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부처 얼굴,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백두대간을 나누는 죽령의 이쪽과 저쪽 ①
▲ 보국사지의 상징 장육불: 불두가 없다. ⓒ 이상기
보국사 절터를 보기 위해 죽령을 찾았다. 죽령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 경계에 있는 소백산 자락에 있다.
우리는 대강면 용부원리 텃골을 지나 죽령산신당(竹嶺山神堂) 안내판을 보고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로 들어섰다. 철도 아래로 난 소로를 따라 왼쪽으로 가파른 길을 오르니 죽령 산신당이 나온다. 산신당은 남향을 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대강면 골짜기가 길게 내려다 보인다. 죽령산신당은 삼국시대부터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 죽령산신당에는 다자구 할머니의 전설이 서려있다. ⓒ 이상기
죽령산신당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다자구 할머니 전설이다. 죽령은 예부터 험한 고개인지라 도둑들의 소굴이었다. 이들 도둑은 떼를 지어 행인들을 괴롭히거나 물건을 빼앗았다. 행인들의 피해를 보다 못한 조정에서 도둑 소탕령을 내렸고, 죽령폭포 앞에 살고 있던 한 할머니가 관군을 도와 도둑을 잡으러 나갔다.
할머니는 관군들을 곳곳에 매복시킨 후 암호를 정하고 '다자구'라고 하면 공격하고 '들자구'하면 숨어 있도록 하여 도둑떼를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마지막에 할머니는 도둑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에 조정에서 사당을 세워 할머니의 넋을 위로하게 되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다자구 할머니 산신당'으로 불리다가 이곳의 지명을 따서 죽령산신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 죽령산신당 현판: 삼국시대부터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 이상기
"다자구야 들자구야 언제가면 잡나이까?
들자구야 들자구야 아직 오면 안됩니다.
다자구야 다자구야 소리칠 때 기다리다
다자구야 다자구야 그때 와서 잡으라소."
▲ 제당인지 굿당인지 불분명한 산신각 ⓒ 이상기
산신당을 나와 다시 죽령의 7부 능선쯤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죽령 옛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길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경관이 의외로 좋다. 그래서인지 펜션 같은 건물들을 짓느라고 여기저기 공사 중이다. 그래도 옛날 정서를 느끼게 하는 오래된 집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 사이로 또 동제를 지내는 제당을 하나 볼 수 있다. 우리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보름인지라 촛불까지 켜져 있다.
세 개의 촛불 뒤로는 소백산신령 신위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왼쪽에는 징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제를 올렸거나 올릴 모양이다. 오른쪽 위로는 실 꾸러미와 한지가 걸려 있다. 동제(洞祭)에 관심이 많은 어경선 선생이 이것저것 유심히 살펴본다.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을 만나보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쉽다.
▲ 연화대 위에 세워진 장육불 ⓒ 이상기
이곳에서 차로 5분쯤 올라가니 길 왼쪽 언덕 위로 절터가 나타난다. 죽령 옛길의 8부 능선쯤 되는 이곳이 보국사지(輔國寺址)다. 주변이 대부분 밭으로 변해 있어 관심을 가지고 봐야 찾을 수 있다. 밭을 중심으로 약 700-800평쯤 되는 공간이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유물이 드러나 보이는 곳의 면적은 100평 정도이다. 5m쯤 되는 거대한 석불(丈六佛)을 중심으로 주변에 주초석과 연화대 등이 널려 있다.
1979년 충주에 있는 예성문화연구회가 조선시대 가사문학 작품인 <소백산 대관록>을 근거로 이곳에서 석불을 확인하고 통일신라 보국사지라고 주장했다.이에 따라 단양군에서 1984, 85년 두 차례에 걸쳐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석불(장육불) 외에 연화문 석대와 기단부, 돌기둥인 석주,대나무 줄기 모양의 죽절문 석주,연화 첨차석,연화석,기둥머리돌(柱頭石),난간 석주,초석,옥개형(屋蓋形) 석재,깨진 기와 등이 다량 확인되었다.
▲ 장육불의 옷주름 ⓒ 이상기
단양군에서 80년대 이후로 불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주변에 있는 부재만 하나 둘씩 반출되기 시작해 지금은 80년대 중반 지표조사 때보다도 절터로서의 모습을 더 잃어버리고 말았다. 문화재나 유물의 현장 보존과 유지라는 기본 정신을 망각한 것 같아 정말 아쉽다.
▲ 반출된 죽절문 석주 두 기 ⓒ 이상기
▲ 장육불의 왼쪽손 ⓒ 이상기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이 곳 죽령을 넘나들던 우리 조상들은 이 아름다운 불상을 보면서 소원을 빌고 또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보국사지를 찾는 사람도 우리 같은 역사연구자들 뿐이고, 이곳 동네 사람들마저 관심밖이어서 거의 폐허 상태가 되었다. 11월말, 계절 탓이기도 하겠지만 보국사 절터가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 팔작지붕으로 된 죽령산신당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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