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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의 내면을 상대했던 두명의 탐정

[불멸의 탐정들 16] 피터 건즈 & 존 링글로즈

등록|2008.01.03 13:32 수정|2008.01.03 14:18

<빨강머리 레드메인즈>피터 건즈가 등장하는 장편 ⓒ 동서문화사

미국의 추리전문지 <히치코크 매거진>에서 '세계 10대 추리소설'의 목록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추리작가와 출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그 점수를 바탕으로 1위부터 10위까지 작품목록을 작성한 것이다.
실제로는 9위에 3편이 선정되어서 총 12편의 작품이 이 목록을 장식하고 있다. 여기에는 애거서 크리스티, 앨러리 퀸, 반 다인 등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영국작가 이든 필포츠가 쓴 두 작품 <빨강머리 레드메인즈> <어둠의 소리>가 이 목록에 들어 있다. 1862년에 태어난 이든 필포츠는 9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 추리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이든 필포츠는 주로 전원소설, 역사소설을 쓰다가 60세 때 <빨강머리 레드메인즈>, 63세 때 <어둠의 소리>를 발표했다.

추리소설과는 별로 연관이 없는 경력을 가진 노작가가 쓴 두 편의 소설, 이 작품들이 오늘날 추리소설을 논할 때 빠질 수 없게 된 셈이다. 이든 필포츠는 또한 당대의 다른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자신의 장편 <엔드하우스의 비극>에서 이 작품을 이든 필포츠에게 바친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다.

이든 필포츠의 두 작품이 걸작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 피터 건즈와 존 링글로즈도 덩달아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영국에서 전원작가로 명성을 떨쳤던 이든 필포츠인 만큼, <빨강머리 레드메인즈> <어둠의 소리>에서도 영국의 지방을 묘사하고 있다.

코담배를 즐기는 뚱뚱한 미국탐정, 피터 건즈

<빨강머리 레드메인즈>에서는 다트무어 지방의 고원을, <어둠의 소리>에서는 바람 부는 쓸쓸한 언덕의 호텔을 보여준다. 이든 필포츠가 묘사하는 지역은 단지 영국의 전원에 그치지 않는다. 이 두 작품에서는 모두 영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이든 필포츠는 영국의 전원을 묘사하는 것처럼 이탈리아-스위스 접경의 풍경, 코모 호수에 떠다니는 배, 낭떠러지가 있는 험준한 산악지역을 그리고 있다. 이든 필포츠도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를 여행한 경험이 있었을까. 영국에서 사고를 친 범인은 이탈리아로 달아나고, 탐정도 그를 쫓아서 이탈리아의 호수와 산악지역을 넘나들며 추적한다.

<빨강머리 레드메인즈>에 등장하는 탐정은 미국인 피터 건즈다.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피터 건즈는 백발의 뚱뚱한 노신사다. 미국인이지만 영국에서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다. 파이프 담배나 궐련이 아닌 코담배를 즐겨 피우고 그 습관 때문에 후각이 거의 마비된 상태다.

보스턴의 갱단을 상대하면서 왼쪽 손의 새끼손가락과 약손가락을 잃기도 했다. 영국의 젊은 형사와 함께 식사하면서 젊은이들의 왕성한 식욕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고기를 먹을 수 있고 맥주를 마실 수 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리워한다. 이미 전성기는 지나버린, 나이 많은 탐정이 바로 피터 건즈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 살이 쪘더라도 피터 건즈의 두뇌는 아직 살아 있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범죄현장을 누비면서 쌓아온 경험도 있다. 건즈는 레드메인 사건을 위해 영국에서 젊은 형사 마크 브렌던과 함께 팀을 이루고, 그와 함께 이탈리아로 날아가게 된다. 레드메인 사건에서 마크 브렌던은 이미 한차례 실패한 경력이 있다.

건즈는 브렌던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고 자신의 견해를 설명해준다. 스토리에 흥미를 느끼는 바람에 메커니즘을 못 보았다, 사실에 관한 수집을 게을리 했다, 1 더하기 2는 때로는 21이 되기도 하고 12가 될지도 모른다, 등의 이야기를 브렌던에게 들려준다. 브렌던은 피터 건즈의 명성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건즈가 해주는 조언에는 어쩔 수 없이 불만을 느끼기도 한다.

