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냉큼 고사떡 도르고 오거라"
[북한강 이야기 367] 시월 상달은 고사 지내는 달
▲ 해가 어스레하고 땅거미가 집안으로 기어들면 고사는 시작됩니다. ⓒ 윤희경
10월을 '상달'이라 하여 고사를 지냅니다. 상달은 '햇곡식을 신에게 바치기에 가장 좋은 달'이란 뜻입니다. 신은 떡을 좋아하나 봅니다. 한 해를 보내며 떡을 신에게 바치지 않으면 뭔가 뒤숭숭하고 궂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정성껏 떡을 빚어 바치고 집안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고사 떡의 대표는 시루떡입니다. 시루떡은 떡가루의 켜를 지어 시루에 안쳐 찐 떡으로 떡의 대표 선수입니다. 시루떡은 메시루떡과 찰시루떡으로 나뉘는데 이를 메떡과 찰떡이라고도 합니다. 메떡은 끈기가 적은 멥쌀로 만든 떡이고 찰떡은 차진 찹쌀로 만든 떡입니다. 멥쌀과 찹쌀을 섞어 만들면 메찰떡이 됩니다.
▲ 밑에 두 판은 찰 떡, 위 세 판은 메떡, 아직도 따끈따끈. 메떡엔 반미콩, 찰떡엔 떡 호박이 들어 있다. 콩은 고소하고 호박은 달착지근한 맛이 나 맛을 더해 준다. ⓒ 윤희경
시루떡을 찌려고 시루를 솥에 얹을 때, 김이 새지 않게 하려고 시루와 솥 사이 틈에 쌀무거리나 밀가루를 반죽해 바르는 것을 ‘시룻번’이라 하는데, 배가 고팠던 어린 시절 그것을 떼어먹는 맛이 그만이었습니다. 요새는 어지간해선 시골에서도 시루떡을 직접 만드는 집은 보기 어렵습니다. 쌀과 팥고물, 콩과 호박을 준비해 방앗간에 연락하면 떡을 쪄 배달까지 해줍니다.
붉은 노을이 어둠에 쫓겨 달아나고, 땅거미가 어둑하게 저녁을 끌고 집안으로 기어들면 고사는 시작됩니다. 집안 고사는 여인들의 몫입니다. 시루떡과 정한수를 마루 한가운데 놓고 집안 대표신인 성주에게 빌기를 시작합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집안의 무고와 풍년농사, 가족건강 등…. 두 손 모아 손이 발이 되도록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립니다.
▲ 우리집 장손이 붉은 팟고물을 떼어 먹겠다 야단입니다. ⓒ 윤희경
다음엔 떡을 접시에 담아 집안을 한 바퀴 돌며 여러 신에게 골고루 고사를 올립니다. 조상을 보호해 주는 조령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집터를 다스리는 터줏대감, 자손 건강을 돌보는 삼신, 대문에 문신, 우물에 용왕 신 등.
어릴 적 이제나저제나 고사가 끝나 떡 맛을 보나보다 싶으면 어머닌 떡 심부름을 다녀오라 시킵니다. 고사 떡은 이웃과 나눠 먹어야 한다며 ‘냉큼 도르고 오라’ 등을 떠밉니다. 심부름이 다 끝나 허기가 질 무렵이면 눈처럼 하얀 멥쌀 떡과, 시린 동치미 국물, 붉은 팥 고물을 떼어먹던 추억이 어제처럼 어슴푸레합니다.
난, 고사를 지내지 않지만 요 며칠간 이웃집들이 나눠 준 고사떡 먹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습니다. 접시 대신 비닐봉지에 쌓여온 시루떡은 대개 김이 모락모락 나고 따끈따끈한 온기 그대로입니다. 그 따사로운 감촉이 하도 좋아 가슴에 안고 그 옛날 어머니의 훈기를 맡아내는 일 또한 행복한 순간입니다.
비닐봉지를 열면 대개 메떡 세 편, 찰떡 두 편이 들어 있습니다. 메떡을 들다 찰떡을 먹고 찰떡을 먹다 메떡을 떼어먹습니다. 이 떡을 만든 정성과 사랑을 생각하면 떡고물 하나 버리기가 아깝습니다.
▲ '아니, 네가 고사떡 맛을 알아!' 허참, 내. ⓒ 윤희경
대문 밖 강아지 짖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오늘 저녁에도 어느 이웃집에서 또 고사를 막 끝내고 떡 심부름을 왔나 봅니다. 날씨는 춥지만 고사 떡이 피어오르는 시월 상달의 시골풍습이 따사롭기만 합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북한강 이야기'를 찾아오시면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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