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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우울증 달래줄 행복한 맥주, '트라피스트'

[제국에서 띄운 편지 ⑨] 신의 가호를 느끼게 해주는 트라피스트 맥주

등록|2007.12.12 18:13 수정|2007.12.14 10:18
"맥주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는 증거이다." (벤자민 프랭클린)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는데 여러 가지로 우울한 뉴스만 나와서 답답해하고 계시는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패 스캔들과 빤한 연설과 지겨운 광고에 지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산뜻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일단 다음 퀴즈를 풀어보세요.

문제 1. 가·나·다 중 가장 호감이 가는 사진을 골라보세요.
문제 2. 가·나·다 중 가장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친구를 골라보세요.
문제 3. 가·나·다 중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상대를 골라보세요.

▲ 왼쪽이 '가'번, 오른쪽이 '나'번이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다'번. ⓒ 데니스 하트



앞의 세 문제 중에 어느 하나라도 '가' 또는 '나'를 선택하신 분들은 더 이상 이 기사를 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얼른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시고, 이 사이트 대문에 걸려있는 대선 관련 기사들을 읽으십시오. '다'를 선택하신 분들은 계속 읽어주세요. 맛있는 맥주 사진과 맥주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사진 '다'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만든 맥주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입니다. 그러나 이건 철든 후의 이야기이고, 가난한 대학생 시절에는 그저 마시면 취하는 효과밖에 없고 아무 가게에서나 쉽게 살 수 있는 싸구려 맥주를 마셨지요. (한국에서 살았다면 막걸리를 마셨겠지만 그 때는 물론 막걸리를 구할 수 없는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미국산 주류 맥주가 얼음과 탄산 범벅인 이유

살다 보니 맥주의 맛과 품질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미국산 맥주는 독일인 친구의 말을 빌면 "맥주라고 도저히 불러줄 수가 없는", 철제 용기에 너도밤나무 조각을 넣어서 만들어낸 밍밍하고 인공적인 냄새가 나는 열악한 알코올 음료입니다.

미국산 맥주 중에도 맛있는 것이 있고 특히 최근에는 새로운 우수한 브랜드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이들은 주로 틈새시장을 상대로 하는 조그만 생산업체들이고 대기업에서 만든 주류 맥주와는 구별됩니다.

미국산 주류(mainstream) 맥주가 이렇게 맛이 없는 까닭은 뭘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저는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미국 서민층의 기호가 큰 이유라고 봅니다. 적은 양의 맛있는 맥주보다 싸고 용량이 큰 맥주를 선호한다는 뜻입니다.

순하고 밍밍한 음식을 좋아하는 보통 미국인의 입맛에 잘 맞고 제조비용과 시간이 적게 드는 맥주는 '페일 라거(색깔 연한 라거)'입니다. 페일 라거는 버드와이저·밀러·쿠어스 등 대기업에서 제조하는 가장 흔한 맥주입니다. 게다가 이조차도 더 묽게 만든 '라이트'를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 주류 맥주는 거품이 너무 많고 좋은 재료를 쓰는 데 인색하며 숙성과정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대기업 맥주 공장에서 숙성에 들이는 시간은 일주일 이하라고 합니다. 미국인 소비자들은 이를 '신선한' 맥주라고 하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싸구려' 맥주라 합니다.

이렇게 맥주가 맛이 없이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맥주를 얼음처럼 차게 마시는 것입니다. 온도가 아주 낮아야 물에 물탄 듯한 싱겁고 아무 맛도 없는 맥주가 겨우 마실 만하게 됩니다. 게다가 대량생산 업체들은 탄산을 잔뜩 넣으면 싸구려 재료의 좋지 못한 뒷맛을 덮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맥주를 마시면 결과적으로 화장실을 계속 들락거리며 트림을 연발하게 됩니다.

▲ 미국의 주류맥주인 버드와이저와 밀러. 밍밍한 맛이기 때문에 차고 탄산이 많다. ⓒ 버드와이저·밀러 홈페이지


제가 좋은 맥주에 맛을 들이게 된 것은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세계 각국의 여러 맥주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또 직장이 생겨 학생시절의 가난을 면하면서 맛있는 맥주를 사먹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맛있는 외국 맥주로 제가 마셔본 것은 네덜란드의 '하이네켄', 영국의 '배스', 일본의 '삿포로', 아일랜드의 '기네스', 한국의 '하이트' 등이 있습니다.

