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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면자본 꺾은 '호주의 영웅' 떠나다

[해외리포트] 버니 벤톤 영결식... 호주정부, 국장으로 예우

등록|2007.12.10 11:40 수정|2007.12.10 17:42

▲ 석면 피해자 피해보상 시위에 참여한 밴톤. 뒤에 그레그 콤베트 노동조합 사무총장이 보인다. ⓒ 채널9 화면 갈무리


목사의 아들 4형제가 시드니에 있는 석면제조공장에서 일하다가 세 명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 그 중 두 명이 세상을 떠났고, 한 명은 아직도 투병 중이다.

4형제 중 둘째인 버니 밴톤(1946~2007)은 지난 20여 년 동안 자연의 공기로 숨 쉬지 못하고 산소통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숨을 쉬었다. 3개월 전에는 중피종 암까지 발병, 11월 27일 끝내 그 숨을 놓고 말았다.

호주 정부는 이례적으로 그의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예우했고, 캐빈 러드 총리는 그를 '호주의 영웅'으로 부르면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쳐주면서 노동계층이 대우받는 세상을 꿈꾸었던 동지의 헌신적인 생애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추도했다. 

한평생 노동자로 살았던 버니 밴톤의 생애가 궁금해 그의 장례식을 취재했다. 한국에서도 지난 4일, 석면에 노출돼 숨진 노동자의 유가족이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받아들인 한국 최초의 판결이 나오지 않았는가.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세계 굴지의 기업

12월 5일 오전, 시드니올림픽경기장에서 국장으로 엄수된 버니 밴톤의 장례식에는 최근 취임한 캐빈 러드 총리와 브란덴 넬슨 제1야당 당수, 모리스 예마 NSW주 총리 등 많은 국가 지도자들이 참석해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다. 무엇보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영결을 슬퍼했다.

장례식 안내 팸플릿을 읽어보니, 파라마타시는 그가 어린 시절에 낚시를 즐겼던 다리에 '버니 밴톤'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고, 죽기 직전까지 치료받았던 시드니 콩코드병원의 한 병동에도 그의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 에이서 아레나 스타디움으로 모여드는 조문객들. ⓒ 윤여문



▲ 아버지의 관을 멘 밴톤의 아들과 뒤를 따르는 러드 총리. ⓒ 윤여문


시드니 서부에 있는 파라마타시는 버니 밴톤의 고향이다. 앨버트 밴톤 목사 부부의 4남 1녀 중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버니 밴톤은 1968년부터 1974년까지 6년 동안 세계굴지의 건축자재 제조회사인 '제임스 하디 그룹'의 석면제조공장에서 근무했다.

그가 생전에 남긴 증언에 의하면, 당시 제임스 하디 공장의 여건은 최악이었다고 한다. 석면가루가 가득한 생산라인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하루 8시간씩 2교대로 근무했던 당시의 노동자 137명 중 10여 명만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정도다.

밴톤 가문의 막내 브루스 밴톤도 생존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형들과 거의 같은 기간에 똑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했지만 기적같이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대를 잇기 위해 나중에 목사가 된 그는 5일 거행된 형의 장례식을 직접 인도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휠체어에 앉아서 눈물을 훔쳐내던 셋째 브라이언 밴톤은 "왜 마스크조차 쓰지 않고 일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석면가루가 그렇게 치명적인 줄 몰랐고, 회사에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거대기업 제임스 하디의 도덕불감증

제임스 하디 그룹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세계랭킹 상위에 들어갈 정도로 규모가 큰 석면제조업체였다. 호주 국내공급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 엄청난 양을 수출해 세계 굴지의 건축자재제조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석면이 인체에 해롭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1987년에 생산을 중단했다.

하지만 생산라인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시름시름 앓으면서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호주노동조합(ACTU)이 피해보상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1990년대 말쯤이었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사전준비를 꼼꼼하게 해온 제임스 하디 그룹과 마주앉은 노동조합의 협상 노력은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약속을 파기하기 일쑤였고 거짓으로 일관했다.

