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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 봉사자 되어, 떠난 이들의 빈자리 매만지며

[천진난만하게JH, 산티아고 가는 길 24]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버스로 레온까지

등록|2007.12.18 20:31 수정|2007.12.19 10:48

순례자의 맨발카리온의 순례자 동상 ⓒ JH


2007년 7월 11일 수요일, 날씨 왜 이렇게 맑지? 순례 19일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버스를 타고 레온까지, 버스를 타고 107km.


새벽 6시, 주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순례자들이 깨어 길 위에 오르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옆 침대가 휑하니 비어 있다. 소라씨는 벌써 출발한 모양이다. 숙소에서는 8시 전에 나가야 하고 버스는 오후 1시쯤 출발한다. 이 마을에서 5시간을 뭐하며 보낸다? 동네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으니 관광도 좋겠다. 아니면 밀린 기록을 위해 바의 노천에 앉아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기울이며 글을 쓸까? 생각을 이어가다 다시 잠에 빠졌다.

다시 잠에서 깬 시간은 7시30분, 주위 침대들은 모두 비어 있다. 멀리 브리기테 아줌마가 보인다. 그녀도 오늘 이 곳에서 버스를 타고 레온으로 향할 예정이란다. 아주 천천히 짐을 싸고 식당으로 가서 어제 남겨둔 식사를 했다. 소라씨는 손도 대지 않고 떠났구나. 문득, 수녀님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숙소 청소를 준비하고 있는 수녀님에게 "제가 도와드릴 일 없을까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웃으며 반기신다. 기분이 좋았다.

카리온의 아침스페인 작은 마을 아침 미사의 풍경 ⓒ JH


수녀님을 따라서 침대시트와 베개 커버를 벗기면 다른 수녀님께서 솔 같은 것으로 매트리스를 빗질하듯 청소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침대벌레를 위한 손질이었다. 작업이 끝나고 곧 좋은 향기가 나는 새 침대시트를 깔고 베개 커버를 씌웠다. 내가 하루 머물고 사라지는 숙소는 매일 새로운 순례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이렇게 공을 들이고 정성을 다하는구나,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비록 별로 한 게 없어 수녀님들을 귀찮게 한 것 같기도 했지만 오늘 하루는 순례자가 아닌 봉사자, 오스피탈레라(?)가 된 것 같았다. 나름대로 힘들여 새로 깐 침대시트를 매만지며, 오늘은 어떤 이가 이 침대에서 잠들게 될지 궁금했다.

쓰레기들이 담긴 검은 비닐을 들고 숙소 바깥으로 나오자 수녀님 한 분이 어느 정도 일을 마치시고 한숨 돌리고 계셨다. 짙은 피부색을 가진 바바라 수녀님은 인도 부모님을 둔 분이었다. 예멘에서 태어난 수녀님은 영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 이태리어까지 하시는 분이었다. 어제 순례자 행사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통역을 하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숙소 문가에서 30분을 바바라 수녀님과 수다를 떨었다.

유럽의 수도원 현황, 카미노의 본원적 의미, 수도성소를 품고 당신네 수도원에 입회했다 곧 떠나는 제3세계의 성소자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찾는 사람들 속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수녀님의 분주한 생활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꺄르르 웃기도 하고 짐짓 심각한 체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메일 주소를 알려주면 이 곳 소식을 전하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안 그래도 방명록에 내 메일 주소를 적어 놓았다며, 한국에 가서 기쁜 마음으로 소식을 기다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숙소로 들어왔다.

어제 순례자들로 가득했던 1층 거실은 세 사람의 수녀님과 세 사람의 수사님, 그리고 나와 브리기테만이 남아 있었다. 어제 스쳐가듯 보았던 갈색 수도복을 입은 수사님들은 알고 보니 이태리 시칠리에서 오신 프란치스코회의 수사님들이셨다. 요세페, 빈첸시오, 움베르코 수사님들은 오늘 버스를 타고 레온 전의 '사하군S(ahagun)'이라는 마을로 가신단다.

숙소 정리를 마친 우리들은 잠시 숨을 돌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10시 아침미사를 함께 하기 위해 동네의 성당으로 향했다. 넓은 실내에는 지긋한 나이의 할머니들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 수녀님의 기타연주와 맑은 목소리의 입당성가가 천정을 따라 온 실내에 퍼지고, 작고 고요하고 충만한 전례의 시간이 흘렀다.

