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서 이런 걸쭉한 입담꾼을 다시 만나랴
[서평]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가 만난 <문학동네 사람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독서의 즐거움
<오마이뉴스>에 가끔 서평이란 걸 쓰고 있지만, 사실 내 독서력이란 게 별것 아니다. 내 독서 이력은 스무 살 이전에 끝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니라. 서른 넘어 거의 20여 년 동안은 아무런 책도 읽지 않았다(읽지는 않았지만, 사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니 곡해 없으시길). 지식 혹은 지식인에 대한 혐오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내 부족한 독서력을 메워준 것은 <한겨레신문>이었다. 하루 두세 시간씩 꼬박꼬박 읽었다.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다고나 할까.
요즘, 나는 어릴 적처럼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녁이면,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꾸벅꾸벅 졸기나 할 뿐, 내 책읽기에는 좀처럼 진척이 없다. 세월은 내게서 기억력과 함께 집중력도 앗아가 버렸다. 그래도 시간 있을 적마다 인터넷 책방을 기웃거리면서 새 책을 산다.
얼마 전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쓰신 책 몇 권을 샀다. 그중에는 <문학동네 사람들>이란 책도 끼어 있었다. 박용래 시인에 대한 문학기행을 계획하면서 시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선생의 글을 참조하려고 산 것이다. 선생의 진솔한 행장기가 내 문학기행의 길라잡이가 돼 주지 않았더라면 내 기행기는 아주 초라한 것이 되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게으른 나는 책을 정독하지 않았다. 우선 박용래 시인에 대한 부분만 먼저 읽고 나서 던져두었다가 며칠 전에야 비로소 나머지 글들을 마저 읽는 편법을 취했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읽는 버릇은 책읽기에서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매우 위험한 함정이다.
이문구 선생이 쓴 책을 읽은 건 1970년대 말에 <관촌수필>을 읽은 이래 처음이었다. 그가 구사하는 맛깔스런 토속어, 구수한 입담과 해학적인 어투 등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얌전히 누워 있는 활자가 살아서 더운 김을 내뿜는 듯하다. 이문구라는 사람이 가진 인간미가 내뿜는 숨결 때문이다.
책 속에는 이른바 순수문학에 속하는 서정주, 김동리에서 '민족문학' 진영에 속하는 고은, 조태일에 이르기까지 열일곱 명의 문인이 등장한다. 아니, 이문구 자신까지 포함해 열여덟 명이다. 맨 마지막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다'란 글에 '깜짝 출연'을 한다.
글의 형식과 내용도 가지가지다. 문예지 뒤에 실었던 짧은 글, 문집 앞뒤에 실었던 발문이나 평문, 애도의 글, 기자가 되어 취재한 것을 본격적으로 집필한 것 등 매우 다양하다. 처음부터 책을 엮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글을 그러모은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글로만 대했던 문인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뜻이 달라서 멀어진 분들을 애도하다
책은 세상 떠난 미당에게 쓴 '이제야 술 한 잔 올리게 되어'라는 글로 문을 연다. 한때 미당의 문하생을 자처했던 그는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던 출판사에서 펴낸 <친일작품선집>에 미당의 글을 올려놓은 뒤로 미당과 거리를 둔다. 그리고 미당이 고인이 되고 나서야 추모의 글을 쓴다. 짧은 글이지만, 개인적 친분과 역사적 공과를 가릴 줄 아는 이문구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글이다.
소설가 김동리의 삼우제를 모시고 돌아와 썼다는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이란 글도 이런 류에 속할 것이다. 두 분 모두 그가 한때 문하를 자처하면서 따랐지만 시국에 관한 견해 차이로 멀어졌던 분들이다.