그 당시 호주노조 사무총장이었던 그레그 콤베트(2007년에 하원의원으로 당선)는 "마치 절벽 앞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버니 밴톤이 나타난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콤베트는 추도사를 통해서 "버니는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열정에 넘쳤고 적재적소에서 꼭 필요한 역할을 맡아주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면서 "그가 없었다면 아직도 수많은 석면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한평생 노동자로 살았던 버니 밴톤이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주었다"고 회고하면서 목이 메었다.

석면 피해보상금 3조 2천억원

협상의 고비는 2003과 2004년이었다. 협상이 불리하게 진행되고 여론마저 나빠지자 제임스 하디 그룹은 본사를 유럽으로 옮겨버렸다. 노동자들은 거리로 뛰쳐나갔고 그 선봉에는 항상 버니 밴톤이 있었다.

버니 밴톤은 2000년에 80만 호주달러의 피해보상을 받은 상태였다. 더구나 의사들로부터 건강상태가 나쁘니 활동을 중단하라는 강력한 권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자신의 건강보다 동료들의 피해보상이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

▲ 집회에 참석해서 연설 중인 버니 밴톤. ⓒ



마침내 2004년 12월 제임스 하디 그룹은 석면피해자 보상을 위해 총 40억 호주달러(3조2천억 원)의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결정했다. 향후 40년 동안, 이미 발병한 사람들과 향후에 발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보상을 하겠다는 약속으로 호주역사상 가장 많은 보상 액수였다.

제임스 하디 회장과 마주앉아서 보상결정 소식을 접한 버니 밴톤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내 산소통에는 산소가 20%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재치 있게 말해서 호주국민들을 감동시킨 바 있다.

▲ 산소통을 들고 다녔던 버니 밴톤. ⓒ <데일리텔레그래프>



▲ 병상의 버니 밴톤. ⓒ abc-TV 화면 갈무리


약속을 어기는 CEO들과 결단을 내린 주주들

그러나 감동도 잠시 뿐, 제임스 하디의 CEO들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상대로 재협상을 요구하면서 보상결정 취소의 위협까지 가했다. 버니 밴톤은 분노했고, 피해보상 관련 스캔들을 일으킨 회장을 감옥에 보내기 위해 소송을 걸 생각까지 했다.

그는 2005년 10월 호주의 권위 있는 인권상을 수상하면서 "협상타결 후 열 달이 지나도록 단 한 푼도 피해보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제임스 하디 그룹의 부도덕성에 비애를 느낀다"면서 "나는 그들이 감옥에 들어가도 개의치 않겠다"고 말했다.

회사 측에서 노린 것은 보상금으로 세금공제를 받겠다는 꿍꿍이였는데, 뜻밖에도 그런 회사의 불순한 의도를 일축하고 조건 없는 보상 쪽으로 가닥을 잡게 만든 게 주주들이었다. 2007년 2월 제임스 하디 그룹의 주주 약 60%가 참석한 회의에서 99%의 찬성으로 수년 동안 이어진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버린 것.

버니 밴톤의 여동생 그레이스는 추도사를 통해 오빠가 남긴 다음과 같은 비화를 털어놓았다. "선한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으면 악마가 승리한다(When good men do nothing, evil triumphs)는 경구를 믿는다, 그날의 결정도 회사가 아닌 선한 사람들의 결단(Companies did not make decisions; people do)이었다."

러드 총리 당선 연설 도중 "동지에게 절 올립니다"

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일까? 버니 밴톤은 2007년 9월 석면 관련 중피종 암(asbestos-related cancer mesothelioma)이 발병했다는 진단을 받는다. 3개월의 시한부 생명이었다.

그러나 버니 밴톤은 그에 굴하지 않고 2007 호주총선의 선거운동에 나섰다. 일방적으로 사용자에게 유리한 노사관계법(Work Choices)을 만든 존 하워드 정부를 심판하고, 석면피해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한 호주노동조합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노조간부들 몇 명이 총선에 출마했던 것.

그는 죽기 한 달 전, 문병차 병원으로 찾아온 캐빈 러드 노동당 당수를 만나서 "당신의 승리를 믿는다, 노동당이 집권해면 노동조합이 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 달라, 자본가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이 험난한 시대에 힘없는 노동자들한테는 노조의 도움이 결정적인 힘이 된다"면서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래서였을까? 캐빈 러드는 총선 승리연설을 하는 도중에 "동지(mate), 이 기쁨의 순간에 결코 당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숭고한 존엄성을 일깨워준 당신에게 절을 올립니다(I salute you)"라고 말했다. 버니 밴톤은 그 연설을 들은 다음날 세상을 하직했다.

