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 차라리 나를 찍겠다"
[르포] 대선 D-13, BBK 수사발표와 단일화 그리고 서울민심
"BBK 검찰 수사발표를 보고 화가 나서 나왔어요. 무수한 의혹들이 한순간에 모두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나다니 참 황당해요. 법의 자의적 적용에 분노를 느낍니다."
영하 6도의 쌀쌀한 겨울날씨. 서울 종로 광교에서 만난 한 대학원생의 말이다. 5일 오전 11시 검찰이 BBK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무혐의 결정을 내리자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했다. 검찰의 수사결과를 현실로 믿기 어렵다는 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이 주요 포털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서울 길거리 민심은 어떨까.
순대국 한 사발에 민심을 말다
5일 오후 6시, 기자는 순대국 한 사발을 들이키고 퇴근길 민심탐방에 나섰다.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통합신당 정동영 후보측이 연 '검찰규탄' 집회를 시작으로 교보빌딩 앞 이회창캠프 집회, 종로 보신각 앞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집회, 문국현 후보의 명동성당 촛불집회까지 현장을 직접 돌아다녔다.
"아으 시끄러."
"웃겨 진짜. 왜 민주주의를 팔고 그래."
"잘 모르겠습니다."
"업무에 방해돼요. 선거유세를 좀 조용히 할 방법 없겠습니까."
"약속이 있어서…."
"바빠서, 죄송합니다."
"저기요, 저 '도'를 안 믿거든요!"
서울 광화문사거리에서 종로방향으로 거리를 걷던 시민들에게 '검찰 BBK수사결과 발표'와 '선거유세로 연결된 검찰규탄집회'에 대한 의견을 묻자 나온 반응들이다. 더 많은 시민들의 팔을 붙들고 질문을 던졌지만 대개는 목도리를 친친 감고 눈을 아래로 내리깐 다음 뭘 물어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시민들에게 기자는 귀찮은 존재 같았다.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일대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정동영 지지자'들로 보였다. 검찰의 수사발표가 '기가 막혀' 퇴근길 광화문으로 집결한 '일반시민'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대부분 조직된 사람들로 보였다.
연단 앞쪽에는 국회의원들이 '탄핵' 때와 같은 비장한 표정으로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었지만 뒷쪽 지지자들은 추위를 달래느라 오뎅을 먹기에 바빴다. 정동영 선거대책본부에서 공동전략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는 박선숙 전 환경부 차관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일반시민들이 다니는 통로에 서서 여러 정치권 인사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왜 핵심에서 멀어져 있냐는 질문에 웃으며 그가 한 말이다.
"멀리 있어야 잘 보입니다."
긴말 않고 딴 사람과 말을 하는 사이에 둘러보니 노혜경 노사모 전 대표가 보였다. 노 전 대표는 역시 비장했다.
"국민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한 수사결과 발표 아닌가요? 오늘(5일) 검찰의 발표를 보면 '의혹은 있으나 밝힐 수 없다'는 식이에요. 검찰이 미래의 권력과 완벽하게 손잡은 셈이지요. 법치와 상식은커녕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도 된다는 소리인지."
노 전 대표는 격해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음'을 고백했다. 노 전 대표는 "검찰의 발표가 무섭게 느껴졌다"며 "아마도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표의 말을 듣고 동화면세점 쪽을 빠져나와 교보빌딩 앞에서 열린 이회창캠프측의 '검찰규탄 집회'를 봤다. 100여명의 지지자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가수 김수철의 '젊은그대'를 틀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 몇몇 지지자들은 "국민 여망 무시하는 정치검사 자폭하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회창캠프가 벌린 판에도 '일반시민'들은 없어보였다. 대다수 조직된 선거운동원들이 줄을 맞춰 서서 구호와 노래를 부르는 분위기였으므로.
노혜경 전 노사모 대표 "나는 검찰의 발표가 무섭다"
▲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가 5일 광화문에서 열린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의 무혐의 검찰수사 발표에 대한 규탄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두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유성호
교보빌딩을 뒤로 하고 종로사거리로 돌아나오는 길에 시민들의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저마다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 '내 소리를 들으라'고 악을 쓰고 있었지만, 정작 시민들은 정치인들의 유세를 '소음'으로 취급했다.
"요즘 회사에서도 정치얘기 안 해요. 대선에 관심 없는 분위기던데. 딱히 찍고 싶은 사람이 없잖아요. 시간이 돼서 점심밥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딱히 당기는 게 없는 때와 같은 심정 아닐까요. 확 당기는 게 없어 굶는 사람도 있고, 동료들이 추천하는 메뉴를 따라 먹는 사람도 있고, 개중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 선택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이번 대선이 딱 그 형세 아닐까 싶은데요."
서른여덟의 남성 직장인은 2007년 대선을 앞둔 30대 직장인들의 심정이 자기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곧잘 이런 농담도 한다고 했다.
"투표용지에 마지막 한 표를 자기에게 줄 수 있는 칸이 있다면 나를 찍겠다! 하하."
그는 길거리 캐럴에 자기 말을 섞어 한껏 웃었지만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또 다른 30대 초반 남성 직장인들이 종로사거리에서 삼성종로타워 방향으로 길을 건널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달려가 물었다.
"혐의 벗었으면 된 거 아니에요? 이젠 좀 조용해지겠지요. 세상 시끄러웠는데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로 조용하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발 집회 좀 안했으면 좋겠어요. TV토론을 하거나, 인터넷 논쟁을 하면 되지, 굳이 날도 추운데 시끄럽게 집회할 필요 없잖아요?"