뜻이 달라서 멀어진 분들은 아니지만, '인간 농산물'이란 제목을 단 작가 강순식에 대한 글과 '내가 왜 울어야 하나'라는 박용래 시인에 대한 글도 애도의 글에 속한다. 그는 1969년 현대시학사가 주관한 '작품상' 시상식에서 처음 박용래 시인을 만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나는 박시인을 마음으로 모셨다. 모시다니, 이 얼마나 뻔뻔스럽고 떳떳치 못한 수작인가. 박시인에게는 필경 나 같은 것처럼 성가시고 주체스러운 짐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악몽 같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를 비롯, 문단에 잡스러운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를 단골로 찾아가 물리도록 볶으며 귀찮게만 굴었지 정녕 사람 노릇 한 번을 못해 본 터였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꺼려하는 내색조차 얼비치지 않았다. 나의 되잖은 행티나 같잖은 주접에도 눈썹 한번을 서슴거리거나 뜨악해하지 않았다. - (141쪽, '내가 왜 울어야 하나'에서)
이 글 속에는 사람을 대하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확연히 드러나 있다. 그같이 속 정 깊은 동향 후배를 만났던 건 박용래 시인의 커다란 복이었다.
뜻이 같아서 가까워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서정주, 김동리가 시국에 관한 견해 때문에 멀어진 분들이라면, 시국에 관한 견해가 일치해 가까웠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고은 시인과 신경림 시인, 조태일 시인, 소설가 송기숙, 황석영에 대해 쓴 글이 그것이다. 신경림 시인에 대해 쓴 '가난한 사랑 노래'라는 글에 들어 있는 시집 <농무> 발간에 얽힌 이야기가 자못 흥미롭다.
책은 이문구 선생의 주도 하에 처음에 '월간문학사'라는 유령출판사의 간판을 달고 나왔다. 첫 판 300부를 찍었는데 서점에 내놓은 것은 고작 10부였다고 한다.
독자의 반응은 생각 밖으로 좋았다. 독자의 성화에 못 견뎌 서점에서는 출판사(?)인 문협으로 수도 없이 주문 전화를 하였으나 끝끝내 반응이 없었다. 당연하였다. 문협의 대표가 갈릴 때 나도 함께 밀려나서 문협에서는『농무』가 무엇인지조차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얼마 후에 종로서적 사장한테 들었지.『농무』를 찾는 사람이 줄을 서는데 출판한 데서 책을 안 갖다 줘서 못 팔았다구."
"나는 그『농무』초간본만 없어졌는데, 구할 수 없나요?"
"나도 없어, 나도 못 구해." - (30쪽, '가난한 사랑 노래'에서)
친구 같은 입장에서 교우하던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소설가 박상륭, 조선작, 한승원, 김주영에 대한 글이 그런 류에 속할 것이다.
김주영씨의 촌생원스러움은 저 굴비 시인의 그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근대화된 것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는 일반 순경과 교통순경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율'이라는 완장을 찬 버스 정류장 교통정리원과 교통순경을 식별하지 못하며, 교통정리원과 '방범'이라는 완장을 찬 방범대원을 가릴 줄 모르고, 그 방범대원과 공공기관 건물 정문 앞 정복 차림의 수위를 혼동할 정도의 그런 사람인 것이다. 누가 만일 그에게 일반 순경과 소방서 소방관을 나란히 세워놓고 차이점을 가려보라고 한다면 김씨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235쪽, '안동의 김주사'에서)
이 글을 읽다 보면 김주영씨가 철저하게 자료를 수집해 썼다는 소설 <객주>를 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세상엔 네 편 내 편만 있는 건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이채로운 존재는 성기조 시인이 아닐까 싶다. 이문구 선생은 '자유실천문인협회' 쪽 분이고, 성기조 시인은 그 '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그는 성기조 씨에게서 구속문인 석방 등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
내가 선생을 감히 '이용'하기로 한 것은, 오직 이 단체와 회원들을 생각한 것이었다. 즉, 당국자는 이 단체와 회원들에 대한 당치 않은 오해가 많았고, 회원들은 당국자에 대해 쓸데없는 오해가 많았다. 예컨대 당국자는 회원들을 덮어놓고 불온시할 뿐이었고, 회원들은 당국자를 무턱대고 적대시할 뿐이었던 것이다. 높고 두꺼운 벽이 가로놓인 형국이었다. 쌍방이 서로 필요 이상의 오해와 불신을 덜기 위해서는 대화 창구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회원 가운데에는 창구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각자가 무슨 선명성 경쟁이라도 하듯이 자기 관리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던 때였으니까. - (81쪽, '난세의 후견인'에서)
성기조 시인과는 다른 류지만 '해결사 염재만'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내가 보기에 이문구 선생이야말로 문단의 잡다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던 '해결사'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렇게 오지랖 넓게 문단을 누비며, 대소사를 챙기던 이문구 선생이 낙향한 것은 1988년 초봄 집으로 배달된 신문의 사회면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면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나는 속이 복받쳐서 가슴이 메었다. 대관절 내 이름이 어느새 이렇게 낡아버렸더란 말인가. 도대체 내 이름은 왜 이렇게 문화면에 오르내리지 못하고 툭하면 사회면 귀퉁이의 1단 기사에서나 구색용으로 모개흥정이 되고 있단 말인가. 나는 신문을 접고 생각하였다. 이름을 보호하자. 이왕에 낡아진 곳은 고칠 수가 없더라도, 앞으로나 남의 이름에 곁다리가 되어 싼거리로 떨이할 때 덤으로 얹히어 끼어들어가는 허드레가 되지 않도록, 내 몸 내가 돌보고 내 이름 내가 돌보자고. - (268쪽,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다'에서)
그렇게 해서 그는 '무소식 공작'이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의 후미에서 선생은 얼치기 민중주의자, 얼치기 진보주의자를 풍자하고 있다. 개량 한복이나 입고 풍물이나 뚜드리는 너희 패거리 짓들이 민중을 위한 것이냐고 꾸짖는 것이다.
