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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가 상류층의 전유물이라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을 동네 영화관에서 즐긴다

등록|2007.12.19 21:16 수정|2007.12.19 21:54
류동협 기자는 현재 미국 콜로라도대학교 언론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입니다. [편집자말]

▲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HD 라이브 화면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아내의 손을 잡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서 공연하는 샤를 구노(Charles Gounod)의 '로미오와 줄리엣(Romeo et Julliette)'을 보고 왔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공연을 보기 위해 뉴욕에 가는 대신, 영화를 상영하는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의 일반극장에 갔다. 이곳에서 우리는 위성HD 중계 방송을 통해 뉴욕에 있는 관객들과 동시간에 이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자리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객석이 가득 차 빈 좌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미국의 극장은 흥행작 몇 편을 제외하면 빈 자리가 많은 편인데, 이날은 마치 '해리 포터'때 만원이던 극장 안을 연상시켰다. 우리는 고개를 바짝 들어서 스크린을 봐야만 하는 앞쪽 구석에 남아 있는 자리에 앉아서 오페라가 상영되기를 기다렸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주위를 둘러보니 오페라를 보러온 관객들은 백인 중년과 노년층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유일한 동양인 관객으로 이 역사적인 오페라 극장상영에 참여했다.

공연이 시작되자 스크린에 메트('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줄임말)의 무대가 펼쳐지고 성악가들의 모습이 스크린에 투사되었다. 처음에는 전송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화면이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크게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멋진 아리아나 듀엣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스크린을 향해 박수를 치기도 했다. '무대에 있는 배우들이 아닌 스크린을 향한 나의 박수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하는 회의가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오랜 나의 공연장 습관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나말고 다른 관객들의 박수소리도 들렸는데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연한 안나 네트렙코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스타 성악가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Anna Netrebko)와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Roberto Alagna)의 공연은 매우 훌륭했다. 고화질 기술과 카메라의 근접촬영 덕분에 성악가들의 연기를 아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망원경을 빌리지 않더라도 성악가의 호흡소리까지 느낄 수 있었다. 스크린 아래로 노래에 대한 자막까지 친절하게 붙여줬다. 막간에 심심하지 않도록 DVD의 부록영상처럼 무대 뒷모습과 인터뷰도 보여줬다.

오페라 공연을 보러가는 것과 확실히 다른 경험이었다. 이런 새로운 매체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오페라 영화, 오페라 고화질 방송, 오페라 극장공연. 다양한 단어의 조합이 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메트로폴리탄 홈페이지의 정의에 따르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고화질 라이브(HD Live)'가 바로 오늘 본 오페라 상영의 정식 명칭이다. 이는 근사하게 치장한 마케팅 용어로 그 의도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고화질 전송이라는 신기술을 빌려서 새로운 매체시장을 만들려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메트 오페라의 이미지 변신과 대중화 전략

어떻게 고급예술로 여겨지는 오페라가 대중예술인 영화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새로운 마케팅 전략에서 찾을 수 있었다. 2001년 이후 오페라 관객이 거의 6년째 줄고 있었던 메트는 강경한 자구책을 강구한다. 2006년 8월 1일 소니 클래식 사장이던 피터 겔브(Peter Gelb)를 총감독으로 데려 온 것이다.

▲ 피터 겔브(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중앙통제실에서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현재 미국의 오페라 주요 관객층은 백인 상류계급 중노년들이다. 새롭게 편입되는 관객은 별로 없고 기존의 관객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오페라 팬이 전체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특정 계급과 유럽문화에 한정되어 있는 오페라의 현재 관객층이 확대되지 못하면 그 미래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터 겔브가 생각한 문제 해결책은 바로 오페라의 '대중화'를 통한 전체 수용자층의 확대였다.