올해 서른둘의 깡마른 남자가 말을 하자 곁에 있던 서른하나의 같은 직장 동료가 말을 거들었다. 본인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진실을 모르겠어요. 검찰의 수사결과는 만족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믿기로 했어요. 왜인줄 아세요? 그런 것도 믿지 못하게 되면 차라리 이민 가야 하잖아요. 대선기간의 유세는 당연한 거고, 검찰규탄을 각각의 선거에도 활용할 수 있는 거라고 봐요. 그게 정치죠 뭐. 민폐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닌가요?"
두 남자는 동대문 일대의 훌륭한 곱창요리 집을 찾아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날씨가 추울 때는 소주에 곱창이 최고라는 거였다. 정치를 안주 삼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 직장 내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게 먼저라는 것이었다.
동대문 곱창집으로 가는 두 남자의 서로 다른 시선
▲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지지자들이 5일 저녁 서울 보신각앞에서 열린 '부패정치청산을 위한 범국민촛불문화제'에서 부패정치와 비리후보 사퇴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종로사거리 삼성종로타워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문 한 남성이 있었다. 올해 서른넷의 박정민씨다. 그는 검찰의 BBK 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검찰이 정치권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며 "벌써 차기정권 하에서 줄서기에 들어간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검찰은 계속 여론의 눈치를 보면서 이명박 후보에게 책임지우는 것은 회피해오지 않았냐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부도덕해 보이는 후보가 인기 상종가를 누리는 것은 아마도 '썩은 과일 중 그나마 먹을만한 것을 골라먹는 심리' 아니겠냐"며 "정치인 가운데 깨끗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고 되물었다.
역으로 "이명박 후보의 네거티브 광고전이 성과를 거둔 것 아니냐"며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이 후보가 앞서나가 돌팔매를 당한 것"이라고 나름 진지한 분석을 내놨다.
서울 광교에서 만난 두 명의 여성 취업 준비생은 "우리는 지금 검찰규탄집회에 참석하러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검찰의 BBK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고, 많은 의혹이 제기됐음에도 '혐의 없음' 결론을 내린 것을 국민들에게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검찰의 굴욕'이라고 역설했다.
김민경(26)·김민지(27)씨는 "대선 투표일까지 검찰의 잘못된 조사결과를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져야 한다"며 "국민들은 시원한 답을 들을 때까지 검찰에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BBK 조사결과를 선거운동에 활용하는 것은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검찰수사결과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언론이 그걸 받아쓰고, 그래야 또 국민들이 그 언론을 통해 문제점이 뭔지 알 수 있으니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이 문제점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김민지씨의 말이다. 올해 스물일곱의 대학원생 이현정(가명)씨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검찰의 수사결과가 기막혀 집회를 전전하고 있었다.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통합신당 정동영 후보 지지자들이 벌인 '검찰규탄집회'를 시작으로, 종로 보신각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측의 집회,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지지자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연 촛불집회까지 돌아보았다.
취업준비생들의 이유있는 검찰 비판
▲ 이회창 무소속 대선후보 지지자들이 5일 저녁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앞에서 검찰의 BBK의혹 수사결과 발표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그러나 이씨가 허리를 굽히고 앉아서 함께 참여할 공간은 없었다. 검찰규탄집회는 선거 유세장이 돼 있었고 특정후보들이 '네가티브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판에 선뜻 발을 내밀기가 어려웠던 터다.
"후보자 난립현상도 좋게 안 보이지만 그렇다고 이념과 가치관을 초월해 '묻지마 단일화'를 하는 것도 시민 시각에서는 좋게 안 보입니다. 제대로 된 선거라면 정책선거를 해야 하는데 올 대선은 대표적인 '정책실종선거'로 기록될 것 같아요. '진실공방'만 하다 끝난 선거…. 네거티브전략만 난무해서 정치혐오를 더 갖게 하는 선거 말입니다."
이씨는 후보자들이 난립해 결국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지지율이 낮은 대통령이 당선될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올해 서른둘의 박승훈씨는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문국현 후보 지지자들의 검찰규탄 촛불집회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 역시 검찰수사 결과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고 집회장을 찾았지만 선뜻 다가가기에는 벽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검찰수사를 규탄하는 집회인지, 후보지지 선거운동인지 구별이 안 돼 보고 있는 거예요. 선거운동겸 검찰규탄집회이겠지요. 그런데 지나친 네거티브전략을 써서 선뜻 어느 후보에게도 마음이 안 끌리네요. 정책적 차별성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저는 지금 망설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어요."
대선을 14일 앞둔 시점에 터진 검찰의 BBK 수사결과 발표. <문화일보>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BBK 사건 수사결과에 대해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응답이 56.9%이며 '믿음이 간다'는 응답은 35.9%다. 검찰수사를 믿을 수 없다는 응답은 30대(74.7%), 대학재학 이상(62.8%), 학생(74.4%), 대통합민주신당(82.1%)에서 높았고, 믿을 수 있다는 여론은 중졸 이하(46.6%), 한나라당 지지층(59.7%) 등에서 높게 조사됐다.
검찰의 조사결과 여부를 축으로 대선 지지후보를 바꾸는 사람들이 있을까. 각 캠프별로 정치인들은 '검찰의 BBK 수사결과 발표'를 정치공세의 장으로 삼으며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부심하고 있지만 국민들이 딱히 마음 둘 곳은 없어보였다. 신뢰가 무너진 정치허무시대, 냉소와 무관심 속에서 대한민국 희망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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