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성명을 쓴 16세기 조선인이 있었다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당시면 아직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시기인데, 어떻게 조선인이 그런 서양식 성명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안토니오라는 이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코레아라는 성은 또 무엇인가? 대체 어떤 이유에서 16세기 조선인이 이런 성명을 갖게 된 것일까?
전근대 시대의 전쟁이 대개 다 그러하듯이 임진왜란 당시에도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살상을 당했다. 그리고 대략 10만 명 정도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납치되었다는 연구성과도 있다.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도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 끌려간 어린이 중의 하나였다.
일본에 끌려갔으면 일본 성명을 쓸 일이지, 왜 안토니오 코레아 같은 서양식 이름을 쓴 것일까? 그 점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납치의 실상을 알려주는 기록 중 한 가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임란 당시에 피랍된 성리학자 강항이 쓴 <간양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최고의 일본측 전문가로 알려진 기타지마 만지가 1995년에 펴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서 인용된 내용임을 밝힌다.
“그곳(전라남도 무안군)에는 적선(일본 선박) 6, 7백 척이 수리(數里)에 걸쳐 꽉 차 있었고, 각 배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왜병과 거의 반반을 이루고 있었다.”
6, 7백 척의 배에 조선인 남녀와 일본군이 각각 절반씩 타고 있었다면, 강항이 이 장면을 목격했을 당시에 전남 무안에서 피랍된 조선인들의 규모가 300~350척의 배에 실을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강항은 “포로들의 절규가 산과 바다를 울릴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피랍자 중 일부가 일본에서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점이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1596년 12월 3일 나가사키에서 예수회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기타지마 만지가 인용한 이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프로이스는 나가사키에서 1300명의 조선인 피랍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루이스 셀케이라라는 또 다른 기독교 선교사가 마카오 교회 등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납치를 부추긴 요인으로 포르투갈 노예상들의 활약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기타지마 만지가 인용한 루이스 셀케이라의 편지에 의하면, 나가사키에 거점을 둔 포르투갈 상인들이 조선인들을 헐값에 사서 마카오로 ‘운송’하였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인들이 일본 각지에 있는 조선인 피랍자들을 나가사키로 데려오는 현상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직접 조선으로 건너가서 일본군 점령지역 하의 조선인들을 강제로 납치해서는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아넘기는 일본인들마저 나타났다고 한다. 일본에 ‘물건’이 부족해지자 직접 조선 현지에 가서 ‘물건’을 구해다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넘기는 중간 노예상들이 생겨난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해 연구하는 어느 한국인 학자의 말에 따르면, 일본군 점령 당시의 부산에서도 서양인들이 조선인 노예를 사들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 상당수는 마카오나 유럽 등지로 끌려가 노예생활로 일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벌써 400여 년이 흘러 10~15세대가 정도가 지났으므로, 그들의 후손은 이미 오래 전에 현지인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10~15대 선조에게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조선에서 일본을 거쳐 유럽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에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꼬마아이가 있었다고 기타지마 만지는 소개했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세계를 일주하던 프랜치스코 카룰렛튀라는 이탈리아 상인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10개월 정도 체류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노예시장에서 조선인 꼬마 5명을 사서 일본을 떠났다. 그 당시는 성인 장정보다도 어린아이의 몸값이 더 비쌌다고 위의 한국인 학자가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이탈리아 상인은 마음이 좋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는 도중에 인도 고아에 들른 그는 그곳에서 꼬마 4명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고 한다. 인도 고아에서 고아의 신세가 된 그 4명의 꼬마는 “이곳에서 풀어줄 것 같으면 조선에다가 풀어줄 일이지”라며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상인의 입장에서는 전쟁 중인 조선에 들어갈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측에 그 아이들을 넘겨주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인도에 내려주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에는 풀어줄 마음이 없었지만, 가는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인도에서 풀려난 4명의 꼬마 말고 또 하나의 꼬마가 있다. 그 아이는 카룰렛튀의 고향인 이탈리아까지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머지 인생을 살게 되었다.
이 조선인 꼬마는 이탈리아에서 안토니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에게 코레아라는 성이 붙여진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저 아이 어디서 왔느냐?”고 하면 “코레아에서 왔다”고 했을 것이다.