순례자 동상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 JH


미사가 끝나고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멍하니 있었다. 그때 마침 수사님들이 "버스 티켓은 구했니"라고 물으신다. "이따 정류장에 가서 사려고요"라고 말했더니 함께 가겠다고 하신다. "감사합니다"하고 수사님들의 뒤를 따랐다. 마을의 버스정류장은 '바 에스파냐(Bar España)'라는 이름의 바 앞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표를 살 수도 있다고 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주변을 조금 돌아볼 겸 수사님들과 마을을 거닐었다.

"살 게 있는데 잠깐 상점에 들를게"하시기에 나도 별달리 할 일이 없어 함께했다. 진열대 앞에서 넋을 놓고 쳐다보고 계신 모습이 마치 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수사님들은 점심으로 만들어 먹을 푸실리 파스타와 소스, 그리고 몇 가지 일상용품을 신중하게 고르고 나서 물건 값을 치렀다.

가벼운 어깨 위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정류장이 있는 마을 큰 길 앞에 커다란 동상이 보였다. 조개달린 망토를 입고 모자를 쓴 순례자가 호리병이 걸린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끈으로 된 샌들 밖으로 고스란히 맨발이 드러나 있었다. 그동안 숙소에서 만났던 순례자들의 물집이 가득 잡힌 발, 절뚝이며 걷는 다리가 떠올랐다.

수사님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오후 1시 발 레온 행 티켓을 구입한 후,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11시가 넘어 있었다. 수녀님들과 수사님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짐을 들고 나오기로 했다. "언제나 기도 안에서 기억할게"라고 하시며 나를 안아주시던 수녀님들, 그리고 수사님들. 모두 건강하신지….

우체국에 들를 겸 일찍 나왔더니 짐을 들고 걷기엔 거리가 만만치 않다. 정류장 근처 작은 바의 노천에 앉아 카페 콘 레체를 마시며 한숨을 돌렸다. 걸어서 4일치 거리를 오늘 버스를 타고 3시간만에 도착한다. 문득 모든 것이 불안해졌다. 좋은 결정일까? 그저 조금 운이 나빴던 날의 기억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게다가 엄연히 길에서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길 위에 있으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이곳, 어제 그리고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경험을 한 곳인데,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경험을 하게 될지 알 수가 없는데….

레온에서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플라자 마요르 ⓒ JH


9유로짜리 버스티켓을 몇 번이나 꺼내보다, 곧 버스 시간이 가까워져 짐을 들고 정류장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몇몇의 순례자와 인사를 나누고, 나는 잔뜩 복잡한 마음이 되어 버스 위에 올랐다. "빨리빨리 올라타요!" 버스기사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순례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바퀴달린 것을 타고 마을을 빠져나간다. 세 시간 동안 창 밖으로 끝없는 밀밭, 가끔은 해바라기밭, 두 발로 닿길 원했던 익숙한 이름의 동네를 가리키는 표지판들을 무심히 지나치자, '레온 버스터미널(Estacion de Autobuses de León)'에 닿았다.

버스에서 떨어져 어떻게 해야 하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브리기테 아줌마도 이 버스를 타고 왔구나. 처음 보는 순례자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레온 시내까지 어떻게 가는지 아세요?"라고 물었더니 "나도 지금 고민 중이야"하며 가지고 있는 책을 유심히 살펴보며 방향을 가늠한다. 옆에 있는 이는 그녀와 이름과 고향이 같은 순례자였다. 두 사람은 우연의 일치를 신기해하며 독일어로 이야기를 이어갔고, 나는 조금 뒤에 떨어져 그들을 번갈아 살피며 길을 걸었다.

버스터미널에서 우리가 목표하는 구 시가지로 향하는 길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우리 동네에 있는 개천가와 닮아 정이 간다. 저 멀리 익숙한 맥도날드의 입간판이 서 있었다. '난 한국에선 절대 맥도날드를 가지 않는데, 이상하게 여기 오면 괜히 반갑고 가고 싶더라.' 대도시였던 팜플로나, 혹은 로그로뇨 쯤에서 순례자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지나온 스페인의 중소도시에서는 스타벅스, 맥도날드, 버거킹 같은 대표적 다국적 프랜차이즈 상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보다는 스페인 사람들이 운영하는 작은 바, 레스토랑이 월등히 많았다. 세계화의 대표 주자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어느새 레온의 상징, 대성당 앞에 와 있었다. 웅장한 건물 전면에는 정교한 장미창이 걸려 있었다.

