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이여, 공부해서 후배 주자!"
[해외리포트] 미국 고등학교 '프로젝트 레스큐' 각광
▲ 릭 선생님이 학생들의 공부를 봐주고 있다. ⓒ 한나영
레스큐(rescue): 구조, 구출, 구제
학생들을 구조해주는 고등학교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프로젝트 레스큐(project rescue)'다. 레스큐(rescue)라는 말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뭔가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을 구조해준다는 뜻이다.
학생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기에 학교에서 구조를 해준다는 것일까. 마약? 폭력? 술? 담배? 언뜻 떠오르는 미국 학교의 문제들이다. 하지만 프로젝트 레스큐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학생들의 본업인 학업에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구조 프로그램이다.
숙제 어려움 겪거나 성적 나쁜 학생 돕는 '프로젝트 레스큐'
▲ 프로젝트 레스큐가 실시되고 있는 교실. ⓒ 한나영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학업을 돕는 '프로젝트 레스큐'가 실시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수요일 방과 후 두 차례씩.
미국 고등학교는 우리나라와 달리 수업이 일찍 끝난다. 아침 7시 45분에 시작된 수업은 오후 2시 54분이면 모든 학년이 다 끝난다. 이렇게 일찍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방과 후 음악이나 스포츠 등의 클럽활동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학생들에게 부과되는 숙제(homework)가 굉장히 많다.
일간지에도 학생들의 숙제가 지나치게 많다는 비판 기사나 만평이 종종 등장할 정도다. 학생들의 숙제는 교과서를 읽고 단순하게 문제를 푸는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장문의 에세이, 대형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런 숙제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거나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해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돕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프로젝트 레스큐다.
이 학교 교감 선생님인 제이 섭코(Jay Subko)는 프로젝트 레스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프로젝트 레스큐는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의 주요과목에서 D나 F를 받은 9학년 학생들을 위한 튜터링 제도입니다. 졸업을 하려면 버지니아 주에서 시행하고 있는 표준 학력 평가인 SOL(Standards Of Learning)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학교 성적이 나쁜 학생들은 어려움이 있지요. 바로 이런 학생들을 위해 개설한 것이 프로젝트 레스큐입니다."
공부를 잘 하나 못 하나 학원이나 과외 등의 사교육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실정을 잘 알고 있는 기자로서는 공교육에서 이런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있는 현실이 부러웠다.
물론 미국에도 우리나라와 같이 학교 성적이나 우리나라 수능에 해당되는 SAT 성적을 올리기 위한 사교육 현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큰 도시에는 한국 못지 않게 학원이나 과외 등의 사교육이 성행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인구 5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인 이곳에는 아예 학원이란 게 없는 만큼 공부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이 운용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했다.
방과후 학교 교사가 1대1로 학생들 학업 도와줘
▲ 공부하러 온 학생들에게 간식을 나눠주고 있는 유로첵 수학 선생님. ⓒ 한나영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프로젝트 레스큐에서 학생들을 돕고 있는 공부 도우미들이었다. 이들은 졸업에 필수적인 SOL 시험 과목을 가르치는 주요 과목 선생님들이다.
기자가 목격한 프로젝트 레스큐 현장에서는 이들 학교 선생님들이 방과후에 남아 1대1로 학생들의 학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선생님들에게는 약간의 보상이 주어진다고 한다. 시간당 21.66달러.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보충수업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도움을 받는 학생들이 전혀 돈을 부담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의 요구에 따른 맞춤식 과외가 이뤄진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다면 간식까지 제공되고 공부가 끝난 뒤에는 차량까지 제공되는 프로젝트 레스큐의 기금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섭코 교감 선생님의 설명이다.
"교사들의 보상이나 학생들의 간식은 모두 '21세기 그랜트(21st Century Grant)'에서 나옵니다. 이 기금은 학생들의 학업을 돕기 위해 마련한 재정보조 기금입니다. 모든 버지니아 주 공립학교가 신청할 수 있지요. 우리 학교도 이 기금 수혜자가 되어 2년 째 프로젝트 레스큐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레스큐에서 학생들을 돕는 사람은 선생님들만 있는 게 아니다. 도움을 주는 학생 자원봉사자도 프로젝트 레스큐의 중요한 다른 한 축이다.
학생이 학생을 가르친다고? 그렇다. 그냥 동급생이 아니고 선배들이 후배를 가르친다. 이들은 프로젝트 레스큐의 대상 학생인 9학년보다 상급 학년인 11학년이나 12학년 학생들이다.
