 그대로 함께 걷는 길이기에 따뜻하다. ⓒ 이명화
하는 수없이 차를 타고 다시 가까운 시내로 내려가야 한다. 건전지를 사고 처음 출발했던 범어사 가는 일방통행로로 빙 둘러 다시 손씨집 앞에 차를 세우고 등산로 앞에 섰다. 함께 한 사람이 나를 배려해주지 않았다면 사진 없는 산행이 되었을 것이다. 조금 귀찮긴 했겠지만 덕분에 오늘 사진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배려가 있어 동행이 즐겁다.
▲ 멀리서 바라본 금정산 고당봉 ⓒ 이명화
나무들은 옷을 벗고 산길은 마른 낙엽들로 덮여 있다.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따라 우리는 4망루쪽을 택했다. 4망루 600m 지점에서 옹달샘 같은 약수터를 만났다. 얼마나 더 올라갔을까. 또 다른 약수터가 나타났다. 부산의 가장 큰 산 금정산은 그 넉넉한 산새와 더불어 곳곳마다 약수터가 있어 목마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 금정산 억새능선산성로를 따라 걷는 길. 억새풀이 군락을 이루고 은빛 파도로 출렁이고 있다. ⓒ 이명화
▲ 지금 함께 걷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 이명화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가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내가 나무 곁에 서 있네/산과 나무들과 내가/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내가 산을 내려 왔네/그들은 주인 자리에/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
▲ 제4망루의상봉에서 바라본 4망루. '쨍'하고 금이라도 갈 듯한 푸른 하늘 아래 아름다운 동행이 있어 좋은 날 ⓒ 이명화
▲ 의상봉에서 바라 본 부산 시내 ⓒ 이명화
▲ 의상봉에서의상봉에서 내려다 보는 산성로. 이 길을 당신은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가. ⓒ 이명화
미륵사에 도착하자 1시 정각이었다. 미륵사 뒤에 버티고 있는 넓고 큰 바위 위로 하늘에는 한 조각구름이 지나가고 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금정산 산성마을, 위쪽 길로 가면 금정산 고당봉 가는 길이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저 아랫길로 내려가고 있었다.
▲ 아이들이 의상봉에서 놀고 있다. 참 사랑스러운 동행이다. ⓒ 이명화
▲ 의상봉에서 내다 본 무명바위. ⓒ 이명화
▲ ⓒ 이명화
우리는 고당봉으로 간다. 넓은 바위 위에 자리를 깔고 앉아 빼놓을 수 없는 산행의 또 다른 기쁨인 점심을 맛있게 먹고 다시 출발, 이제 또 다시 길 위에 선다. 호젓한 길을 따라 걷노라니 이따금 길 주변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참 좋은 길동무들인 것 같다. 서너명의 중년 남자들이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술병을 놓고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적어도 몇 년은 함께 해 온 산행 친구들인 듯 보인다. 함께 있음이 아주 자연스럽다.
부부인 듯한 중년 남녀가 과일을 깎아 먹으며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이따금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서 한 호흡을 읽는다. 서로 마음을 안다는 것, 내가 그를, 그가 나를 읽는다는 것, 한 호흡으로 벗하며 동행한다는 것...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 아름다운 동행이다.
▲ 금정산 주봉 고당봉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들 ⓒ 이명화
이곳까지 올라오기까지 사람들은 저 아래 사람 사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다가 왔을까. 인생의 어느 길에서 만난 사람들일까. 오는 길, 길마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며 온 것일까. 오늘, 지금 함께 동행한 이 사람과 거미줄처럼 사방팔방으로 나 있는 이 산을 어떤 길로 해서 갈 것인지 함께 결정하며 올라왔을 것이다. 마음을 맞추고, 걸음을 맞추고, 호흡을 함께 하면서 말이다. 그 마음 다 알려면 잠시 겪어보고 어찌 알까.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한 동행이 있으랴.
▲ 엄마와 아이, 참 예쁘다. ⓒ 이명화
이 높은 산 바위꼭대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 옆에서 아이 엄마는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다. 마음이 좀 급해졌을까. 아이 엄마는 아이에게 조용히 말한다. "얼른 그림 그리고 내려가자." 참, 예쁜 동행이다.
아이는 엄마가 곁에 있기에 높은 산 바위 꼭대기에서도 안심하고 그림을 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리라.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 세상에서의 삶을 다할 때까지 누군가와 동행하며 살아간다. 높은 고당봉 아래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조차도 혼자 날지 않고 둘이서 함께 날고 있다. 같은 방향, 같은 동작, 같은 호흡으로 하나 되어 날고 있는 것이 보인다.
▲ 금샘 가는 길을 잘 안내한 이정표 ⓒ 이명화
▲ 높은 화강암을 타고 금샘 가는 길.이 또한 동행이 있어 즐겁지 아니한가. ⓒ 이명화
금정산은 동서남북으로 길이 나 있으며 마치 거미줄처럼 산행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 어디로 해서 가든지 고당봉으로 가고 길에서 길로 이어져 길은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이 많은 길들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해서 오느냐에 따라 그 표정이 사뭇 다르다.
사람의 얼굴을 앞에서 바라볼 때와 옆에서 볼 때 그리고 뒤에서 보는 것이 다른 표정이듯이 산 또한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것이다' 생각해오던 것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산은 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에 따라 또 얼마나 많은 표정을 연출하는가.
▲ 금샘에는 물이 거의 말라 있었다. 금샘에 고인 물 위에 손바닥만한 하늘이 내려앉고. ⓒ 이명화
그래, 가보지 않고서는 그 길을 다 알 수 없다. 산은 언제나 새로운 표정으로 우리를 반기고, 실망시키지 않는다. 익히 아는 산과 길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가지 않은 길을 따라 걸으며 새로운 금정산의 표정을 읽는 발견의 기쁨이 있어 산행이 즐겁다. 함께 걷는 동행이 있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다. 원효봉을 지나 고인돌 같이 생긴 석문을 지나 상암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따라 상암마을 손씨집 앞에 도착했다. 정각 5시였다. 해는 이미 지고, 저녁 어스름 속에서 음식점들은 불을 밝히고 있다. 나 홀로 산행한 중년 남자가 저녁 어스름 속에 멀어지고 있다. 당신은 오늘, 누구와 함께 동행 하는가. 이지상 작사 '동행'을 함께 나누며 오늘 당신과 함께, 그리고 나와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당신의 지친 어깨 위/포근히 내려앉는 이슬처럼/당신의 어둔 마음에/한줄기 빛이 되고 싶어 나는/당신의 작은 맘 속에/담겨진 예쁜 세상처럼/당신의 상한 마음을/어루만졌으면 좋겠어 나는/황홀한 꿈을 꾸었던/아무도 없는 이 빈자리에/그대와 나의 마른 입술로/느낄 수 있는 사랑/당신의 젖은 두 눈에/숨겨진 푸른 눈동자처럼/당신의 바쁜 걸음에/빈틈없는 동행이 되고 싶어
덧붙이는 글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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