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한 조각 현실에 사시나무 떨듯 도망치다

[천진난만하게JH, 산티아고 가는 길 21] 카스트로헤리츠에서 이테로 데 라 베가까지

등록|2007.12.13 15:26 수정|2007.12.13 16:36

이테로 델 카스티요순례길로부터 2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내가 본 것은 꿈일까? ⓒ JH


2007년 7월 8일 일요일, 날씨 구름-맑음, 순례 16일째.
카스트로헤리츠에서 이테로 델 카스티요를 돌아 이테로 데 라 베가까지,
직선거리 11km, 실거리 약 16km.
오전 8시 반 출발, 오후 12시 50분 도착.


길은 나를 차마 예측할 수도 없던 놀라움으로 데려다 주었다. 일주일간 잘 걸었으니 오늘 하루는 나에게 선물하는 휴식의 날. 마음은 여유를 부리자고 했지만 눈은 절로 새벽같이 떠진다. 플라스틱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어제 남은 밥과 반찬들을 아침으로 먹고 여덟 시쯤 숙소를 나섰다. 아침 미사를 하고 싶어서 동네 성당으로 갔다.

길바닥에 흩날리는 오색리본, 어제의 혼배, 축제의 흔적이 바람에 뒹굴고 있었다. 성당 앞 돌의자에 가방을 기대고 언제쯤 문이 열리나 기다리고 있었다. 30여 분을 그러고 앉아 있다가 미사 시간이 1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때까지 이 마을에 있을 수는 없었다.

길은 메마르고 따가웠다. 목적지를 떠올리며 열심히 걷던 중 벤치가 놓인 작은 쉼터에 앉아 책을 읽는 순례자가 눈에 들어왔다. 부지런히 걸어가 인사를 나누고 오늘 도착할 곳의 정보를 확인할 겸 질문을 던졌다.

“오늘 '이테로 델 카스티요(Itero del Castillo)'라는 곳에 가려고 하는데, 네 책에 그곳에 대한 정보가 있니? 내겐 책이 없거든.”

“어디 보자, 이 책에 따르면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2킬로미터쯤 들어가면 나온대. 거의 다 왔어.”

그는 바스크에서 온 순례자라고 했다. 스페인 순례자는 맞는 것 같은데 불쑥 바스크라는 이름부터 꺼내 드니 어디 딴 곳에서 온 사람인가 잠시 헷갈리기도 했다. 그때엔 알 수 없던 복잡다난한 스페인의 지역사정이었다. 타들어가는 담뱃대를 입으로 가져가 깊게 들이마시며 끝없이 펼쳐진 평지를 바라보던 그의 모습에서 묘한 신비스러움이 느껴졌다. 고마움을 전하고 다시 길 위에 올라 부지런히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마을에 가까워지는 듯 길 위에 안내판 혹은 광고판 같은 것이 눈에 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하는 마음과 함께 '대체 왜 마을에서 이렇게 광고를 하지'하는 궁금증을 '길 바깥에 있으니 많이들 찾아오라고 작전을 쓰나보지'하며 달랬다. 바스크인 순례자의 정보처럼 곧 길 오른편으로 뻗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었고, ‘다 왔다’는 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을 샛길로 향했다.

