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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치료하는 것은 '의학'이 아니다

등록|2007.12.03 14:22 수정|2007.12.03 14:22
오늘은 건강과 새로운 치료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건강과 치료에 관한 당연한 말씀보다는, 일반인은 물론 의사들도 잘못 알고 있는 의학적 진실들을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과연 ‘진정한 치료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것이며, 원래 못 고치는 병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못 고치는 의학들’이 있었을 뿐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생명은 현대의학만으로 고칠 수 없어
오늘을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생명의 제1원리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생명의 첫 번째 원리는 “기계는 인간의 지식으로 만들었고, 생명은 자연의 지혜가 만들었다”입니다. 이것을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든 이가 자기가 만든 것을 가장 잘 수리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계의 수리는, 만든 인간이 해야 하고, 생명체의 수리는, 즉 치료는 생명을 만든 자연이 해야 순리일 것입니다.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도, 오늘날 치료현장에서 이러한 기본원칙조차 잊혀진 지 오래이며, 정비소의 부품별 라인별 정비공이 있는 것처럼, 각과 전문의가 인간의 장기별 부속을 다룹니다. 이것을 인간기계론이라고 하며, 놀랍게도 현대의학의 철학적 과학적 기반입니다.

기계를 고칠 때 기계에게 친절을 베푼다고 더 잘 수리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사들의 불친절은 인간기계론 때문에 친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며, 의사양성과정에서 그렇게 배웁니다. 친절 때문에 낫게 되면, 오히려 비과학이 되며 사이비로 매도되기 일쑤 입니다.

아무튼 사람이 기계와 유사한 측면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며, 그러기에 현대의학도 때로 아주 유용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기계와 다른 측면이 더 많음도 사실이며 현대의학의 한계 또한 그러기에 명백합니다.

몸은 전지전능한 ‘자연의 지혜’가 만들었으며, 그러기에 “몸 그 자체”는 본래 전지전능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그 지혜를 잘 돕는 정도가 의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알아낸 과학으로 기계를 만들었고, 그러기에 당연히 기계는 과학을 활용하면 잘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체’는 인간이 발견한 과학으로 만든 것이 아니며, 과학을 만들어낸 인간조차도 생명의 지혜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도- 과학적 의학, 즉 현대의학만으로 고칠 수 없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의 우리의 삶과 생명영위는 과학 덕분이 아니며 생명의 지혜, 즉 위대한 자연의 지혜 때문입니다. 식물이 학원을 다니고 배워서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생명의 진리입니다.

상처가 나면 몸의 지혜로 흔적 없이 감쪽같이 아물지만 그 과정에 대해 현대의학이 알아낸 것은 불과 1%도 안 됩니다. 다만 소독하고 꿰매고 붕대를 감아놓으면 잘 나으므로 그렇게 해 왔고, 자신이 낫게 한 줄로 현대의학은 착각한 것입니다.

이제서야 활성산소, 유전자 등을 발견하였다지만, 실은 생명은 수십 억 년 전부터 만들어 활용해온 것이며 원시인류도 저 숲의 이끼들도, 지금의 내 세포도 그러한 지혜로 살아온 것입니다.

진짜 의사는 신이 주신 바로 ‘각자의 몸’

콜럼부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수천 년 전에도 인디언들이 대대손손 사랑과 행복을 구가하며 살아왔지만, 과학자들은 콜럼부스가 미대륙을 발견하였다고 착각합니다. 현대의학도 마찬가지의 오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체에서 발견한 모든 현상은 몸은 원래 알고 사용하여 온 것입니다.

이처럼 몸이라는 하늘이 내린 의사는 믿지 못하고, 한계가 명백한 인간 의사만 믿고 매달리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기 집에 헌신적이고 숭고하며 전능한 명의가 있는데도, 그것을 몰라 헌신적이지도 숭고하지도 실력도 별로인 의사들을 찾아다니는 격입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진짜 의사는 신이 주신 바로 ‘각자의 몸’이며, 그 몸이 최선을 다하도록 보조하고 돕는 것만이 참된 의학이라는 것입니다. 제대로만 한다면 생명간호학이 오히려 참다운 의학입니다. 미래의 의학은 반드시 이러한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진리이며 생명의 진리이며 치료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몸은 우둔하여 쓸데없이 병이나 일으키므로, 의대를 졸업한 현명한 의사가 메스로 떼어내고 화학약품으로 개입해 주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생명의 지혜와 생명활동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병이 나았는데도, 몸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이는 드뭅니다.

그럼에도 웬만하면 몸은 서운하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분자생물학이나 생명공학이 덜 발달되어 불치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보는 패러다임의 진정한 변화 없이는 불치의 고통은 마를 날이 없을 것입니다.

*오해가 있을까 사족을 달면, 저의 치료 원리의 과학성은 현대물리학의 양자이론과 상대성이론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현대의학은 인간기계론으로 대표되는 300년 전의 뉴턴-데카르트에 기반하고 있는 엄밀히 말하면 비과학입니다. 뱀에게 다리가 있다면 결코 움직이지 못합니다. 나는 바로 나이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곧이어 생명의 두 번째 원리인 ‘아는 것이 병이다’를 말씀드릴 것입니다.

