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저자'에선 영수증이 필요없어요

[일상의 해방공간] 은빛 파도 일렁이는 '기장 시장' 풍경

등록|2007.12.24 14:41 수정|2007.12.24 17:05
'저자'는 시장의 우리 말이다. 그러나 저자란 말보다 시장이란 말을 많이 쓴다. 문헌상으로 보면 시대가 내려올수록 시보다는 장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저자에 가는 것을 한자어로 행시(行市)라고 하며, 장이란 말을 써서 '장 보러 간다'고 할 때에는 '간장(看場)'이라고 한다. '간지(看指)'라고도 하는데 이 또한 '저자'를 의미한다.

기장시장에서 생선비린내를 맡을 때살아 있다는 확인을 한다. ⓒ 송유미

기장멸치보다 기장 칼치가 더 은빛입니다.장마다 나는 칼치와 기장 칼치는 다르죠. ⓒ 송유미


바닷가, 기장군 기장 시장은 '시장'이란 단어보다는 '저자'란 우리 말이 어울리는 저잣거리이다. 그리고 또 기장 시장은 '바다의 팔도 시장'이다. 여기오면 연안에서 생산되는 어물은 거의 다 살 수 있다. 바다에서 갓 잡아온 어물들로 여타 시장의 어물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싱싱하다.

화려한 불빛 아래 진열된 생선을 파는 마트나 백화점과 일반 어시장 등에서는 경제적 행위의 거래만 가득 차 있고, 더러 굴비에 노란 색깔을 물들인 것은 아닐까. 혹시 상한 생선을 냉동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지만, 이곳에서는 일단 이런 염려는 불필요하게 된다.

싱싱한 기장 대게정말 먹을수록 더 먹고 싶지요. ⓒ 송유미

 싱싱한 칼치뿐만 아니라, 파릇파릇한 기장 미역과 기장 멸치와 대게와 홍합, 바지락, 대합조개, 고등어, 꽁치, 문어 등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생선들이 좌판에 가지런히 놓인 기장시장에서는 기장 시장 간다고 해서 따라 나온 사람도 시장을 보게 된다. '마 사이소. 여기보다 싱싱한 고기는 없는 기라예', '이보소. 안사고 그냥 가면 우짜능교? 얼마에 살라 카능교? 내가 오늘 일찍 팔고 들어가야 하니까, 말해 보소' 등등 이미 가격이 정해져 있어 흥정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백화점과 마트의 어물전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저자 풍경이다.  

마, 사 가이소. 여기보다 싱싱한데는 없데이... ⓒ 송유미

'대게' 하면 '영덕 대게'인데 여기 오면 영덕이나 강구에 온 착각을 할 정도로 대게를 파는 가게와 좌판이 많다. 시장 보러 온 발걸음이 아닌데 문득 서울 사는 친척들이 생각나서 즉석에서 샀다. 그런데 익히지 않은 생물이라 2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가격을 치르고 영수증을 요청하니, '이보소. 영수증 없어도 나중에 딴 말 안 할꺼니까 아무 걱정 마이소'하며 못 믿을 사람이라는 듯, 등을 떠밀 듯 저자 구경을 하고 오라고 한다. 어슬렁 어슬렁 저자거리를 거닐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래 이게 바로 저자거리에서만 만날 수 있는 , 영수증 없는 삶의 질서와 믿음, 신뢰라는 것을…. 

싱싱한 생선도 좋지만 잘 말린 건어물도너무 싸고 질이 좋습니다. ⓒ 송유미

시장의 음악은 트럭 구르는 소리에 들리지 않아도아름다운 그림처럼 풍경은 한폭한폭 스치고 지나간다. ⓒ 송유미

 기장의 명물은 역시 미역이다. 파릇파릇 살짝 데친 미역 맛도 좋지만, 소금에 박박 문질러 씻어서 초장에 찍어 먹는 기장 미역 맛은 산나물 맛 못지 않다. 기장 시장은 시장을 보러 나온 사람보다 시장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장바구니를 들지 않은 핸드백을 든 아주머니와 신사 양복을 입은 아저씨와 아이들까지. 연말의 명절 분위기 탓일까. 시장은 여느 날보다 더 시끌벅적한 난장판 같은데, 그 왁자한 난장 속에는 저마다의 무질서 속의 질서를 느낄 수 있는 상거래에 왠지 훈훈하다. 문득 흰 광목처럼 펄럭이는 하늘 아래, 약장수랑 서커스 곡마단의 나팔 소리와 씨름판이 열리던 그 아릿한 '귀시도' 그림 같은 장날이면, 한사코 엄마 따라 장에 가려다가 혼자 남아 집을 보던 회억에 괜히 눈시울이 뜨겁다. 

기장의 명물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기장 미역이죠. ⓒ 송유미

저자에서는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잠시 일상의 생산 활동에서 해방되는 공간이다. ⓒ 송유미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 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 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엄마걱정',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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