학년 초에 있게 되는 학교등록일(Fee Day)에 프로젝트 레스큐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싶은 학생은 신청서를 내고 심사를 거쳐 보조 교사가 된다. 이들은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과목을 신청하여 가르치게 되는데, 비록 학생이지만 성적이 우수하고 이미 학교에서 인정을 받은 만큼 보조 교사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 학생들이다.
기자가 곁에서 본 이런 학생 도우미 제도는 우리나라에서도 시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자신만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다른 학생들을 돕는 자원봉사 활동을 통하여 자신이 가진 재능을 나누고 더불어 사는 법도 배울 수 있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복도에서 '하이' 인사라도 건네는 다정한 선배 되고 싶었다"
▲ '프로젝트 레스큐' 자원봉사자인 12학년 케이티 먼로. ⓒ 한나영
- 왜 프로젝트 레스큐의 자원봉사자로 지원을 했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 우리 학교는 그 동안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나도 학교에 뭔가 기여를 하고 싶었다. 또한 9학년 신입생들과도 교류를 갖고 싶었다. 나는 거리감이 있는 엄격한 선배가 아니라 복도에서 만났을 때 '하이'라는 인사라도 건넬 수 있는 다정한 선배가 되고 싶었다. 후배들에게 긍정적인 역할 모델이 되고 싶었던 점도 중요한 이유다."
- 프로젝트 레스큐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수학을 엄청 좋아하는 수학광이다. 후배들의 대수나 기하 등의 수학 관련 숙제와 공부를 봐 주고 있다."
- 언제부터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했나?
"금년부터 시작했다. 풋볼 시즌 중에는 마칭밴드에 속해 있어서 몇 번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시즌이 끝나고 밴드 활동도 없는 만큼 남은 기간 동안 레스큐 활동을 성실히 할 계획이다."
- 프로젝트 레스큐의 지원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그들도 만족하고 있는가. 이 프로그램이 학생들의 학업에 정말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좋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양할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레스큐에 대해 진정으로 고마워한다. 왜냐하면 성적이 오른 만큼 다음에는 다시 프로젝트 레스큐에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다. 마지 못해서 오는 학생들인데 그런 학생들은 이 프로그램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정확한 반응은 학생들의 여론조사를 통해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학생들의 기대를 얼마나 만족시켜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 시점에서 학생들의 반응을 일률적으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 학교가 학생들의 학업성취 만족도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선생님들도 참여하고 있는데 반응은 어떤가?
"프로젝트 레스큐에서는 학생들의 숙제도 도와준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고 특별한 숙제를 해야 할 경우에는 선생님들의 참여가 큰 도움이 된다. 프로젝트 레스큐는 교단의 권위를 갖고 있는 선생님과 나이 어린 학생 자원봉사자들 간의 환상적인 조합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대단히 바람직하고 학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 이런 자원봉사 활동이 대학에 갈 때 도움이 되는가. 혹시 그것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닌가? "레스큐 활동은 대학 지원서를 쓸 때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실제로 이번에 대학 원서를 낼 때 이력서에 프로젝트 레스큐 활동을 기재했다. 하지만 나는 이 활동 자체에 가치를 두고 있다. 내가 수학을 좋아하고 잘하는 만큼 내가 잘하는 능력을 발휘하여 내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돕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한다."
- 실제로 시간을 내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데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는가?
"물론이다. 어쩌면 후배들을 돕는 것보다 내가 더 큰 도움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게 될 때 먼저 내 자신의 개념이 분명하게 정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우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할 작정이다."
참가자는 성적 나쁜 학생이라는 놀림 받을 소지 있어
▲ 자원봉사 학생도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프지거 선생님이 설명을 해 주고 있다. ⓒ 한나영
올해로 2년째를 맞고 있는 프로젝트 레스큐는 학부모와 학생들간에 반응이 좋다는 것이 학교측의 분석이다. 이 학교 수학교사인 케빈 내프지거도 이 프로그램이 무엇보다 공부하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효과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견도 있는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프로젝트 레스큐는 원래 성적이 나쁜 학생들의 학업을 돕기 위해 시작되었던 만큼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들은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움을 받고 있는 학생들은 그런 반응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이다.
9학년생인 호세 로호의 말이다.
"제게는 성적이 중요해요. 대학에 가는데도 그렇고, 무엇보다 제가 좋아하는 스포츠 활동을 하는데도 필요하기 때문이죠. (참고로 미국 고등학교는 성적이 나쁘면 운동 선수로 뛸 수 없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들이 저를 비웃어도 저는 신경 안 써요."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도 이런 프로젝트 레스큐와 같은 프로그램을 시행할 수는 없을까. 물론 늦은 시간까지 학교 수업이 있는 우리나라 사정상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공교육에서 이런 식으로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의 학업을 돕고, 또한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후배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게 하면 어떨까. '공부해서 남 주자'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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