몸이 원하는 것을 하면 치료가 되는가?

지난 시간에 이어, 이 시간에는 ‘질병의 치료는 간단하다‘라는 생명의 두 번째 원리를 말씀드릴 것입니다. 앞서 내용을 보고, 몸이 원하는 것을 하면 치료가 되는가?라는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고기를 먹던 이가 안 먹으면 먹고 싶게 되며, 담배를 피던 이는 몸의 강력한 요구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시면 이것은 몸의 요구가 아니라, 그 개인의 감정체계의 욕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독은 몸의 문제라기보다는 감정과 욕망을 주관하는 조건반사에 관련한 것이며 몸이 아니라 심정적 문제입니다.

단풍에 물드는 은행잎을 보면 잎의 가장자리부터 노랗게 물들며, 단풍나무는 꼭대기부터 붉게 물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현상만 살펴온, 현대의학의 질병관을 단풍에 비유해보면 노랗거나 붉은 것을 질병이라 부르며, 단풍 속의 복잡한 색소분자들을 분해하고 분석하며 첨단연구라고 포장합니다.

가을이 되어 생명력의 공급이 줄어들면 공급로인 줄기로부터 더 먼 변방부터 줄어들 것이고, 그러기에 가장자리부터 단풍이 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풍색소가 가령 '단풍병'의 본질이 아니라, 줄기로부터 생명력공급이 감소된 것이 '단풍병'의 본질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어둠이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빛이 없어서 어둠이 있어 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랗거나 붉은 질병이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생명력의 공급부족이 ‘질병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단풍이 증상이나 질병이라면 치료는 줄어든 생명력의 공급이어야지, 단풍든 부분을 수술로 잘라내던지, 화학약품으로 중화시켜 색깔을 덧칠하려는 방법은 일시적인 치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력의 부족이 비유컨대, 가을 산의 울긋불긋함처럼 어떤 경우에는 노랗게 어떤 경우에는 붉게 드러난 것일 뿐이며, 이런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현대의학은 보이는 대로 노란 병, 붉은 병, 또는 갈색 병이라고 진단한 것입니다.

의식을 전환하면 자연치료가 보인다

건강하다의 대칭되는 개념에 질병 개념이 있습니다. 건강이 단수이므로 그러므로 질병도 질병들이라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어야 합니다. 즉 생명력 부족이란 단수가, 복수인 모든 질병들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력을 보강하면 모든 질병이 치료되는 것이며, 이것이 다양한 치료들의 '마스터키'였던 것입니다.

현대의학의 경우처럼, 붉은 단풍이나 노란 단풍이라는 개별 증상에 따라 약물이 다른 것이 아니고, 가령 약초로 생명력을 보강하면 모든 색의 단풍은 -즉 다양한 질병은- 당연히 물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매우 단순한 원리로 이루어졌기에 100조개가 넘는 세포들이 하나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냇물 속의 한 방울의 물은 흐를 대로 흐르지만, 만약 그 물방울이 10초 동안에 흐를 궤적을 유체역학방정식으로 예측하면 그 계산은 수십 페이지가 넘고 그것도 근사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물방울은 수학을 전혀 모르며 흐를 대로 흐른 것이며, 우리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네의 다리는 많게는 177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다리를 꼬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지를 지네에게 물으면 순간 지네의 다리는 꼬입니다. 지네는 그저 자연스레 걸었을 뿐인데, 말하려고 생각하는 순간 꼬이게 되고 걷지 못하게 됩니다. 현대의학이 바로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라디오의 경우 반드시 끊어진 회로를 찾아 납땜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지만, 생명체의 경우 기분만 좋게 해주어도, 진심으로 기도만 해도 스스로 치료가 됩니다.   낫게 하는 것이 의학이지 왜 낫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의학이 아닙니다. 자식이 사랑스러움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사랑하지 않음이 아닙니다.

약초치료를 주장하는 저에게 제 주변의 의사 동료들은 말합니다. 저 지독한 화학약품을 들이대도? 침입한 바이러스를 죽이기 어려운데 풀뿌리로 치료한다니 말이 되느냐, 학자로서 너무 하지 않느냐고 항변합니다.

의식을 전환하면 답이 보입니다. 원래 우리 몸은 정상적으로 유해균이 자랄 수 없는 환경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세균과 곰팡이 천지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풀뿌리로 정상체내 환경을 조성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바이러스를 공격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활할 조건이 안 되면 바이러스는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바이러스를 공격하면 그들도 대항할 것이며 싸움이 거듭되면 그들도 점점 투사로 변하며, 소위 저항성을 얻게 될 것이며, 그 전장 터는 우리 몸입니다. 신의 사랑으로, 저 위대한 자연이 만든 ‘신의 약장’이라는 산야에 가득한 약초를 외면하고, 한계 많은 인간의 지식으로 짜낸 화학약품들을 좋아라하고 복용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생명의 세 번째 원리인 결자해지에 대해 말씀드릴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을지의과대학교 임종호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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