브렌던이 그 동안 혼자서 담당하고 있던 레드메인 사건은 그만큼 수수께끼 투성이었다. 피터 건즈는 브렌던에게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의심해 보라고 말한다. 모든 단서들이 한가지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만사가 너무 순조로울 때는 일단 의심해 볼일이다. 이것은 직무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인생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유쾌한 인상을 가진 영국탐정, 존 링글로즈

<어둠의 소리>존 링글로즈가 등장하는 장편 ⓒ 동서문화사

피터 건즈와 달리 <어둠의 소리>에서 활약하는 존 링글로즈는 영국인이다. 런던경시청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고 이제는 은퇴한 55세의 탐정이다. 존 링글로즈의 은퇴는 커다란 이슈였기 때문에 신문에도 실릴 정도였다. 동료들이 성대한 송별식을 열어주었고, 런던경시총감이 직접 금시계를 선물할 만큼 그는 런던경시청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172cm의 키에 여윈 체격이지만 강하고 매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링글로즈는 은퇴했기 때문에 당분간 한적한 호텔에 머물려고 한다. 그곳에서 사냥을 즐기며 자신의 경험담을 모아서 책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호텔에 머문 첫날 밤, 한 어린아이가 공포와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다. 자제력이 강한 링글로즈지만, 학대받는 어린아이 앞에서는 그 자제심이 사라지고 만다. 다음 날부터 링글로즈는 이 사건에 흥미를 갖고 주위 사람들을 상대로 탐문에 들어간다.

링글로즈는 이런 식의 탐문수사에 능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사회 어떤 계급의 사람과도 친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알지 못하는 사람과도 잘 어울리고, 항상 유쾌한 인상을 유지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편이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상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은 링글로즈에게 중요한 정보를 자신도 모르게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링글로즈는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능숙하게 늘어놓는다. 낯선 사람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속인다. 과거의 경력을 교묘하게 위장하고 적당히 외모를 숨긴 채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눈다.

링글로즈의 태도가 워낙 그럴듯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한다. 링글로즈는 범인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범인의 심리를 파악하고자 한다. 심리가 모든 것을 인도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범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상태, 그것을 바탕으로 승패가 결정된다고 믿고 있다.

노작가 이든 필포츠가 창조한 두 명의 탐정

이 점은 피터 건즈와 존 링글로즈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두 탐정 사이에 공통점도 있다. 가장 커다란 공통점은 모든 것을 의심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도 믿지 않고 모든 진술이 거짓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탐정은 의심을 바탕으로 사건을 추적해가지만, 범인을 검거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피터 건즈는 상대방의 거짓말을 한눈에 간파하고 그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댄다. 반면에 존 링글로즈는 범인의 심리에 관심을 갖고 그와 한바탕 조마조마한 심리전을 벌이려고 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범인의 죄의식을 자극하고 공포심을 유발한다. 의도적으로 범인을 도발하게 만드는 거짓문서를 만들며 그의 반응을 지켜본다.

어느 쪽이건 결과는 마찬가지다. 두 탐정은 모두 자신의 의도대로 사건 수사를 마무리하지만,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따르게 된다. 그 희생은 아마도 탐정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거나, 희생자의 반응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너무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온갖 산전수전 다 겪어온 베테랑 형사 출신이지만, 이들에게도 인간적인 한계는 있었던 셈이다.

젊은 시절부터 전원작가로 이름을 날렸던 이든 필포츠는 왜 60세가 되어서야 추리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그 동안 자신의 작품에서 영국의 쓸쓸한 지방을 묘사했던 것처럼, 추리소설을 통해서 범죄자의 황량한 내면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빨강머리 레드메인즈>와 <어둠의 소리>에서 작가는 범죄자의 심리를 그려보이고 있다.

돌이키지 못할 자신의 범죄가 떠오를 때마다 공포에 질리고, 회한에 시달리는 범죄자.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떳떳하기만 한 범죄자. 탐정 피터 건즈와 존 링글로즈는 그런 사람들을 추적해서 결국은 법정에 세우고야 만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어쩔 수 없다. 피터 건즈의 이야기처럼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선이건 악이건 완벽한 것은 거부되는 법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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