그는 인본주의적 토양 위에서 한 세상을 풍미한 속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세상을 소설가 이문구 선생은 2003년 2월 25일 타계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문학동네 촌장이었다. 그가 없는 문단은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그는 가고 그가 쓴 문단 동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 남아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반추하게 한다.
하지만 도처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한문투의 문장은 나를 당혹케 한다. 그 점이 그의 문장에 대한 접근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문학동네 사람들>이란 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오마이뉴스>에 가끔 서평이란 걸 쓰고 있지만, 사실 내 독서력이란 게 별것 아니다. 내 독서 이력은 스무 살 이전에 끝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니라. 서른 넘어 거의 20여 년 동안은 아무런 책도 읽지 않았다(읽지는 않았지만, 사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니 곡해 없으시길). 지식 혹은 지식인에 대한 혐오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내 부족한 독서력을 메워준 것은 <한겨레신문>이었다. 하루 두세 시간씩 꼬박꼬박 읽었다.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다고나 할까.
요즘, 나는 어릴 적처럼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녁이면,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꾸벅꾸벅 졸기나 할 뿐, 내 책읽기에는 좀처럼 진척이 없다. 세월은 내게서 기억력과 함께 집중력도 앗아가 버렸다. 그래도 시간 있을 적마다 인터넷 책방을 기웃거리면서 새 책을 산다.
얼마 전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쓰신 책 몇 권을 샀다. 그중에는 <문학동네 사람들>이란 책도 끼어 있었다. 박용래 시인에 대한 문학기행을 계획하면서 시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선생의 글을 참조하려고 산 것이다. 선생의 진솔한 행장기가 내 문학기행의 길라잡이가 돼 주지 않았더라면 내 기행기는 아주 초라한 것이 되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게으른 나는 책을 정독하지 않았다. 우선 박용래 시인에 대한 부분만 먼저 읽고 나서 던져두었다가 며칠 전에야 비로소 나머지 글들을 마저 읽는 편법을 취했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읽는 버릇은 책읽기에서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매우 위험한 함정이다.
▲ 책 표지. ⓒ 랜덤하우스중앙
이문구 선생이 쓴 책을 읽은 건 1970년대 말에 <관촌수필>을 읽은 이래 처음이었다. 그가 구사하는 맛깔스런 토속어, 구수한 입담과 해학적인 어투 등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얌전히 누워 있는 활자가 살아서 더운 김을 내뿜는 듯하다. 이문구라는 사람이 가진 인간미가 내뿜는 숨결 때문이다.
책 속에는 이른바 순수문학에 속하는 서정주, 김동리에서 '민족문학' 진영에 속하는 고은, 조태일에 이르기까지 열일곱 명의 문인이 등장한다. 아니, 이문구 자신까지 포함해 열여덟 명이다. 맨 마지막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다'란 글에 '깜짝 출연'을 한다.