밀양에서 시집 온 사람이 밀양댁이라고 불리듯이, 코레아에서 왔기 때문에 코레아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씨니 이씨니 박씨니 하는 것으로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냥 코레아라고 부르는 것이 그 아이를 기억하는 데에 좋았을 것이다.
일본에서 왔다고 무조건 저팬이란 성을 붙이고 중국에서 왔다고 무조건 차이나라는 성을 붙인다면, 붙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편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붙임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폭력으로 느껴졌을까?
위와 같이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는 임진왜란의 강풍에 밀려 조선에서 일본으로, 다시 인도 고아에서 이탈리아까지 떠밀려 다니면서 결국 유럽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원래 이름을 상실한 채 안토니오 코레아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의 후손들도 아버지의 성을 따서 코레아 집안의 일원으로 살게 되었다.
16세기 안토니오 코레아의 사례를 보면서, 시장개방 압력을 받고 있는 21세기 한국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향후 전쟁보다 더 무서운 시장의 침탈 때문에 잘못하다가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원래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사람들이 생겨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 FTA 등 시장개방을 지지하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민족국가는 허구’라면서 국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언젠가는 인류가 국경을 허물고 하나의 공동정부를 이루어야 하겠지만, 민족국가가 국민을 제약하는 측면이 있는 한편 국민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에 지금 단계의 민족국가 해체론이 얼마나 성급한가 하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는 그에게 ‘나라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가 약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이탈리아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 어린아이가 겪었을 온갖 고초를 생각하면, 비록 ‘필요악’이기는 하지만 보호자로서의 국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개방 이후에 미국 등이 한국인들을 보호해주리라는 뚜렷한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국경의 해체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외국어 사용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하는 지식인들의 입장에서는 시장개방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겠지만, 외국어나 외국문화에 낯선 일반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질 것이다.
별다른 보호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외국 자본과 외국 문화가 밀려온다면, 미래의 한국에는 숱한 안토니오 코레아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 징후는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서울에 있는 기업체 안에서 영어를 써야 하고 또 가명일지라도 외국 이름을 써야 하는 현대판 안토니오 코레아들이 지금도 얼마든지 있다. 외국계 자본이 한국 기업을 장악함에 따라 나타난 결과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 현대판 ‘안토니오 코레아’로서 사는 사람들. 연약한 한국 시장을 보호하지 않고 또 연약한 한국 국경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21세기 한국인들 중의 상당 부분은 또 다른 안토니오 코레아로서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 당시면 아직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시기인데, 어떻게 조선인이 그런 서양식 성명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안토니오라는 이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코레아라는 성은 또 무엇인가? 대체 어떤 이유에서 16세기 조선인이 이런 성명을 갖게 된 것일까?
일본에 끌려갔으면 일본 성명을 쓸 일이지, 왜 안토니오 코레아 같은 서양식 이름을 쓴 것일까? 그 점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납치의 실상을 알려주는 기록 중 한 가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임란 당시에 피랍된 성리학자 강항이 쓴 <간양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최고의 일본측 전문가로 알려진 기타지마 만지가 1995년에 펴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서 인용된 내용임을 밝힌다.
“그곳(전라남도 무안군)에는 적선(일본 선박) 6, 7백 척이 수리(數里)에 걸쳐 꽉 차 있었고, 각 배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왜병과 거의 반반을 이루고 있었다.”