문득 나를 지나쳐가던 소형 트럭 하나가 갑자기 멈추더니 후진을 한다. “카미노는 여기가 아니야. 돌아가야 해.” 후덕스러운 인상의 아저씨는 길 잃은 순례자를 가만 바라볼 수 없었나보다. “아니예요. 지금 저 마을 가요. 고맙습니다” 하고 건넸더니 좋다며 웃으신다. 그리고 차는 뿌연 모랫바람을 휘날리며 사라져갔다. 저 멀리 높다랗게 올라선 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낮은 담을 따라 꼬불꼬불 골목길을 지나자 금세 성당에 닿았다. 어슬렁거리며 주위를 돌자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오신다. “미사 언제예요?”라고 몸짓으로 묻자 할머니는 시계를 가리키며 12시에 시작한다고 한다. 아직 1시간은 넘게 여유가 있었다. 먼저 숙소를 찾아 짐을 풀고 다시 올 마음으로 이번에는 “숙소는 어디예요?” 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다 옆에 있던 할아버지에게 물었고,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길가에서 할아버지와 마주친 웬 중년의 아저씨는 이제부터는 자기를 따라오라며 손짓한다. 할아버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이번에는 그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동사무소쯤 되는 건물 옆에 붙은 바였다. 아직 영업을 하지 않는 어두컴컴한 바에 들어가자 주인아줌마쯤 되는 사람이 나타났다. “잘 거야?”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3유로와 여권을 꺼내라는 그녀의 목소리에 돈을 내고 여권에 도장을 받았다. “저 남자를 따라가”라는 말과 함께 여자는 뒷문으로 나갔고, 나 역시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동사무소의 안쪽 문을 향한다. 열쇠를 꺼내 문을 여는 것 보니 여기가 숙소인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이건 성당이 아닌데? 따라 들어간 곳은 지금까지 본 숙소 중에서 가장 작은 곳이었다. 2층 침대 서너 개가 들어차 있는 방과 작은 샤워실, 그리고 책상이 몇 개 있는 방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이층침대에 매트리스가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에서 순례자들이 그다지 찾지 않는 외진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테이블이 놓인 방에서 서랍을 뒤져 방명록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 순례자들의 기록이라도 보라는 것인지, 방명록을 뒤적거려보고 있는데 그는 나갈 생각을 않는다. 갑자기 나에게 스페인어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당연히 스페인어를 모르는 나는 그나마 아는 단어라도 들어보려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뭐라고 열심히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수수께끼를 푸는 양 상상력을 발휘해 보았다. ‘말하는 모양새가 꼭 밥이라도 먹었냐는 것 같은데? 땡! 아님 저녁식사 시간을 알려주는 걸까? 땡! 설마 숙소 보증금이 있다는 거야? 아니지,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는 여전히 주머니에서 작은 돈지갑을 꺼내서는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뭘 하자고 한다. ‘못 알아듣겠으니 여기 적어주세요’하며 종이와 펜을 내미니 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씨? 씨? 씨?(좋아? 좋아? 좋아?)' 하기에 무심코 나도 '좋아요'라고 말했더니 갑자기 다가오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아차! 이게 바로 혼자 여행하는 여성에게 일어난다는 성적 접근? 갑자기 어이가 없어 “노, 노, 노!”하고 그를 밀쳐냈더니 다행스럽게도 알았다며 얼굴을 들이민다. 사태파악이 덜 된 나는 그의 볼 인사(?)를 그대로 받은 채로 어안이 벙벙했다. 순간 남자의 손이 둔부를 움켜쥐는 느낌이 ‘이거구나’ 싶었다.

이테로 델 카스티요의 풍경쫓기듯 도망쳤던 성당의 첨탑이 멀어진다. ⓒ JH


바에서 날린 3유로보다는 당장 이 곳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에 문을 박차고 나와 동네를 떠났다. 미친 듯이 걸었다. 마치 밀밭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겁도 없이 밀밭에 뛰어들어 가시나무 풀에 찔리며 내달리듯 걸었다.

왔던 길로 돌아가면 그 남자를 다시 만날 것 같아서 바들바들 떨었다. 웬 숲길에 뜬금없는 집 한 채와 세차 중인 남자가 보였다. “다음 마을인 이테로 데 라 베가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쭉 가면 나와” 그러나 이 남자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걷고 또 걸었다. 남자에게 풍겼던 지독한 스킨 냄새가 몸에 밴 것 같기만 하다. '빨리, 샤워를 하고 싶어.'

한 시간 여를 노란 화살표를 찾아 절박한 마음으로 도망치듯 걸은 걸음이었다. 다행스럽게 멀리서 짐을 짊어지고 길을 걷는 무리들을 발견했다. 순간 마음이 놓여 길이고 밭이고 구분도 없이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 너무 반가워!”

호들갑 떨듯 인사를 건네는 내가 얼마나 이상했을까? 나는 스페인과 독일인으로 구성된 네 사람의 일행에 끼어 더듬더듬 겪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뜬금없이 길을 잘못 들고 성매매(그것이었다!)의 유혹에 빠졌다가 되돌아온 이야기를 하자니 대체 내가 뭘 하는 건지, 여기는 어디인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것만 같았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그걸로 천만다행이네.”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육체적으로, 그것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에 처음으로 내맡겨진 셈이었다.

나는 ‘여성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품어왔다. 여자라는 것은 무엇일까? 남자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어 살림을 꾸려가는 모습, 혹은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모습, ‘여자’라는 사람들은 ‘남자’, 혹은 ‘가족’이라는 단어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나약하고 수동적이며 희생적이며 아름다운… 여자. 인류라는 장막 뒤의 비극의 주인공이자 하염없이 눈물짓는 것만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무기.