글의 형식과 내용도 가지가지다. 문예지 뒤에 실었던 짧은 글, 문집 앞뒤에 실었던 발문이나 평문, 애도의 글, 기자가 되어 취재한 것을 본격적으로 집필한 것 등 매우 다양하다. 처음부터 책을 엮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글을 그러모은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글로만 대했던 문인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뜻이 달라서 멀어진 분들을 애도하다
책은 세상 떠난 미당에게 쓴 '이제야 술 한 잔 올리게 되어'라는 글로 문을 연다. 한때 미당의 문하생을 자처했던 그는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던 출판사에서 펴낸 <친일작품선집>에 미당의 글을 올려놓은 뒤로 미당과 거리를 둔다. 그리고 미당이 고인이 되고 나서야 추모의 글을 쓴다. 짧은 글이지만, 개인적 친분과 역사적 공과를 가릴 줄 아는 이문구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글이다.
소설가 김동리의 삼우제를 모시고 돌아와 썼다는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이란 글도 이런 류에 속할 것이다. 두 분 모두 그가 한때 문하를 자처하면서 따랐지만 시국에 관한 견해 차이로 멀어졌던 분들이다.
뜻이 달라서 멀어진 분들은 아니지만, '인간 농산물'이란 제목을 단 작가 강순식에 대한 글과 '내가 왜 울어야 하나'라는 박용래 시인에 대한 글도 애도의 글에 속한다. 그는 1969년 현대시학사가 주관한 '작품상' 시상식에서 처음 박용래 시인을 만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나는 박시인을 마음으로 모셨다. 모시다니, 이 얼마나 뻔뻔스럽고 떳떳치 못한 수작인가. 박시인에게는 필경 나 같은 것처럼 성가시고 주체스러운 짐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악몽 같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를 비롯, 문단에 잡스러운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를 단골로 찾아가 물리도록 볶으며 귀찮게만 굴었지 정녕 사람 노릇 한 번을 못해 본 터였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꺼려하는 내색조차 얼비치지 않았다. 나의 되잖은 행티나 같잖은 주접에도 눈썹 한번을 서슴거리거나 뜨악해하지 않았다. - (141쪽, '내가 왜 울어야 하나'에서)
이 글 속에는 사람을 대하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확연히 드러나 있다. 그같이 속 정 깊은 동향 후배를 만났던 건 박용래 시인의 커다란 복이었다.
뜻이 같아서 가까워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서정주, 김동리가 시국에 관한 견해 때문에 멀어진 분들이라면, 시국에 관한 견해가 일치해 가까웠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고은 시인과 신경림 시인, 조태일 시인, 소설가 송기숙, 황석영에 대해 쓴 글이 그것이다. 신경림 시인에 대해 쓴 '가난한 사랑 노래'라는 글에 들어 있는 시집 <농무> 발간에 얽힌 이야기가 자못 흥미롭다.
책은 이문구 선생의 주도 하에 처음에 '월간문학사'라는 유령출판사의 간판을 달고 나왔다. 첫 판 300부를 찍었는데 서점에 내놓은 것은 고작 10부였다고 한다.
독자의 반응은 생각 밖으로 좋았다. 독자의 성화에 못 견뎌 서점에서는 출판사(?)인 문협으로 수도 없이 주문 전화를 하였으나 끝끝내 반응이 없었다. 당연하였다. 문협의 대표가 갈릴 때 나도 함께 밀려나서 문협에서는『농무』가 무엇인지조차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얼마 후에 종로서적 사장한테 들었지.『농무』를 찾는 사람이 줄을 서는데 출판한 데서 책을 안 갖다 줘서 못 팔았다구."
"나는 그『농무』초간본만 없어졌는데, 구할 수 없나요?"
"나도 없어, 나도 못 구해." - (30쪽, '가난한 사랑 노래'에서)
친구 같은 입장에서 교우하던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소설가 박상륭, 조선작, 한승원, 김주영에 대한 글이 그런 류에 속할 것이다.
