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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가는 데도 도가 있고 수준이 있다

'더아모의집' 연탄 갈기에서 묻어나는 사랑의 도

등록|2007.12.10 08:26 수정|2007.12.10 08:26
‘까짓 연탄쯤이야 대충 갈아도 되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연탄가는 데도 분명 도가 있고 수준의 차이가 있다. 우리 집만 해도 연탄불을 가는 사람이 네 명이다. 나와 아내, 딸(중1), 아들(초1) 등이다. 이들의 수준은 아들 1단, 딸 2단, 아내 3단, 본인은 5단 쯤 된다는 것은 우리 가족 모두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연탄1꺼져가는 연탄. 이 정도가 되면 과감하게 연탄불을 버려야지 살려보겠다고 애쓰면 시간만 낭비하고 방은 따뜻해지지 않는다. 결국에 가서 불도 못 살린다. ⓒ 송상호


철없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연탄 갈라고 시켜서 억지로 갈 때는 정말 몰랐던, 솔직히 귀찮았던 ‘연탄 갈기’에도 나름대로 길이 있다는 걸 안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연탄을 갈아본 경험 때문이다.

우선 연탄을 자주 갈고 연탄불을 자주 봐주어야 방이 따뜻해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냥 생각하면 자주 가는 것보다 오래 동안 지긋이 두어야 방이 따뜻할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연탄은 갈고 놓아두면 저절로 잘 타는 게 아니다. 연탄이 아래에서부터 모두 3장이기 때문에 밑불에서 위 불로 넘어가면서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밑불은 괜찮았지만, 위 불로 옮겨 가면서 불이 시들시들 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 있는 연탄이 아직 덜 말라서 그럴 수도 있고, 공기 공급에 문제가 있어서도 그럴 수 있다. 한 번 갈고 그냥 믿고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 그냥 놔두면 불이 설령 꺼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불이 시원찮게 타고 올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의 동정은 자주 봐 주어야 한다. 꼭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도와 상통하는 것이다. “연탄은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제대로 피어간다”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냥 필 수는 있어도 주인의 부지런함이 있어야 따뜻하게 피울 수 있다.

연탄 갈기의 정수는 뭐니 뭐니 해도 연탄구멍 맞추기다. 아래 연탄으로부터 위 연탄까지 석 장의 불구멍을 다 맞추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어려움이 있다. 불구멍을 쳐다보고 집중을 하다보면 연탄불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로 확 밀려들어오기도 한다. 연탄 2개의 구멍을 맞추기도 쉽지 않은 데 3개까지는 더 어려운 법이다. 그래도 많이 갈다보면 어떤 때는 한 번에 턱 맞추어 질 때도 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감의 문제다.

그걸 보고 일간에는 ‘달인’이라고 하던가. ‘연탄 갈기의 달인’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달인’이라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달인’ 밑 수준 까지는 갔나보다. 하여튼 불구멍을 잘 맞추는 것이 연탄 갈기의 기본 중에 기본인 것은 분명하다. 불구멍만 잘 맞춰도 연탄이 잘 타는 것의 70% 정도의 확률을 보장 받는 셈이다.

연탄 갈기의 때를 언제쯤 할 것인가도 관건이다. 우리 집은 지금 ‘3구 3탄’짜리 연탄보일러를 사용한다. 그러니까 한 번에 모두 9장이 들어가는 연탄보일러다. 그래서 하루에 세 번(아침에 1번, 저녁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이 공식적인 연탄 불 보기 시간이다.

그렇다고 이 공식이 늘 적용되는 게 아니다. 연탄불의 상황은 늘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잠시 언급했지만, 연탄의 건조 상태와 공기(산소공급)의 출입의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가급적이면 세 번 이상 봐주어야 한다.

이렇게 봐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문 조절이다. 이것도 연탄 불보기의 정수다. 불이 약하다고 해서 불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살아날 거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불이 약할 때 활짝 열어놓으면 제대로 살지 않고 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니까 불이 약하면 불문을 많이 열고 불이 세면 불문을 적게 열어 놓아야 한다는 틀에 박힌 공식이 통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역시 불을 가는 사람의 통찰력과 감이라는 이야기다.

연탄 2이 정도의 연탄불이라면 양호하다. 불문만 잘 조절하고 불구멍만 맞춘다면 탄탄대로가 예상된다. ⓒ 송상호

 
연탄을 갈 때는 세 구멍의 불을 모두 빼내어 상태를 보아야 한다. 어느 불이 제일 좋은지, 어느 불이 상태가 제일 나쁜지 등을 판단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불을 이 구멍에서 저 구멍으로 옮겨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각 구멍마다 연탄이 잘 타고 못 타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연탄 밑불이 살아 있어도 과감하게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걸 아깝다고 밑불로 사용하면 연탄불이 꺼질 때도 있다. 사실 나의 아내가 밑불이 아깝다고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떨다가 불을 꺼뜨린 적도 있다. 어중간한 밑불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지금 현재 연탄을 갈고 있는 사람의 몫이다.

때로는 세 구멍의 연탄 불 중 가망 없는 연탄 불구멍은 버리고 가망 있는 연탄불을 선택해서 살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세 구멍 중 한 구멍은 죽이고 나머지 두 구멍을 살려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두 구멍의 연탄을 제대로 살려낸 다음 그 밑불을 다시 꺼져 있는 구멍의 밑불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공식적인 연탄불 보기 횟수를 넘기기가 일쑤다.

어떤 때는 세 구멍의 불이 너무 잘 타올라서 방이 뜨끈뜨끈하면 그 불을 조절해야 한다. 두 구멍의 불은 살려두더라도 한 구멍의 불은 타서 꺼질 때까지 일부러 갈지 않을 때도 있다. 아니면 두 구멍의 밑불을 한 구멍으로 옮겨 탈 때까지 놓아두는 때도 있다. 그래야 전체적으로 방의 온도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불이 실컷 타고 나면 그제야 방의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서 적정 온도가 된다. 방의 온도가 너무 뜨끈하면 밤에 잠을 설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름을 때면 엄두도 못 낼 온도를 연탄을 때기 때문에 누려보기는 하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잠을 설친다는 것이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이렇듯 연탄불을 갈고 때는 데는 공식이 하나도 없다. 정해진 온도도 없다. 정확한 횟수도 없다. 전적으로 가는 사람의 감각과 관심에 달려 있다. 합리적인 사고와 수치의 정확성의 논리에 비추어 봤을 때 어쩌면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설명할 수 없는 그 감각이 연탄불을 제대로 때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연탄 가는 것의 수준 차이는 역시 많이 갈아보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우리 집에서 연탄불을 제일 많이 갈고 보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단수도 높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연탄 갈기의 도는 관심의 도이며 사랑의 도라 할 것이다.

내가 수고해서 가족을 따스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랑이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연탄불에 관심을 가지고 가게 될 테니까 말이다. ‘사랑의 수고’, 그것은 해본 사람만이 그 기쁨을 안다. 그렇다고 내가 가족을 제일 사랑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다른 가족보다 연탄불을 볼 시간이 많이 나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이런 기쁨과 행복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기름보일러나 기타 보일러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이지 않겠는가. 단지 연탄 잘 가는 것 하나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이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말이다.    

“아빠, 따뜻해서 좋아요. 여보, 따뜻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덧붙이는 글 ‘더아모(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집은 경기 안성 금광면 장죽리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홈페이지는 http://cafe.daum.net/duamo 이며, 본인은 이곳의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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