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후보님, 미안합니다...투표하지 못해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편지
▲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17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하면서 '대선승리'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통령 후보님께
저는 지난 대선 때 권영길 후보님께 표를 던졌습니다. 그땐 야간조라 특근이 있어도 투표가 가능했거든요. 그러나 오는 수요일 대통령 선거일에 마침 주간조가 걸렸습니다. 선거날인데 일하러 나오라네요.
제가 만약 원청 노동자라면 또는 정규직이라면 하루 쉬면서 느긋하게 투표하고 가족과 함께 나들이라도 가겠지만 저는 비정규직이거든요. 잘못하면 짤려요.
제가 일하는 하청업체가 이번 연말로 폐업 돼 버렸어요. 잘못하면 저 짤릴지도 모르거든요. 아마도 원청 대기업 측에서 본보기로 몇 업체 날려 버리나봐요. 참 쉽죠? 원청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잖아요? 취업은 어려운데 짤리기는 식은 죽 먹기네요. 대기업 원청은 강제 해고시키면 비난 받을까봐 업체를 폐업시켜 버리네요.
업체를 폐업시키면 절차는 이렇습니다. 구 업자가 관두면 원청에 선택된 새 업자가 와서 새 업체명을 만들지요. 그리고 정부 관련 기관에 신고하겠지요. 새로 오는 하청업자는 원청 관료들에게 먼저 사전 교육을 받겠죠? 노조 관련자부터 알려줄 것입니다. 새 하청업자는 출근하자마자 절 부를 겁니다. 그리고 말하겠죠?
"작년 말 당신이 다니던 업체는 폐업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집에 가시오."
그러면 항의 한번 못하고 집에 가야 하죠. 참 비참한 현실입니다. 지난 7년간 밉게 보일까봐 아파도 출근하고 일이 있어도 출근했는데, 너무도 간단하게 강제 퇴직처리 될 수 있다니….
▲ 2007 전국노동자대회 모습(자료사진) ⓒ 서종규
노동착취 근절 위해 비정규직은 꼭 철폐되어야
저는 지금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무조건 특근을 합니다. 물론 많이 피곤하지만요. 이번 연말이면 짤릴지도 모르니까 퇴직금이라도 많이 타내려구요. 시간을 많이 할수록 퇴직금도 많아지거든요.
하지만 짤리지 않을 확률도 있답니다. 제가 하는 일이 힘든 일이거든요. 원청도 힘들어 못하겠다고 하청에 맡겼거든요. 두시간 동안 라인을 타는지라 화장실 갔다 올 시간조차 없으니까요. 쉬는 시간 부랴부랴 갔다 와야 합니다.
짤리지 않으면 천만다행입니다. 그러나 계속 출근을 할 수 있다 해도 여러 가지 손해가 나겠죠? 우선 연차 수당이 사라집니다. 7년간 모아온 연차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새로운 하청에서 신입으로 규정하면 시급이 최저 생계비로 떨어질지도 모르겠군요. 업자가 새로 왔으니 그럴 확률이 높답니다.
이래저래 손해가 막심해요. 그렇다고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겠구요. 처자식과 먹고 살아야 하는데 나가랄까봐 겁나서요.
주간조 특근은 아침 8시까지 출근합니다. 집에서 대략 40~50분 정도 걸리니 7시 전에는 집에서 나서야 합니다. 투표 시간이 6시부터니까 출근하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씻고 아침도 먹어야 하잖아요.
퇴근해서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답니다. 요즘은 바빠서 추가 작업을 많이 하거든요. 중식·석식 30분 연장 작업에다가 야간조 출근 전까지 일하거든요. 야간조가 밤 9시에 출근하니 우리도 9시까지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투표 할 수 없네요. 미안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보니, 불법파견 노동자로 살아보니, 대기업의 노동착취 근절을 위해서라도 비정규직 철폐는 꼭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지지하는 권영길 후보에게 한 표 던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투표를 할 수 없는 실정이라 참 안타깝기만 합니다. 어쩌겠나요? 현실이 그런 걸….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나 투표하겠죠? 그래서 또, 가진 자들 앞잡이 노릇하는 후보가 당선되겠죠?
추석이다, 설이다 하여 명절마다 쉬면서 왜 이런 큰 행사인 대통령 선거에는 기업이 쉬지 않을까요?
▲ ⓒ 김철관
현장의 현실은 다릅니다
민주노총에서 발행하는 <노동과 세계>에 "비정규직 노동자는 유권자도 아닌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더군요. 거기 보니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투표할 시간을 주게 되어 있더군요. 그러나 청구하는 노동자에게만이더군요. 만약 노동자의 선거 시간 청구를 사용자가 거절했을 시 사용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되어 있네요.
저는 처음 알았어요. 노동관련법에 그런 구절이 있는지조차 몰랐거든요. 근로기준법 10조에 있네요.
"사용자는 근로자가 근로시간 중에 선거권, 그 밖의 공민권 행사를 위하여 필요한 시간을 청구하면 거부하지 못한다"
노동부 관계자도 강조하네요. "노동자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일용직인지 상용직인지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오는 19일 17대 대통령 선출을 위한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민주노총 중앙에서 내는 신문엔 그런 류의 소식을 올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현장의 현실은 다릅니다. 감히 누가 용감히 나서서 청구를 하겠습니까? 원청 같으면. 정규직이라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하청은 아닙니다. 강 건너 불구경이고 그림의 떡일 뿐이지요.
만약 제가 그 법조항을 들이대며 청구하면 아마 선거는 할 수 있겠지만 내년부터는 출입증마저 반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강성노조요? 민주노조요? 있으면 뭐합니까? 19일 출근하는 것을 방조하고 있는데요.
비록 저는 투표하지 못하지만, 마음으로나마 바랄게요. 좋은 성적 거두시기를, 그래서 꼭 세상을 바꿔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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