특히 '기네스'는 제가 오랫동안 즐겨 마신 맥주로 우리 조부모님이 아일랜드에서 이민 오셨기 때문에 더욱 친밀감을 느낍니다. 제빵 기술자이자 열성 노조원이었던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기네스를 마시는 것을 본 기억이 없기에(아마 당시에는 미국에서 기네스를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몫까지 충분히 마셔드렸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만들어진 맥주, 캬~

근년에 유기농 슈퍼마켓에서 벨기에의 트라피스트 수사들이 만든 맥주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에서 만드는 맥주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에 시음을 해보았는데 한입에 반했습니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맨 위의 퀴즈 사진 '가'번과 '나'번보다 생긴 것도 수려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가'와 '나'가 헤어나지 못하는 시장과 자본주의 논리를 벗어난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입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만드는 모든 맥주는 수도원의 운영과 수도회의 자선사업을 위해서만 판매합니다.

물론 맥주 제조와 판매 자체가 이윤을 남기는 사업이기는 하나, 이윤 창출만을 목적으로 하는 타 기업과는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맥주를 만드는 수사들은 비용 절감이나 재료 아끼기, 숙성시간 단축, 대량 생산, 판매 촉진 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수사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사는 것이 삶의 근본적인 목표이고, 맥주를 만들어도 맛있게 만들어 수도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 마시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이기에 외부 판매는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 베스트블레테렌 트라피스트 맥주. ⓒ 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벨기에의 베스트블레테렌(Westvleteren) 수도원은 딱 수도원을 운영할 만큼만 외부에 맥주를 판매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주문 수요가 아무리 많더라도, 돈을 얼마든지 더 준다고 하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 수도원은 2차 대전 이후로는 도매상에게 맥주를 팔지 않으며, 양조장이나 수도원 맞은편의 전시장으로 찾아오는 개인 소비자에게만 조금씩 판다고 합니다.

원래는 자동차 한 대당 24병들이 열 상자씩 팔았지만 맥주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올라가자 다섯 상자로 줄였고, 사간 맥주에 웃돈을 붙여서 되파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을 알고는 2006년 9월 이후로는 차량 번호판 하나당 한 상자만 판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은 현대적인 비즈니스 방식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애봇 신부님은 "우리는 양조업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수사들입니다, 우리는 수사로 계속 남을 수 있기 위하여 맥주를 만드는 것뿐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가톨릭 봉쇄수도원 중에서도 가장 세상과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고 청빈과 금욕을 엄격하게 지키는 수도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위로를 부정하는 수도사들이 만든 맥주라니 끔찍하게 맛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직접 마셔본 사람들은 맥주를 만든 수사들처럼 하느님을 찬미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품 트라피스트 맥주를 만드는 수도원은 전 세계에서 여덟 곳(벨기에에 여섯, 네덜란드에 하나, 독일에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정품 트라피스트 맥주엔 육각형 로고가 찍혀있습니다. 상표에 "수도원" 같은 단어와 수사들의 그림 등이 들어있더라도 이 로고가 없으면 트라피스트 맥주가 아닙니다.

정품 트라피스트 맥주는 다음 세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①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담장 안에서 트라피스트회 수사들이 직접 만들거나 양조과정을 통제해야 한다.
② 양조장의 운영, 양조방법과 과정, 상업적인 측면은 반드시 수도 공동체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③ 양조장의 경제적 목적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자선사업에 두어야 하며 재정상의 이익을 목표로 할 수 없다.


시음기 "맥주는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는 증거였다"

▲ "안녕하세요. 저는 코코입니다." ⓒ 데니스 하트


트라피스트 맥주가 어떤 맛이기에 그렇게 광팬이 많은지 의아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맛있는 맥주라면 부드럽고 풍부한 거품(일명 맥주 머리, '헤드(head)'라고 하지요)이 떠야 하고, 색과 향과 맛(첫맛·중간 맛·뒷맛으로 나눕니다)이 모두 우수해야 합니다.

이 기사를 쓰기 위하여 트라피스트 맥주 네 가지를 하나씩 천천히 마시면서 비교해 보았습니다.

이 실험을 하면서 유능한 시음견인 우리 강아지 코코를 공동 심사위원으로 위촉했습니다. 시음은 제가 손가락으로 찍은 맥주를 코코가 핥아먹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우선 코코에게 기사의 맨 위에 있는 사진과 트라피스트 맥주 샘플 중에 어떤 것이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코코는 망설임 없이 즉시 맥주를 선택했습니다. (실은 코코는 위의 두 사람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아주 똑똑하지요?)

▲ 시메이 블루(Chimay Blue)

▲ 시메이 트라피스트 맥주 ⓒ


벨기에 스크루몽의 노트르담 수도원에서 만드는 가장 유명한 트라피스트 맥주 중 하나입니다. 약간 차갑게 해서 입구가 큰 둥근 잔으로 마시라고 되어있네요.