문득 며칠 전 만났던 세계 일주를 하는 정은 언니의 숙소 구하는 요령이 떠올랐다. '가끔은 펜션에 묵기도 해요. 중심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가격도 호텔이나 호스텔보다는 월등히 싸고 혼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죠.' 로그로뇨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별 하나짜리 호텔방에 바가지를 쓴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언니의 경험을 적용해 보기로 했다.

"저는 오늘은 펜션에서 머물고 내일 순례자 숙소로 옮길까 해요. 내일 당장 짐을 싸들고 출발하기에 이 도시엔 볼거리가 참 많은 것 같은 걸요."
"그래?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구나. 나도 몇 군데 호텔을 알아오긴 했는데, 같이 찾아보자."


곧 브리기테 아줌마와 의기투합하여 방을 찾아다녔다. '플라자 마요르(Plaza Mayor)', 사각형 광장의 조망이 시원스러운 방이었다. 비록 문손잡이가 낡아 혼자서 돌아가고 좁은 현관바닥에 신문지가 잔뜩 깔린 모습이 의문스럽긴 했지만 침대 두 개를 혼자 쓰는데 15유로라면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짐을 풀자마자 '순례자 숙소에 가 보자'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왠지 한국 순례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운이 좋다면 사하라 씨와 연주 언니, 지영 씨와 일정이 맞을 수도 있었다.

레온에서레온 대성당 ⓒ JH


살금살금 들어간 숙소의 마당에는 낯익은 이들이 테이블에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고, 내게 방심한 등을 내비친 지영씨 뒤로 살금살금 걸어가 놀래줬다.

"깜짝이야, 언니!"

며칠만의 재회인지! 너무나 반가웠다. 연주언니와 지영씨, 그리고 처음 뵙는 혜영언니까지. 사하라씨는 하루 앞서 있다고 한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 위를 나는 제비의 유려한 날갯짓을 바라볼 때, 등 뒤로 쏟아지던 햇빛을 느낄 때마다 그녀가 떠올랐는데…, 아쉽지만 별 수 없었다. 그 동안 지영씨는 침대벌레들의 습격을 받아 온 몸에 붉은 상처가 난 것이 안쓰러웠다. 침낭을 새로 사고 모든 옷을 세탁하는 등 한바탕 큰일을 치른 그녀의 얼굴은 로그로뇨에서처럼 해맑기만 하다.

레온 사람들에게는 아직 저녁 7시, 시간이 이른 터라 식당들은 문을 열 생각을 않았고, 꽤 헤맨 끝에 겨우 장사를 시작하는 식당의 노천테이블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7월 25일, 산티아고 성인 축일에 도착할 것을 목표로 열심히 걷고 있는 기쁨 언니와 수려한 영어를 구사하는 영어 선생님 혜영 언니, 이제 겨우 속이 가라앉아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브리기테 아줌마와 함께 상을 받았다. 렌테하 콩 수프와 양파 수프, 볼로냐식 파스타, 그리고 기억조차 흐릿한 끝없이 이어지는 요리를 한 상에 차리고 비노를 주고받으며 그동안의 여정을 이야기했다.

그녀들은 내일 일찍 이 곳을 떠나 길 위에 오를 것이다. 브리기테 아줌마는 박물관과 현대미술관을 관람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한 레온 대성당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레온 뒷골목의 작은 식당 노천에서 우리는 함께 웃으며 빵을 뜯고 있다. 서로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사진 한 장의 추억을 남기고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폭 파묻혀서 오늘 새로 산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몽롱한 기분이 되어 신비로운 인연과 맛있는 저녁, 따뜻한 잠자리에 한없이 감사했다. 갑자기 그녀들을 따라 출발할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분명 또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기에 내일은 레온에 시간을 내어주기로 작정했다.

어영부영 넘어온 메세타, 순례도 절반을 넘겨 걸을 날이 하루씩 줄어드는 것이 벌써부터 아쉽다. 창밖으로 쩌렁쩌렁한 록음악과 거리의 열기가 비좁은 방안에까지 파고든다. 귀마개를 꺼내 귓속에 밀어 넣고 눈을 꼭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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