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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구가 쓴 동시 세계

[서평] 이문구의 동시집 <이상한 아빠1·2>(솔출판사,1997)

등록|2008.01.03 15:09 수정|2008.01.03 15:10

이상한 아빠2이문구 동시집 <이상한 아빠1,2>(솔출판사) ⓒ 솔출판사

연작소설 <관촌수필>과 <우리동네>로 유명한 고(故) 명천 이문구 선생께서 생전에 동시집을 몇 권이나 펴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가 펴낸 동시집 <개구쟁이 산복이>(창작과비평사,1988)와 <이상한 아빠1·2>(솔출판사,1997) 가운데 <이상한 아빠1·2>를 다시 읽는다.

복잡 다변한 현실 세계의 자잘한 세목들을 장중한 호흡으로 구성지게 엮어내던 소설가의 동시는 어떤 모습일까요?

  먼 길 차 소리
  베게하고
  공원에서 조는
  갈꽃 같은 노인
  굽은 채 누운
  외딴 그림자.


- '공원에서' 전문(1:69)

  송이송이 함박눈
  소복소복 장독대
  오목오목 발자국
  두런두런 말소리
  조용조용 새소리
  둥글둥글 눈사람.


- '눈 온 날' 전문(1:75)

위 동시집을 읽어 보면 이문구 선생의 동시에 대한 우리의 예상이 빗나간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인용한 위 시들은 외형상 너무도 간결한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동시의 내용에 대한 선명한 인식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작가의 만만치 않은 시적 표현력 때문입니다. 서울의 도심지 탑골공원같은 데서 힘차게 날지도 못하면서 구구거리는 비둘기를 벗 삼아 하루의 시간들을 지워가는 가엾은 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합니다.

시들어 떨어지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갈꽃'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네의 처량함을 효과적으로 창조하는 시어입니다. '외딴'이라는 관형어와 '그림자'라는 명사는 노인네의 외로움을 더욱 짙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6행의 짧막한 '눈 온 날'은 참으로 아름다운 동시입니다. 의성어, 의태어의 첩어 하나와 명사 하나로만 각 행(行)을 이룬 위 시는 불필요한 언어의 군더더기 하나 없이 눈 온 날 아침처럼 깔끔합니다. 이는 상황의 한 장면을 표현하는데 여러 가지 말들을 사용하지 않고 거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을 애써 골라 쓴(각 행(行)의 첫째 음보(音步)의 효과적인 첩어 사용) 덕분입니다.

시상의 전개가 상황의 시간적 진행에 겹쳐져 이루어진 위 시는 환상적 평화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장독대에 송이송이 함박눈이 내린 날 아이들이 오목오목 발자국을 찍으며 새소리와 함께 둥글둥글 눈사람을 만들어낸 시적 공간은 삶의 어떤 어긋남이나 끊김 없이 둥글고 아늑한 태아의 공간처럼 평화로운 환상적인 공간입니다.

이렇듯 소설 창작에 비해 시 창작에는 무엇보다도 압축되고 간결․직절한 언어 운용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와 함께 사물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응집하는 눈(目)도 필요로 합니다.

  섣달 그믐날
  오는 눈
  목화송이눈
  울긋불긋 가을 옷
  벗은 나무들
  새하얀 솜저고리
  새해 설빔이어요.

  까치 설날
  오는 눈
  목화송이눈
  칼바람에 얼어 자던
  보리밭들도
  새하얀 솜이불
  새해 설빔이어요.


- '섣달 그믐' (2:120)

춥고 고난의 상징인 '눈'이 위 시에서는 '목화송이'라는 말의 수식을 받아 헐벗은 나무에 옷을 입히는 솜저고리, 칼바람에 언 보리를 녹이는 솜이불의 따스함, 사랑의 이미지로 변이되어 나타납니다. 동시의 시적 공간은 이렇듯 칼바람의 공간이 아닌 따스한 솜이불의 공간입니다.

마을 안 커다란 고목나무를 통하여 앞집 할머니와 뒷집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노래한 시 '고목나무'에도 작가의 따스한 눈길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여름내 부산한
  마을 안 고목나무
  밤에도 일하는
  앞집 할머니 같네.
  언제나 바람 이고
  수런수런
  한 이야기 또 하는
  앞집 할머니 같네.

  겨우내 한가한
  마을 안 고목나무
  나간 식구 기다리는
  앞집 할아버지 같네.
  언제나 뒷짐지고
  대답없이
  들은 이야기 또 듣는
  앞집 할아버지 같네.


- '고목나무' 전문(2:84-85)

밤에도 일하며 한 이야기 또 하는 할머니를 여름철 부산한 고목나무로(1연), 나간 자식들을 기다리며 들은 이야기 또 하는 할아버지를 겨울철 한가한 고목나무로 그려내고 있는(2연) 위 시는 겉으로 드러난 형식까지도 고르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1연과 2연이 적절한 대구(對句)를 이루면서 각 행의 길이나 음보도 통일되어 시를 읽는 이에게 안정감과 시의 내용 이해에도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아동문학(Childrens literature)을 "작가가 아동이나 동심(童心)을 가진 아동다운 성인(成人)에게 읽히기 위해 쓴 모든 저작(著作)"으로 볼 때, 이문구 선생의 동시는 주로 동심을 가진 성인에게 그 창작의 초점이 모아진 것 같습니다.

  두 노인만 사시는
  오두막집
  밤 깊어 도란도란
  누가 왔을까.
  들리다 말다
  무슨 얘길까.
  별밖에 없는
  외딴 마을에
  잠 안 오는 두 노인
  하고 또 하는 소리.


- '오두막집' 전문(1:55)

위 시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시집에 내놓아도 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작품입니다. 길이가 짧고 내용은 단순해 보이지만 위 시는 결코 단순한 시가 아닙니다. 하루하루의 도시 생활에 얽매인 성인들에게 고향집을 홀로 지키고 계시는 노모를 생각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도록 적시게 하는 어떤 시보다도 감동의 진폭이 큰 작품입니다. "쉽고 소박하고 깨끗한 마음의 동시는 난해한 말과 지나치게 지적인 사상으로써 이루어진 성인의 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는 지적을 실감케 하는 작품입니다.

이문구 선생의 동시집을 정독하면서 필자가 느낀 점은 선생이 진작부터 소설이 아닌 동시를 써 온 작가였더라면 소설에서 얻고 있는 지금의 명성보다는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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