헤드 : 미세하고 풍부한 거품이 많이 생겼다가 곧 얇아지지만 계속 어느 정도 거품층을 유지함.
색깔 : 진한 초콜릿 색깔.
맛 : 거품 맛이 나고, 조금 쓴 중간맛이 나며, 약간 신맛이 남음. 아주 맛있는 맥주지만 그래도 맥주 맛이란 생각이 듦. 첫맛이 강해서 양념을 많이 쓰는 한국 음식과 잘 맞음.
안주로 추천할 만한 한국 음식 : 매운 떡볶이.
코코 반응 : 그런대로 맛있게 먹었으나 몇초 후 재채기.

▲ 로시포르 10(Rochefort 10)

▲ 로시포르 트라피스트 맥주. ⓒ

벨기에의 로시포르에 있는 수도원에서 만드는 세 가지 맥주 중 하나이며, 로시포르 10의 경우 알코올 함량이 11.3%로 보통 맥주보다 높습니다. 차갑게 하지 말고 실온에서 마시라고 합니다. 취향이나 날씨에 따라 조금 차갑게 해도 맛있습니다. 

헤드 : 폭신폭신한 두꺼운 거품이 생김.
색깔 : 진한 캐러멜 색.
맛 : 쓴맛이 없고 부드러운 과일 맛이 나며 약간 단맛이 배경에 깔린 듯한 느낌. 시메이보다 탁월한 맛이며 보통 맥주와는 아주 다른 맛이 남. 잡냄새가 없어 깨끗함.
한국음식과의 궁합 : 아주 좋은 편이지만, 양념이 강한 안주보다는 식사 반주로 더 잘 맞을 듯함. 매운 떡볶이보다는 궁중 떡볶이가 더 좋은 궁합.
코코 반응 : 아주 맛있게 싹싹 핥아먹고 한참 동안 그 뒷맛을 음미함.

▲ 베스트말레 트리펠(Westmalle Tripel)

▲ 베스트말레 트리펠 트라피스트 맥주. ⓒ

벨기에의 베스트말레에 있는 수도원에서 만드는 맥주입니다. 1836년에 양조장이 설립되었습니다. 로시포르와 마찬가지로 실온이나 그보다 좀 낮은 12도 정도까지 조금 차게 해서 마시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헤드 : 로시포르 10과 비슷한 헤드. 두껍고 풍부한 거품.
색깔 : 맑고 선명한 황금색.
맛: 드라이하고 쌉싸래하고 청량하며 상쾌한 맛.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 저녁에 집에 와서 한 잔 하면 쌓인 피로를 모두 날려줄 듯한 강한 기와 힘이 느껴짐. 과일 맛이 나지 않고 드라이한 고급 샴페인과 비슷한 맛이 남.
한국음식과의 궁합 : 대체로 우수. 반주로 적합.
코코 반응 : 시메이보다 맛있게 먹었지만 로시포르 10만큼 열정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음. 아주 한참 후에 재채기.

▲ 베스트말레 두벨 트라피스트 맥주. ⓒ 데니스 하트


▲ 베스트말레 두벨(Westmalle Dubbel)


헤드 : 부드럽고 두터운 거품.
색깔 : 붉은 빛이 도는 캐러멜 색.
맛 : 데이트하는 연인들에게 아주 잘 맞을 맥주. 부드러우면서도 소심하지 않으며, 우아하고 미묘한 맛.
한국음식과의 궁합 : 식사반주로 마시기에는 지나치게 섬세한 맥주로 떡·과일·식혜·한과 등의 후식과 잘 맞을 듯.
코코 반응 : 먹을 때는 맛있게 먹었으나 먹고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음. 몇 초 지난 후 재채기를 한 번 함.

결론적으로 제가 맛본 트라피스트 맥주들은 모두 하나같이 우수했고 소량 생산되는 디자이너 브랜드 맥주들보다도 탁월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베스트말레 두벨이 제일 좋았지만, '떡찰'과 달리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고 권력(주인) 앞에서 눈치보지 않는 코코는 저와 다른 의견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코코는 로시포르 10을 제일 좋아했고 다 마시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빈 병을 껴안고 있었답니다.

▲ "인생 뭐 있나…." 로시포르 10을 사랑하는 코코. ⓒ 데니스 하트


덧붙이는 글 사족 1 : 본문에서 말씀드린 실험을 진행하는 동안 우리 강아지 코코를 비롯하여 어떤 동물도 학대하지 않았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사족 2 : www.ratebeer.com에 가시면 세계 각국 맥주의 맛을 평가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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