오페라의 대중화를 외친 사람은 피터 겔브만이 아니었다. 테너이자 지휘자인 플라시도 도밍고 역시 문화나 계급의 차이 때문에 오페라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도밍고는 메트 오페라의 극장상영이 오페라를 좋아하는 외국팬이나, 오페라의 엘리트적 취향 때문에 꺼렸던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 로미오와 줄리엣 지휘를 맡은 플라시도 도밍고를 인터뷰하는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도밍고는 오페라를 보러가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첫번째는 오페라를 보러갈 돈이 없는 사람이다. 두번째 부류는 오페라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오페라를 접할 기회도 없었고, 오페라는 노인네들이나 보는 고리타분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도밍고는 오페라가 대중적 장르인 영화와 만나면 엘리트 냄새도 많이 벗을 것이고 가격도 싸게 되어 더 많은 사람이 볼 것이라고 주장한다.

피터 겔브가 취임하면서 메트는 대대적으로 새로운 마케팅 캠페인을 시도하였다. 우편과 전화로만 하던 전통적인 마케팅 방식을 벗어나 전화부스, 지하철역 입구, 가로등, 버스 외부에 광고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보수적인 메트가 이런 변화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획기적이다. 메트와 달리 뉴욕 시티 오페라는 이미 대중적인 마케팅 방법을 쓰고 있었고, 실험적인 레파토리도 도입하고 있다.

메트는 2006-2007 시즌부터 개막 공연을 타임스퀘어 전광판을 통해 무료로 상영하여 뉴욕 시민들이 볼 수 있게 하였고, 이전부터 해오고 있던 라디오를 통한 전세계 라이브방송을 보다 확대했다. 또한 2007-2008 시즌부터 뉴욕의 5개 고등학교에 무료로 오페라를 전송하기 시작했다. 오페라를 보지 않던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보다 공격적인 마케팅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페라에 익숙치 않은 시민들이나 학생들에게 오페라에 최대한 노출시키려는 전략이다.

메트 오페라 고화질 라이브의 성공적인 관객동원

극장에서 오페라를 상영하는 것은 오페라 대중화를 위한 마케팅 전략의 한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시도에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다 싼 가격으로 오페라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면, 메트의 본 공연 관객수가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2006~2007 시즌의 객석 점유율이 83.9%로 그전 시즌의 76.8%보다 훨씬 높아졌다. 지난 6년간 계속해서 하락세였던 점유율은 1년만에 상승세로 돌아섰다.

2006~2007년 시즌의 '마술피리(Die Zauberflöte)'부터 오페라 고화질상영은 전세계적으로 100여개의 극장에서 이뤄졌다. 출발부터 괜찮은 흥행이었다. 매진된 극장도 상당수였고, 전체 극장의 객석 점유율이 무려 90%에 달했다. 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 노르웨이의 극장에서 시작한 오페라 영화관은 상영관을 계속해서 늘려가서 오스트리아, 호주, 벨기에, 체코,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푸에르토리코, 스웨덴으로 확산되어 2007~2008 시즌에는 약 600여개 관으로 늘어났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한국의 영화관은 참여하고 있지 않아 한국에서 메트의 공연을 볼 수는 없다.

▲ 르네 플레밍이 안나 네트렙코와 로베르트 알라냐에게 공연에 관해서 물어보고 있다.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상업적인 측면에서 메트 공연의 영화관 상영은 성공적이었다. 이 성공에 고무되어 영국의 로얄 오페라하우스 코벤트가든(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이나 이탈리아의 라스칼라(La Scala)도 고화질 상영을 준비하고 있다. 코벤트가든은 소니와 계약을 체결하고 장비를 갖추고 있는 중이다. 워싱턴 국립 오페라처럼 학교를 대상으로 무료 상영회하는 곳도 있지만 상업적인 오페라 상영은 아직까지 메트가 유일하다.

세계적 수준의 오페라단들이 서로 경쟁해서 다양한 레퍼토리를 보여준다면 나같은 오페라팬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라스칼라, 코벤트가든, 메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같은 날 상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줄어드는 관객층을 서로 공략하려다 같이 망할 수도 있다.