캐빈 러드 총리는 호주국민을 대표한 추도사를 통해서 "버니 밴톤은 영웅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의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진정한 영웅이었다"는 찬사를 바쳤다. 추도사를 마친 러드 총리가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 관 위에는 공룡기업 제임스 하디 그룹을 KO시킨 복서 버니 밴톤의 그림이 놓여 있었다.

▲ 추도사를 하는 캐빈 러드 총리. 관 위에 제임스 하디 그룹을 KO시킨 밴톤의 만화가 놓여있다. ⓒ 채널9 화면 갈무리


"죽는 날, 악질적인 CEO들을 용서했다"

버니 밴톤은 장장 6년에 걸친 석면피해 노동자 피해보상투쟁을 통해 석면의 위험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피해보상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만든 호주의 영웅이었다. 또한 기업의 도덕적 책임에 관한 헌장을 분명하게 써놓고 갔다. 호주가 그를 국장으로 예우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날의 국장을 결정한 모리스 예마 NSW주 총리는 추도사를 하는 도중 "호주의 주장(州葬, state funeral)은 호주에서 거행하는 최상위급 장례로, 국장(國葬)을 주 정부가 대신 하는 것"이라면서 "장례식을 올림픽경기장이었던 에이서 아레나 스타디움에서 거행하는 것은 교회의 크기로는 버니 밴톤의 장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편 밴톤 가문의 셋째인 브라이언은 추도사 도중에 "버니가 죽는 날 가족들을 불러모아놓고 주 기도문 중에서 '우리가 우리에 죄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저를 용서하시고'라는 대목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나를 수없이 배반한 악질적인 CEO들을 용서했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

동생 브라이언의 추도사에 이어 무대에 등장한 손녀딸 캐일라는 '나에겐 꿈이 있어요(I have a dream)'라는 제목의 자작시를 낭송했다. 그 중에서 '나에겐 꿈이 있어요 / 언젠가 제임스 하디 그룹의 노동자 자녀들과 그룹오너 자녀들이 함께 국회의사당으로 가서 / 형제애가 넘치는 테이블에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는 꿈'이라는 대목은 기자의 귀에는 할아버지의 용서와 똑같은 의미로 들렸다.

▲ 운구행렬을 따라가는 유족들. ⓒ 윤여문


"친구, 부디 잘 가시오"

12월 6일자 <시드니모닝헤럴드>는 "마치 가족장 같은 국장이었다(State funeral felt like a family service)"고 보도했다. 그러나 장례식 현장을 직접 취재한 기자의 느낌으로는 가족장도 국장도 아닌 노동자장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건설현장의 헬멧을 쓰고 작업화를 신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꽃 한 송이씩 들고 참석했기 때문이다. 추도사 도중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숙연하게 진행된 장례식은 버니 밴톤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가 시드니올림픽광장을 떠날 때는 축제 현장으로 바뀌었다.

▲ 꽃 한 송이씩 들고 서있는 노동자들. ⓒ 윤여문


유일한 외신이라는 이유로 총리공보실의 배려를 받아 캐빈 러드 총리 바로 곁에서 취재한 기자는 러드 총리와 노동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한 노동자가 말했다. "캐빈,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노동당도 승리했고 버니도 승리했으니 힘차게 승리의 구호를 외칩시다."

숙연한 표정으로 영구차 행렬을 떠나보내던 러드 총리가 조용하게 박수를 쳤고, 노동자들은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친 다음 "버니, 잘 가시오(Good on you, Birnie)"라고 말했다. 한편 <데일리텔레그래프> 게리 린넬 편집자는 12월 6일자 기사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영구차 행렬이 떠나가는 동안 러드 총리와 우리들은 비가 내리는 시드니올림픽광장에 서있었다. 그러나 버니, 당신이 떠나가는 곳에 불꽃은 없었다. 우리가 그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약속했으니…."

▲ 영결식장을 떠나는 버니 밴톤 유해에 박수를 보내는 러드 총리. ⓒ 윤여문



▲ "버니, 잘 가시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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