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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를 잃어버린 나, 어디로 돌아갈까

[나의 폐교이야기] 닫힌 교문... 친구들과 뛰놀던 운동장엔 비석같은 교적비만

등록|2007.12.26 21:11 수정|2007.12.26 21:11

▲ 여기가 정문인데…. 황동교패만이 선명하다. 학교 운동장은 온통 비닐 하우스다. ⓒ 안호덕


폐교(閉校). 교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창락초등학교'.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면서 바꿔달았음직한 교패가 아직 선명하다. 황동으로 만든 교패. 천년 만년을 꿈꾸었을 터이지만 녹 한번 앉을 시간도 되지 않아 교문이 닫혀 버렸다. 아이들은 떠났고 교문은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았다.

2003년 추석 때 딸아이를 앞세우고 찾은 모교(초등학교)의 모습이다.

학교 정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고 예전 교장선생님 사택 쪽으로 새로운 문이 나 있었다. 날렵하면서도 육중한 샷시문. 어슬렁거림을 이상하게 느낀 경비 아저씨가 다가온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예…. 이 학교 졸업생인데 들어가 보고 싶어서…."
"안 됩니다. 여기는 산삼 관련 벤처 사업하는 곳이라서 외부인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인즉, 여러 가지 연구 시설 등이 많아 보안상 외부인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물이나 시설물에는 안 들어가고 돌아만 보고 나올 것이라고 다시 아쉬운 소리를 해본다.

사정하는 내가 안되어 보이는 걸까. 금방 나오라는 다짐을 몇 번 받은 다음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 "연구 시설은 절대 사진 찍으면 안 됩니다."

천년을 꿈꾸었을 황동 교패...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민주야. 여기가 아빠가 다닌 학교야."
"그런데 왜 못 들어가게 해요?"
"이제는 학교가 아니거든."
"왜 학교가 아니예요?"
"학교 다닐 학생이 없거든."
"다 어디 갔어요? 왜 없어요?"

글쎄 왜 없는 걸까?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한 학년에 1반 2반을 나누어 40~50명씩  6학년까지 500명이 뛰어놀던 교정은 30년이 지난 지금 왜 텅 비어 있는 걸까?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겠다는 허울뿐인 공약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경제 논리를 앞세워 학생 줄기가 무섭게 학교문을 닫아 버리는 처사에서는 방값 못낸 셋방살림 내쫓는 냉혹함이 느껴진다. 수몰된 고향산천을 바라보는 실향민들이 이런 기분일까? 산란을 위해 태어난 강으로 돌아온 연어가 댐에 가로막힌 낭패감이 이런 것일까?

▲ 정문보다 더 뻔질나고 넘던 돌담장. 한 곳 허물어진 데 없이 아직 건재하다. ⓒ 안호덕


▲ 초등학교 때 심은 잣나무. 이제 잣나무를 타고 오를 악동이나 창문을 열고 소리칠 선생님. 누구 하나 없다. ⓒ 안호덕


예전 나무 바닥이 있던 건물은 헐려진 지 오래다. 빈 공터. 30년이 지난 추억을 찾기는 애초 나의 욕심인지 모른다.

경계선을 칼로 파낸 두 사람이 같이 앉던 책상. 한겨울 고구마·감자를 굽고 도시락을 덥혔던 갈탄난로. 검정 고무신이 조르르 놓인 신발장. 침묻혀 꼭꼭 눌러쓰던 누런 공책. 이런 것들은 이제 인사동 골목에 '학교종이 땡땡땡'이라는 찻집에서 찾는 게 빠를 것 같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학교 돌담. 교문보다 더 뻔질나게 타 넘어 다니던 돌담은 그대로다. 그 위에 주르르 심긴 잣나무들.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인가 심은 것 같은데. 쉬는 시간마다 주전자에 물 떠나르고…. 그게 30년이 더 되었다. 이제는 꼭대기에 탐스런 잣송이가 열었는데.

허나 뭣 하랴. 잣송이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나무를 타고 오를 악동들은 남아있지 않다. 창문을 열고 소리칠 선생님도 떠난 지 오래인 학교.

강화도 폐사지에 갔을 때, 나는 돌 틈에서 발견한 깨어진 그릇 조각 하나를 보면서 박물관에 진열된 온전한 도자기를 볼 때보다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옛 갈탄 창고는 없어졌지만 바닥에 아직도 박혀있는 갈탄 찌꺼기. 그 정도면 얼굴이 시커멓게 되도록 교실로 갈탄을 퍼 나르던 기억, 밑불을 만들려고 늦가을 전교생이 산에 솔방울을 따러 가던 기억들을 꺼내기에 충분하다.

이제는 온실이 되어버린 학교 운동장. 비 한번 오면 툭툭 불거져 나온 돌. 보드라운 마사토 한 차 사넣을 여유도 없는 학교에서는 연래 행사처럼 전교생이 냇가에 가서 흙을 떠 오는 날이 있었다. 남학생은 비료 포대에, 여학생들은 대야에 이고 지고 선생님에게 팔뚝에 도장을 몇 개씩 받고서야 일은 끝이 났다.

저 운동장 한 쪽에는 살구나무 몇 그루 심겨 있었다. 봄이면 살구꽃 피고 박새가 집을 짓고 초여름에는 살구를 따서 전교생에게 몇 개씩 나눠 주었다. 교실 앞 몇 아름된 버드나무, 후문 쪽 그보다 그 더 큰 버드나무는 놀이터이자 동네 어른들의 쉼터였다. 이제는 살구나무도 버드나무도 다 베어져 없다.              