메트의 고화질 라이브는 나처럼 문화시설이 별로 없는 미국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혜택이 된다. 뉴욕으로 메트 오페라를 보러가려면 티켓값, 비행기값, 호텔비까지 합하면 수백불은 우스워진다. 그런데 이제 단돈 22불이면 메트의 공연을 초대형 스크린에 빵빵한 스피커로 즐길 수 있다. 오페라팬이라면 이런 유혹을 거부하기 힘들다. 물론 공연장에 가서 즐기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HD 라이브 중계를 통해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메트에서 하는 공연을 직접 보고 싶은 나의 열망은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메트의 실험은 새로운 관객층을 끌어들였는가?

현재 메트의 평균 객석 점유율은 80% 정도에 이르고, 전세계적으로 개봉관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극장 상영이라는 전략을 통해 메트는 뉴욕 바깥 관객들의 주머니까지 공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이 과연 새로운 관객을 끌어들이며, 의도한 오페라의 대중화를 실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다. 현재 메트의 마케팅 전략은 숨어 있는 나같은 오페라팬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내 주변의 오페라 팬들 상당수가 메트의 극장공연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극장에서 본 관객들은 지역 오페라단의 공연장에서 본 관객들과 거의 일치했다. 백인 중노년층.

기존의 오페라 팬층을 넘어서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우선 고급예술로서 고정된 오페라의 이미지를 떨쳐내는 일이 필요하다. 불과 1970년대까지도 '오페라를 보러가는 날은 문명을 만나는 것'이라는 광고가 당연하게 쓰였다. 오페라는 그만큼 대중들이 다가가기에는 높은 벽이었다. 이런 심리적 벽을 극복하지 못하면 오페라는 계속 고급예술로만 인식될 것이고, 오페라의 대중화는 요원해질 것이다.

젊은 인터넷 세대에 다가가기 위해서 메트는 홈페이지와 마이스페이스에 블로그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블로그에 댓글이 거의 달려 있지 않았다. 이러한 메트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여전히 관객을 홍보나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려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 즐겁게 놀 수 있게 해주어야지 가르치려고만 들면 관객은 달아난다. 보도 자료 수준의 글로 오페라를 홍보하려고만 한다면 오페라에 관심없는 인터넷 세대를 끌어들이기는 힘들다. 블로그는 신문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페라는 이태리어, 불어, 독어 등 유럽의 언어로 되어 있다. 그 언어에 대한 이해없이 작품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더 지식인들의 예술이라고 취급되고 있다. 이해하기 쉬운 번역과 자막으로 이러한 장벽을 낮출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의 수준을 높이고 이해를 도와줄 친절한 안내자료를 다양하게 개발하는 일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페라의 극장상영은 오페라 라이브공연에 대한 갈증을 채워줄 대체재가 될 수 있다. 이 대체재가 보다 대중적이 되기를 기대한다. 메트의 마케팅 실험은 현재 진행중이다. 오페라의 영화관 상영은 위성 매체를 활용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도박같은 이 실험이 성공을 거둬서 더 많은 오페라를 소도시에서도 마음껏 볼 수 오는 날을 기대한다. 상영관이 더 늘어나면 가격이 낮아질 수 있다. 지금의 22불은 여전히 비싸다. 헐리우드 영화와 비슷한 가격(보통 7~8불)으로 오페라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극장상영 ⓒ A2ZMpls


미국 영화관들은 계속해서 줄어드는 관객수로 고민하고 있다. 이들은 DVD로 뺏긴 관객들을 되찾아오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오페라의 극장상영도 여러 전략 중의 하나일 것이다. 머지않아 영화관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메트의 오페라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은 드라마 시청자 팬클럽에서 영화관을 대관하여 마지막회를 보는 이벤트도 자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관은 이제 영화만을 상영하는 공간에서 다양한 미디어 컨텐츠을 위한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나라 지방의 극장에서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공연을 보기를 원하는 것은 나만의 희망일까.

요즘 한국 공연계의 협찬을 통한 마케팅에 대한 비판이 많다. 일부 기업에만 의존하는 이러한 공연관행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보다 근본적인 방법은 클래식 공연의 대중화를 통해 관객층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연 기획자들이 메트의 이런 전략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기자의 블로그 "맛있는 대중문화"(ryudonghyup.com)에서도 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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