6, 7백 척의 배에 조선인 남녀와 일본군이 각각 절반씩 타고 있었다면, 강항이 이 장면을 목격했을 당시에 전남 무안에서 피랍된 조선인들의 규모가 300~350척의 배에 실을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강항은 “포로들의 절규가 산과 바다를 울릴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피랍자 중 일부가 일본에서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점이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1596년 12월 3일 나가사키에서 예수회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기타지마 만지가 인용한 이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프로이스는 나가사키에서 1300명의 조선인 피랍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루이스 셀케이라라는 또 다른 기독교 선교사가 마카오 교회 등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납치를 부추긴 요인으로 포르투갈 노예상들의 활약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기타지마 만지가 인용한 루이스 셀케이라의 편지에 의하면, 나가사키에 거점을 둔 포르투갈 상인들이 조선인들을 헐값에 사서 마카오로 ‘운송’하였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인들이 일본 각지에 있는 조선인 피랍자들을 나가사키로 데려오는 현상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직접 조선으로 건너가서 일본군 점령지역 하의 조선인들을 강제로 납치해서는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아넘기는 일본인들마저 나타났다고 한다. 일본에 ‘물건’이 부족해지자 직접 조선 현지에 가서 ‘물건’을 구해다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넘기는 중간 노예상들이 생겨난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해 연구하는 어느 한국인 학자의 말에 따르면, 일본군 점령 당시의 부산에서도 서양인들이 조선인 노예를 사들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 상당수는 마카오나 유럽 등지로 끌려가 노예생활로 일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벌써 400여 년이 흘러 10~15세대가 정도가 지났으므로, 그들의 후손은 이미 오래 전에 현지인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10~15대 선조에게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조선에서 일본을 거쳐 유럽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에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꼬마아이가 있었다고 기타지마 만지는 소개했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세계를 일주하던 프랜치스코 카룰렛튀라는 이탈리아 상인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10개월 정도 체류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노예시장에서 조선인 꼬마 5명을 사서 일본을 떠났다. 그 당시는 성인 장정보다도 어린아이의 몸값이 더 비쌌다고 위의 한국인 학자가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이탈리아 상인은 마음이 좋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는 도중에 인도 고아에 들른 그는 그곳에서 꼬마 4명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고 한다. 인도 고아에서 고아의 신세가 된 그 4명의 꼬마는 “이곳에서 풀어줄 것 같으면 조선에다가 풀어줄 일이지”라며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상인의 입장에서는 전쟁 중인 조선에 들어갈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측에 그 아이들을 넘겨주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인도에 내려주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에는 풀어줄 마음이 없었지만, 가는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인도에서 풀려난 4명의 꼬마 말고 또 하나의 꼬마가 있다. 그 아이는 카룰렛튀의 고향인 이탈리아까지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머지 인생을 살게 되었다.
이 조선인 꼬마는 이탈리아에서 안토니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에게 코레아라는 성이 붙여진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저 아이 어디서 왔느냐?”고 하면 “코레아에서 왔다”고 했을 것이다.
밀양에서 시집 온 사람이 밀양댁이라고 불리듯이, 코레아에서 왔기 때문에 코레아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씨니 이씨니 박씨니 하는 것으로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냥 코레아라고 부르는 것이 그 아이를 기억하는 데에 좋았을 것이다.
일본에서 왔다고 무조건 저팬이란 성을 붙이고 중국에서 왔다고 무조건 차이나라는 성을 붙인다면, 붙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편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붙임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폭력으로 느껴졌을까?
위와 같이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는 임진왜란의 강풍에 밀려 조선에서 일본으로, 다시 인도 고아에서 이탈리아까지 떠밀려 다니면서 결국 유럽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원래 이름을 상실한 채 안토니오 코레아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의 후손들도 아버지의 성을 따서 코레아 집안의 일원으로 살게 되었다.
16세기 안토니오 코레아의 사례를 보면서, 시장개방 압력을 받고 있는 21세기 한국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향후 전쟁보다 더 무서운 시장의 침탈 때문에 잘못하다가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원래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사람들이 생겨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 FTA 등 시장개방을 지지하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민족국가는 허구’라면서 국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언젠가는 인류가 국경을 허물고 하나의 공동정부를 이루어야 하겠지만, 민족국가가 국민을 제약하는 측면이 있는 한편 국민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에 지금 단계의 민족국가 해체론이 얼마나 성급한가 하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는 그에게 ‘나라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가 약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이탈리아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 어린아이가 겪었을 온갖 고초를 생각하면, 비록 ‘필요악’이기는 하지만 보호자로서의 국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개방 이후에 미국 등이 한국인들을 보호해주리라는 뚜렷한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국경의 해체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외국어 사용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하는 지식인들의 입장에서는 시장개방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겠지만, 외국어나 외국문화에 낯선 일반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질 것이다.
별다른 보호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외국 자본과 외국 문화가 밀려온다면, 미래의 한국에는 숱한 안토니오 코레아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 징후는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서울에 있는 기업체 안에서 영어를 써야 하고 또 가명일지라도 외국 이름을 써야 하는 현대판 안토니오 코레아들이 지금도 얼마든지 있다. 외국계 자본이 한국 기업을 장악함에 따라 나타난 결과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 현대판 ‘안토니오 코레아’로서 사는 사람들. 연약한 한국 시장을 보호하지 않고 또 연약한 한국 국경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21세기 한국인들 중의 상당 부분은 또 다른 안토니오 코레아로서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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