2982명을 배출했던 이 학교의 교가는 잊혀진 노래

교무실 앞에는 펌프가 있었다. 언제 전기모터 수도가 들어온 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수도가 들어오고도 몇 년은 펌프질하는 펌프가 그 자리에 있었다. 축구를 하거나 운동장에서 흙장난을 하고나면 몰려가 웃통을 내놓고 머리를 감았다. 그 자리에 교적비가 서있다.

교적비. 학교에 흔적을 적어 놓은 비. '교적비. 창락초등학교 1937년 6월 22일에 개교하여 졸업생 2982명을 배출하고 1999년 9월 1일 폐교되었음. 1999년 9월 1일 경상북도교육감'

60여년 세월동안 3000명도 안 되는 학생을 배출하고 학교가 문을 닫은 것이다. 그 3000명이 안되는 졸업생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도 있고 삼촌들도 있고 형도 있고 동생도 있다.

경상북도 가장 북단의 초등학교. '소백산과 도솔봉에 정기를 받고~'로시작되는 교가는 영영 잊혀진 노래가 되었다. 빈 학교,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자리에는 무덤 비석 같은 교적비만 덩그렇게 서있다.

▲ 2982명 졸업생. 찾는 이 없는 학교에 교적비가 무덤가 비석처럼 서있다. ⓒ 안호덕


학교에 벤처기업이 들어서기 전에는 1년에 한번 추석 때 동창회가 꼭 있었다. 노래자랑도 하고 축구도 했다.

서울에 살던 사람들. 부산에 살던 사람들. 전국각지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1년에 한번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고 술도 마시고 공도 찼다.

졸업생 뿐만 아니라 그 주변 동네 사람들은 모두가 그 행사의 주인공이었다. 1년에 한번 자기에게 역인 끈들을 확인하는 자리. 그래서 내년에 다시 건강하게 돌아 올 것을 확인받고 확인하는 자리가 동창회였던 것이다.

이제 그조차도 없다. 1년 내내 꼭꼭 걸어 잠금 문. 동창들이 모일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고향이 있으나 옛 학교조차 찾을 수 없는 실학민(失學民)으로 살아가고 있는 3000명의 졸업생.

유난 떠는 걸까? 나한테는 마음의 고향인데

어디 학교를 잃어버린 것이 나 뿐이랴? 중학교도 없어지고 고등학교도 없어지는 마당에 그까짓 초등학교 하나 없어진 것을 가지고 너무 유별떨지 않는가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 같이 시골에서 보낸 사람들에게는 초등학교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중심이기도 했다. 떠나간 사람들은 마음의 고향을 빼앗겼으며, 남아있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중심을 잃어 버렸다.

학생이 없기 때문에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학교는 문을 닫아야 한단다. 거기에 투자하는 교육비를 다른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간다고 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앞뒤가 전도된 것이다. 농촌에서 아이가 줄어드는 원인은 방기한 채 법정학생수를 채우지 못하는 학교를 폐교시키는 것은 그마나 남아있는 농촌의 아이들을 도시로 내모는 처사에 다름 아니다.

닭을 양계장에 몰아서 한꺼번에 키우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하는 자본의 논리와 아이들이 줄어드니 학교를 없앤다는 정부의 논리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십수년 자본의 논리만을 앞세운 폐교정책은 정권의 일방적 횡포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국가의 지도자란 사람들이 불과 한 세대 앞도 바라보지 못하고 '둘도 많다 하나만 낳자'라고 반강제적 인구 삭감 정책을 강요하던 때가 오래되지 않았다. 도시 중심의 시장 경제 정책은 농촌을 국가의 머슴으로 전략시켰다. 자본·의료·문화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절대적 인구의 감소와 도시로 이주로 인한 상대적 인구 감소는 농촌 학교의 학생수를 급격하게 줄어 들게 만들었다.

역대 정권은 법정 학생수 미달 학교에 폐교의 메스를 들어댔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메스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있는 농촌의 삶을 송두리째 끊어 버리는 것이였다. 더 이상 농촌은 교육을 할 수 없는 땅이 되어 버렸다.

▲ 태극기가 펄럭이고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그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 안호덕


교육이 사라져버린 땅 '농촌'... 실용의 정부는 어떤 답을 할 것인가

곧 실용의 정부가 들어선다고 한다. 그 정부는 농촌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답을 내놓아야 한다. 살릴 가치가 있다면 더 이상의 폐교는 안 된다. 비어가는 학교를 어떻게 통합하고 교육 자본을 집중시킬까 하는 것보다, 비어가는 학교를 어떻게 다시 채울까 하는 고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교육을 살리고 농촌을 살리는 절실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교육은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성의 보장이 중요하다. 소규모 학교들이 특성있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수월성을 앞세운 대규모 학교, 도시 중심적인 학교 운영을 자제해야 한다.

"연탄재 발로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서울에서 자란 내 아이는 이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연탄재를 차본 없는 아이, 아직까지 불김이 남아있는 연탄재 구경조차 못한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이 시인처럼 따뜻한 감수성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뜨거운 연탄재 같이 자기를 태워 남을 따뜻하게 해주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 한다.
덧붙이는 글 나의 폐교 이야기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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