김주영씨의 촌생원스러움은 저 굴비 시인의 그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근대화된 것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는 일반 순경과 교통순경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율'이라는 완장을 찬 버스 정류장 교통정리원과 교통순경을 식별하지 못하며, 교통정리원과 '방범'이라는 완장을 찬 방범대원을 가릴 줄 모르고, 그 방범대원과 공공기관 건물 정문 앞 정복 차림의 수위를 혼동할 정도의 그런 사람인 것이다. 누가 만일 그에게 일반 순경과 소방서 소방관을 나란히 세워놓고 차이점을 가려보라고 한다면 김씨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235쪽, '안동의 김주사'에서)
이 글을 읽다 보면 김주영씨가 철저하게 자료를 수집해 썼다는 소설 <객주>를 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세상엔 네 편 내 편만 있는 건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이채로운 존재는 성기조 시인이 아닐까 싶다. 이문구 선생은 '자유실천문인협회' 쪽 분이고, 성기조 시인은 그 '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그는 성기조 씨에게서 구속문인 석방 등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
내가 선생을 감히 '이용'하기로 한 것은, 오직 이 단체와 회원들을 생각한 것이었다. 즉, 당국자는 이 단체와 회원들에 대한 당치 않은 오해가 많았고, 회원들은 당국자에 대해 쓸데없는 오해가 많았다. 예컨대 당국자는 회원들을 덮어놓고 불온시할 뿐이었고, 회원들은 당국자를 무턱대고 적대시할 뿐이었던 것이다. 높고 두꺼운 벽이 가로놓인 형국이었다. 쌍방이 서로 필요 이상의 오해와 불신을 덜기 위해서는 대화 창구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회원 가운데에는 창구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각자가 무슨 선명성 경쟁이라도 하듯이 자기 관리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던 때였으니까. - (81쪽, '난세의 후견인'에서)
소설가 이문구 |
1941년 4월 12일 충청남도 보령에서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 1966 년 현대문학 '백결'이 추천되어 등단 1993 제8회 만해문학상 1999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2000 제31회 동인문학상 2001 제33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2003 은관문화훈장 2003년 2월 25일 타계 주요 작품 1967 <지혈> 1968 <이삭> 1969 <몽금포 타령> 1970 <이 풍진 세상을> 1972) <해벽><관촌수필> 1972 장편소설 <장한몽> 1973 <초부> 1974 <백면서생> 1976 <관촌수필6> 1977 연작 장편 <관촌 수필> 1977<으악새 우는 사연> 1977<우리동네 김씨> 1978 <우리동네 최씨> 1979 <우리동네 유씨> 1980 <우리동네 장씨> 198 1<우리 동네> 1984 <강동만필> 1991<장곡리고욤나무><유자소전> 1999 <장석리 화살나무> 2000 <장평리 찔레나무> |
이렇게 오지랖 넓게 문단을 누비며, 대소사를 챙기던 이문구 선생이 낙향한 것은 1988년 초봄 집으로 배달된 신문의 사회면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면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나는 속이 복받쳐서 가슴이 메었다. 대관절 내 이름이 어느새 이렇게 낡아버렸더란 말인가. 도대체 내 이름은 왜 이렇게 문화면에 오르내리지 못하고 툭하면 사회면 귀퉁이의 1단 기사에서나 구색용으로 모개흥정이 되고 있단 말인가. 나는 신문을 접고 생각하였다. 이름을 보호하자. 이왕에 낡아진 곳은 고칠 수가 없더라도, 앞으로나 남의 이름에 곁다리가 되어 싼거리로 떨이할 때 덤으로 얹히어 끼어들어가는 허드레가 되지 않도록, 내 몸 내가 돌보고 내 이름 내가 돌보자고. - (268쪽,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다'에서)
그렇게 해서 그는 '무소식 공작'이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의 후미에서 선생은 얼치기 민중주의자, 얼치기 진보주의자를 풍자하고 있다. 개량 한복이나 입고 풍물이나 뚜드리는 너희 패거리 짓들이 민중을 위한 것이냐고 꾸짖는 것이다.
그는 인본주의적 토양 위에서 한 세상을 풍미한 속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세상을 소설가 이문구 선생은 2003년 2월 25일 타계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문학동네 촌장이었다. 그가 없는 문단은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그는 가고 그가 쓴 문단 동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 남아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반추하게 한다.
하지만 도처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한문투의 문장은 나를 당혹케 한다. 그 점이 그의 문장에 대한 접근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문학동네 사람들>이란 책 역시 예외는 아니다.
덧붙이는 글
<문학동네 사람들>/이문구/랜덤하우스중앙/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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