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장의 이슬된 청년은 과연 소녀를 죽였을까
[해외리포트] 의회토론 130년만에 사형제 폐지한 프랑스
▲ '호아 로 감옥'의 기요틴과 담장에 양각된 부조물. ⓒ 오마이뉴스 김당
"모든 인간은 국가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원칙과 제도 속에 공포해야 한다."
-알베르 카뮈, 사형에 관한 명상 1957
1976년 7월 28일 새벽 4시 13분. 마르세이유의 한 감옥. 크리스티앙 라누치. 향년 22세. 기요틴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마리아라는 8세 소녀 살인죄로 기소된 라누치는 프랑스의 사형제도가 폐지되기 5년 전인 1976년에 사형당하는 거의 마지막 사형수가 된다. 그 다음 해인 77년 6월과 9월 두 번에 걸쳐 실질적으로 마지막 처형이 이루어졌으니 마지막에서 3번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누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죄임을 주장하며 변호사에게 자기의 누명을 벗겨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무죄를 외치는 그의 마지막 절규는 아무 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드디어 사형 선고가 내려지던 날, 그의 절망은 극에 달한다.
차가운 감방 안에서 무릎을 끊고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날 줄을 몰랐던 라누치. 그는 죽기 전에 회개하는 의미로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어있는 신부와의 만남도 거절하고 사형수에게 최후로 권유하는 담배와 코냑주도 차갑게 거절한다. 모든 걸 포기하고 오로지 자기에게 과해진 죽음만을 받아들이기로 한 22세의 청년. 국가라는 제도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죽음의 통로를 지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 이후에도 그의 무죄에 대한 소문은 그치지 않았고 2년 후인 1978년 소설가 질 페로는 <빨간 스웨터>라는 책을 발표하여 라누치의 무죄를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밝혔다. 그리고 그의 사형 집행 20년이 지난 1996년 질 페로는 다른 라누치 변호자들과 함께 라누치의 사형선고 정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것은 이미 4번째에 해당하는 요구로 그동안 3번에 걸쳐 행해졌던 이전의 요구는 모두 기각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은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선고를 전제로 한다."
-빅토르 위고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을 받은 라누치의 경우 그가 받은 판결은 한 치의 실수도 없었는가? 라누치의 사망 이후 그의 무죄를 증명하는 사례가 속속들이 드러났다. 사건 당일 그의 혐의가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과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결정적인 증거물인 빨강 스웨터가 그의 사이즈가 아니었다는 점 등이다.
사실 그를 사형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은 당시 사회,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1976년 당시는 어린아이를 살해한 파트릭 앙리 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정부에서는 누군가를 징계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 다시 발생한 8세 여아 살인사건.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형벌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국가 망에 라누치가 걸려든 것이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정치범 사형제도 폐지한 프랑스
▲ 1848년 국회의원 신분으로 국회의사당에서 사형제 폐지를 역설한 빅토르 위고 ⓒ 빅토르위고
다음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사형폐지 찬성을 부르짖은 연설의 한 대목이다.
"사형이란 무엇인가? 사형처럼 인간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신호도 없다. 사형이 집행되고 있는 곳에서는 항상 인간의 야만성이 군림하고 사형이 드문 곳에서는 문화가 자리한다.
인류의 진화는 형벌의 감형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의 진화는 고문을 폐지함으로써 이루어졌으니 19세기에는 사형을 폐지함으로써 진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올 2월 (1848년) 이후 국민은 대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왕관을 불태운 다음 날(1848년 왕권을 전복한 혁명을 가리킴) 이들은 교수대를 불태우려고 했다. 본인은 사형제도의 폐지에 전적으로 찬성하고 표를 던지는 바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열정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사형제도 폐지는 그 당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참혹한 죽음을 자주 접했던 빅토르 위고는 1829년 27세의 나이로 <한 사형수의 마지막 날>이란 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소설에서 그는 한 사형수가 처한 극심한 정신 상태를 49개의 장으로 세세히 묘사함으로써 이미 사형제도에 반기를 든 바 있다.
"사형수! 벌써 5주째 난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이 생각만이 나를 사로잡고 있고 이 생각으로 인해 내 몸은 벌써부터 차가워지고 있으며 사형수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로 인해 내 몸은 벌써부터 휘청거리고 있다."-소설 <한 사형수의 마지막 날> 시작 부문
1981년에야 폐지된 프랑스 사형제도
1981년 5월 프랑스 제 5공화국 4대 대통령에 취임한 프랑소와 미테랑이 대선공약에서 지지했던 사형제도 폐지 시행에 착수하여 그해 10월 프랑스 사형폐지가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이미 사회당원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사형제도 폐지가 건의되었으나 당시 프랑스인들은 사형폐지 반대 쪽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국회에서 사형폐지 법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81년 10월 9일 일간지 <르 피가로>에 의하면 프랑스인의 62%가 사형폐지 반대 의견을 표출했다고 한다.
1949년 독일, 1965년 영국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니, 프랑스는 독일에 비해 무려 32년이 나 뒤늦게 사형제도를 폐지한 셈이다. 빅토르 위고가 폐지를 외쳤던 당시에 비해서는 장장 13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형수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까?
당시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사형은 기요틴에 의해 목이 참수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기요틴이란 단두대는 18세기 말에 기요텡이란 의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한 순간에 고통 없이 죽일 수 있는가로 고민했던 기요텡이 만들어낸 기요틴은 사형수의 목을 위에서 예리한 칼로 가차 없이 내리치는 방식이다. 이 기요틴은 그때까지 행해졌던 교수형이나 도끼 사용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기요텡 자신도 기요틴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 소문이 회자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기요텡은 한 번도 사형장에서 자신의 발명품이 이용되는 것을 보지 않았는데 프랑스에서는 1939년까지 사형이 공개처형으로 이루어져서 본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공개처형이 아니었어도 기요틴의 발명자로서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그는 한 번도 사형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1814년 사망 전까지 그는 자신의 발명품에 자신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에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했다는 후문이다.
"국가가 인간의 최후 운명을 결정적으로 재판할 권리란 없다. (...) 각 문화인의 속에는 석기시대의 소인이 들어있어 도둑질과 강간을 저지를 소질이 있으며 눈에는 눈이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짐승의 가죽을 두른 이 소인에게 우리 국가의 법을 좌우하도록 해서는 안될 것이다."-아르튀루 코에슬러, <사형에 관한 명상>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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