그것이 내가 가진 ‘여자’의 모습이었고, 나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내게 있어 ‘여자아이들을 상징하는 것들의 반대’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짧은 머리를 하고 남자에는 무심하다는 투로, 예쁘고 작은 것들에 대한 비하감으로 살아왔다.

패션잡지와 예쁜 치마에 열광하던 또래들을 마음 속으로 비웃으며 하이테크와 미니기기를 즐기는 나를 마치 우등한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사실, 패션잡지 ‘신디 더 퍼키’와 파나소닉의 시디 플레이어 ‘CT-570'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끝없이 부정하던 내가 스페인 깡촌 마을에 떨어져서 ‘한번 해 주면 돈 줄게’라는 비밀스럽고 탐탁지 않은 거래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현실 앞에서, 아무리 나만의 세계에서 ‘나는 여자가 싫어. 여자로 대접받는 것도 싫어. 모두 싫어. 그냥 나대로 살면 안 돼?’ 라고 생각해봤자 타인에게는 어쨌든 ‘조금 짧은 머리를 한 수수한 스타일의 여성’으로 보이고 있다는 현실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혼이 쏙 빠져 다음 마을인 ‘이테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에 닿았다. ‘이테로’라는 이름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피로감이 몰려왔다. 더 이상은 걸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헬기라도 불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도착한 사설 숙소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아무리 둘러봐도 인적 하나 없었다. 나가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아 근처 작은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커다란 배낭을 옆에 두고 쉬고 있는 순례자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혹시 오늘 여기서 묵을 예정인가요?”
“응. 가보니까 사람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어.”

문득, 그녀에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예전처럼 기억들을 꿀꺽 삼키고 말면 그것들이 내 안에서 얼마나 요동을 칠 것인가, 하는 생각에 그녀 옆에 앉아 오늘 하루를 이야기했다. 여자는 열심히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잘했어. 이럴 때엔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지.”

그녀의 따뜻한 이야기가 고마웠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브리기테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곧 숙소로 돌아갔고, 2인실 방을 같이 쓰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이미 한 번 휘저어진 마음 바닥의 먼지들이 부옇게 떠올라 그저 심란하기만한 하루다. 끝없이 글을 쓰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왜 사람들이 이 구간을 버스로 지나는지 알겠다. 청결에 대한 개념도 심히 떨어지는 것 같고, 파리는 또 왜 이렇게 많아! 영어는 통할 기미가 안 보인다. 사람들도 이상하게 보인다. 먹을거리 사러 간 작은 바에 죽치고 있던 남자들은 왜 휘파람을 불지? 짜증 난다. 자꾸만 도망치고만 싶다. 최대한 빨리 이 지긋지긋한 메세타 지역을 벗어나고 싶다. 하루에 40킬로미터씩 끊어야 하나?

왜 어른들은 그렇게 술을 마시지? 미친 듯이 일하지? 그것 말고는 없나? 정말? 맨정신으로, 나를 제대로 맞닥뜨리고 사는 것이 괴로운 삶, 그래서 걷는다, 먹는다, 마신다, 잠든다…. 모르는 말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한 첫 날, 이 길이 갑자기 극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한 밤. 그렇지만 길 위에 서면 오로지 홀로 될 수 있을 테니, 오히려 이렇게 마을 안에 들어서는 것보다 길 위에서 더 힘이 나는 느낌이다. 초반엔 숙소가 천국이었는데, 이젠 길이 더 그립다(삶과 비슷한 듯싶다)."

남자 혼자서 꾸리는 숙소의 전쟁터 같은 부엌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치킨스프를 끓이며, 브리기테는 ‘이 집엔 여자가 필요하다’며 어쩔 줄 몰랐고, 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거리와 손에 묻어나는 기름때, 뒹구는 빵조각을 바라보며 점심으로 이곳 식당에서 먹었던 메뉴가 떠올랐다. 차라리 모르고 말 것을…, 그렇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하고 벗어나려고 해도 한 낮의 밀밭 한가운데서 반갑지 않은 남자의 스킨 냄새에 치를 떨며 길을 찾아 달리던 나의 모습처럼.

미칠 듯이 단조로운 동네의 젊음은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술로 밤을 지새우고, 나는 처음으로 귀마개를 꺼내 귀에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는다. 푹신한 1층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