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돌담길의 향수가 있다네...
함라지역 곳곳이 '돌담길', 전통가옥도 볼거리
▲ 돌담길함라지역 거리 곳곳의 담장이 토담석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 모형숙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기놀이며 고무줄뛰기, 팔방치기를 했던 담벼락 아래 풍경은 우리 어릴 적 잔잔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담벼락은 여름이면 그늘이 되어주고 겨울이면 바람도 막아주었던 묵묵한 우리네 벗이기도 했다.
옛것이 좋은 것은 지나간 것에 대한, 세월에 묻혀 잊어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아스팔트, 콘크리트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자연을 담은 담벼락은 예나 지금이나 따스한 애잔함 같은 것을 묻어나게 한다.
요즘 도심에서는 흔하지 않은 담이지만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향수를 자아내는 돌담길이 눈길을 끌고 있다. 흙과 지푸라기, 석회 등을 섞어 쌓거나 여기에 돌을 넣어 쌓기도 한 토담은 우리네의 전통적인 건축방식이며 질 좋은 흙이 많이 나오는 우리나라의 일반 농가에서 주로 사용한 담장이기도 하다.
▲ 돌담지붕돌담길의 기와지붕이 옛 멋을 담아 운치를 더했다. ⓒ 모형숙
전북 익산에서 함열 방향 중간쯤 좌측으로 농원삼거리 200m라는 푯말이 보인다. 철길을 지나 함라초등학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함라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농가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거리 곳곳의 담장이 토석담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
이 돌담길은 전문 장인이 아닌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세대를 이어가며 만든 것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중시해 문화재 등록을 추진, 지난해 4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특히 함라에서 소위 만석군으로 일컬어지는 세 명의 부호, 즉 김안균씨와 조해영씨, 이배원씨 가옥이 마을의 중심에 각각 넓은 터를 차지하며 인접해 있고 지금까지 그 당시의 가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전통가옥으로 자리하고 있다.
제법 돌담길과 전통가옥이 관심을 끌며 전국에서 알음알음 찾아오는 관광객이 심심치 않다. 옛것을 좇는 담장도 그렇겠지만 전통적인 가옥이 마을 한편에 자리하고 있어 주말을 이용해 자녀들과 한번쯤은 돌아봄 직한 곳이기도 하다.
▲ 장독대두 군데의 장독대는 대가다운 면모를 엿보게 하기에 충분했다. ⓒ 모형숙
집주인 떠난 조해영 가옥, 옛 모습 고스란히
함라 지역의 중앙에 있는 버스정류장의 골목길부터 돌담길이 즐비하다. 첫 번째로 보이는 전통가옥인은 조해영 가옥. 원래의 대문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좁은 문이 남아 있고 안채와 별채로 둘러싸인 공간을 제외하고는 뒷담이 없이 거의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주인이 떠난 자리에 집을 관리해주는 마을주민이 한 번씩 돌아보며 모과나무와 탱자나무를 지키고 있었다.
1986년 9월 8일에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어 안채는 옛 모습을 담고 있으며 지금은 안채 1동과 별채 1동, 그리고 변형된 문간채만 남아 있고 본래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집터를 보며 짐작해 본다.
안채의 상량문에 ‘대정 7년’이 명기되어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 또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별채는 일본식 건축양식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으며, 두 군데의 장독대는 사람이 살던 시절의 흔적과 장독 수만큼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음을 가늠하게 한다. 건물배치는 정남향에 가까운 남남서향이며 안채와 별채는 모두 남북으로 길게 서로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고 안채는 남쪽을, 별채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 아자난간누마루 형식으로 세밀하게 살을 짠 아자난간. ⓒ 모형숙
▲ 문고리녹슨 흔적이 역력하지만 89년의 역사만큼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 모형숙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상류가옥, 김안균 가옥
조해영 가옥을 지나면 김안균 가옥이 맞붙어 있다. 조선 말기의 양반가옥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김안균 가옥은 입구에서부터 CCTV가 을씨년스럽게 눈길을 끈다.
전통가옥에 CCTV라, 주인 없는 빈집이지만 예전에는 도적들이 자주 들어 주인이 설치한 것이란다. 골동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문짝이며 장식품들을 떼 가다 보니 주인이 생각해낸 것이 CCTV었다.
이곳도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지만 2318평에 건평 188평으로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상류가옥의 변모를 보여주며 조선 말기 양반가옥 형식을 띠고 있다.
▲ 사랑채사랑채 앞의 소나무와 처마 끝이 하늘과 맞닿아 세상 시름 덜어낼 만큼 한적하고 고요하다. ⓒ 모형숙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하인들이 묵었던 행랑채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행랑채 우측으로는 사랑채로 갔던 문이, 행랑채 맞은편에는 안채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다. 이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상량문의 기록으로 보아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에, 동·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가옥의 특징은 백두산에서 직접 가져온 소나무로 지어졌으며 이 집 주인이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목장을 직접 데려다 지어서 한때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김안균 가옥은 대가이나 구조와 의장에 있어서 일본식 수법이 가미되어 당시의 주택 모양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서양식을 본떠 거실과 침실을 구별했으며 사랑채와 안채 앞뒤로 복도를 두르고 유리문을 달아 채광을 조절했다.
▲ 분합들쇠처마 밑에 분합을 달아 문에 달린 경첩을 들어 올려 분합들쇠에 달아매면 문이 닫히지 않는 역할을 했다. ⓒ 모형숙
▲ 문양1922년 건립된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지은 담벼락에 새져진 문양 ⓒ 모형숙
사랑채 옆에는 세면대가 딸린 화장실을, 행랑채 끝에는 목욕탕을 배치했고 대청은 누마루 형식으로 세밀하게 살을 짠 亞자 모양의 아자난간을 둘렀으며 주춧돌은 정교하게 잘라낸 희고 매끄러운 화강암을 사용했다.
사랑채로 들어서니 분합들쇠가 풍경처럼 시선을 잡아끈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처마 밑에 분합을 달아 문의 경첩을 들어올려 분합들쇠(분합걸쇠)에 달아매면 문이 닫히지 않는 역할을 했다.
사랑채를 빙둘러 에워싸고 있는 분합들쇠는 한여름 사랑채에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읊던 선인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한순간 스치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기에 족하다. 사랑채 앞의 소나무와 처마 끝이 하늘과 맞닿아 세상 시름 덜어낼 만큼 한적하고 고요하다.
2318평의 규모답게 우물만도 세 군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우물의 구조 또한 돌을 쌓아 만들었고 특징이 있다면 우물의 담벼락이 없으며 바닥과 우물이 바로 이어져 있다. 밤도적이 담장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지나온 정원 한가운데의 우물은 여럿 빠지지 않았을까 오지랖 넓게 걱정이 앞선다.
이배원 가옥은 현재 관리자인 조부 이배원이 1917년에 지은 것으로 세 집 중에 가장 먼저 지은 집이다. 건립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위의 토석담장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내부가 개조되어 원불교 교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 우물돌을 쌓아 만든 우물은 담벼락이 없이 바닥과 우물이 바로 이어져 있다. ⓒ 모형숙
어릴 적 놀던 문화, 체험문화로 함께 만들자
함라에서 소위 만석군으로 일컬어지는 세 부호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인근에 소가 엎드린 모양의 형상을 띈 와우산이 버티고 있어 마을의 평화와 안녕이 지켜졌다는 설도 있다. 와우산의 풍수는 평상시에 일하는 소가 엎드려 있으니 얼마나 풍요롭겠느냐, 그래서 이곳의 풍수는 대체적으로 평온하며 근심이 적은 곳이었다.
이런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를 놓기 위해 일본인이 으름장을 놓았는데 양반 사는 곳에 말이 소리 내면서 지나가냐고 큰소리쳐 철길이 함열 방향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하여튼 문헌상으로는 이 동네가 인심 좋은 곳이라고 한다.
익산시에서는 등록문화재인 만큼 볼거리와 체험문화를 함께 만들어가겠다는 생각이다. 등록문화재가 관심거리가 되는 이유는 사라져가는 우리의 문화를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취지이다. 전통가옥의 경우 역사적 가치도 높겠지만 우리 것을 지키고 아껴 후손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굳이 돈으로 환산하기보다는 역사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세계화 시대가 되다 보니 우리의 뿌리를 지키고 남겨서 알려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스턴트와 플라스틱에 그 아름다운 감성을 잃어가는 요즘 아이들. 익산시청 문화관광과의 최인경씨는 “우리들에게 돌담길이나 기와지붕이 낯설 것은 없지만 옛날이야기며 어릴 적 놀던 놀이 문화를 우리의 자녀들이 느껴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며 “함라지역의 돌담길을 중심으로 전통가옥을 벗 삼아 보리밥도 먹어보고 팔방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자연을 담은 정서를 심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설명한다.
▲ 까치집과 돌담길함라지역은 유난히 많은 까치집이 눈길을 잡아끈다. ⓒ 모형숙
익산지역 문화재 현황 |
문화재는 지정여부 등에 따라 크게 지정·비지정·등록문화재로 구분한다. 지정문화재는 문화재의 성격 및 지정주체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 시·도지정문화재와 시·도지사가 시·도조례에 의해 지정한 문화재자료가 있다. 비지정문화재는 문화재보호법 또는 시·도의 조례에 의해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매장문화재·일반동산문화재를 말한다.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근·현대시기에 형성된 건조물 또는 기념이 될 만한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 중에서 보존가치가 큰 것이다. 특히 근대문화유산의 개념과 범위는 ‘개화기’를 기점으로 해 ‘해방전후’까지의 기간에 축조된 건조물 및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가 중심이 되며, 그 이후 형성된 것일지라도 멸실 훼손의 위험이 크고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경우 포함될 수 있다. 2006년 6월 30일 현재 전국의 지정문화재는 9288건, 등록문화재는 266건. 이 중 전라북도의 지정문화재는 721건, 등록문화재는 38건이다. 또한 익산시의 지정문화재는 64건, 등록문화재는 8건이며 이 중에서 전라북도 등록문화재로 익산이 가장 많다. 이는 일제의 흔적이 가장 많은 군산(6건)보다 많은 숫자로 그만큼 근대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익산의 지정문화재에서 근대문화유산을 확인해 보면 조해영 가옥(전라북도문화재자료 121호), 김안균 가옥(전라북도민속자료23호), 이배옥 가옥(익산시향토유적10호), 이병기 선생생가(전라북도기념물6호), 이병기 선생생가 탱자나무(전라북도기념물112호), 화산천주교회(사적318호), 두동교회(전라북도문화재자료179호), 함벽정(전라북도지방유형문화재 127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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