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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기억해주는 사람이 사는 도시, 바르셀로나

[배추의 도시여행기①]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록|2008.01.07 09:54 수정|2008.01.07 09:54

바르셀로나 나이키 숍 다국적기업인 나이키와 바르셀로나의 공존이라 해야 할까? ⓒ 배정민


지도를 펼쳐들었을 때 한낮 점으로 표현될 뿐인 도시는 그 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어느덧 평면적인 2차원에서 입체적인 3차원의 공간으로 변형된다. 뿐만 아니라 만약 그 도시에 나와 같은 생각을 공유했던 친구나 지인이 살고 있다면, 그 도시는 언제나 마음 속에 살아남게 된다. 바르셀로나는, 내게 그런 도시였다.

마드리드를 거쳐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하게 물갈이를 하고 있었다. 무리한 일정이 익숙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외국음식에 대한 적응력이 약한 한국 남성 특유의(!) 습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공항 국내선 청사를 나오는 순간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중해에 면한 이 해안도시가 가지고 있는 쾌적한 날씨를 두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는 것은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에 대한 명백한 위법행위라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는 그렇게 내게 온화한 바람처럼 다가왔다.

카탈루냐 인의 도시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를 연고로 하고 있는 FC바르셀로나와 수도 마드리드를 연고로 하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축구 더비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바르셀로나가 카탈루냐 지역의 대표 도시이고, 언어 역시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집단적 정체성은 스페인이 아니라 카탈루냐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유럽의 에라스무스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소재로 삼은 영화 <스패니쉬 아파트먼트>에는 한 여학생이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교수에게 카탈루냐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강의를 해 줄 것을 요구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교수는 가차없이 그 외국인 학생의 요청을 무시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 바르셀로나가 '카탈루냐 인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카탈루냐의 정체성은 강력하며, 스페인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위상은 이러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적 성격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성격을 알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이 아니라 인도에서였다.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쓰나미 구호 캠프로 달려갔던 2005년 여름, 인도의 한 어촌에서 만났던 스페인 친구 엘레나는 자신을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카탈루냐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때만 해도 장난이려니 했던 나였으나, 워크캠프 참자 프로필을 적는 란에 그녀가 국가명을 'SPN(스페인의 약자)'이 아니라 'CAT(카탈루냐)'라고 적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바르셀로나를 방문하게 되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이 이 카탈루냐인의 도시에서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이었다. 이미 스페인으로 출발하기 전에 엘레나에게 이메일을 보내 둔 상태였고, 다행히 시간이 맞아 바르셀로나를 떠나기 전날 밤에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나오는 첫 마디는 예상대로, 'Welcome to Barcelona and Welcome to Cataluna!'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 바르셀로나의 명동과 같은 람블라스 거리의 야경 ⓒ 배정민


젊음과 다양성이 바르셀로나의 밤을 점령하다

엘레나를 만난 시간은 밤 9시가 한참 넘어서였다. 그런데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해 길을 따라나섰다. 스페인에서의 일반적인 식사시간은 저녁 8시 이후라고 하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밤 10시 무렵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레스토랑들은 흥미롭기만 하다.

그런데 이 시간대에 저녁을 먹을만한 식당을 찾는 것 자체가 일이 되고 말았다. 엘레나와 내가 길을 나선 날은 다음날이 휴일인 관계로 레스토랑들에 이미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는 상황이었던 데다가, 카탈루냐 고유의 음식을 먹여주고 싶어하는 엘레나의 의사와는 달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로코, 이란, 파키스탄, 인도, 팔레스타인 등 지역도 다양한 중동 음식점들 혹은 피자나 스파게티 집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골목골목 들어서 있는 수많은 레스토랑들을 드나든 지 1시간이 지날 무렵 겨우겨우 비어있는 곳을 찾아서 들어가게 되었다.

오랫만에 만났으니 수다가 그치질 않는다. 인도의 한 어촌에서 우연히 만났던 우리가 다시 바르셀로나에서 만나게 될 수 있었을까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들, 전세계 20대 젊은이들의 공통된 관심사인 직장과 취업, 향후 진로 문제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나중에는 엘레나의 친구들까지 합세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호텔에 들어왔던 시간이 새벽 3시 쯤이었는데, 놀라웠던 것은 그 시간까지 버스가 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밤을 사랑하는 스페인 사람들다운 대중교통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까?

바르셀로나의 야경불빛으로 인해 도시는 더욱 빛난다. ⓒ 배정민


바르셀로나에서 머문 시간은 정말로 짧았지만, 그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이 행운처럼 느껴질 정도로 바르셀로나는 멋진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가우디의 멋진 건축물들이나 몬주익 언덕에서 바라보는 석양 역시 분명 잊지 못할 경험이었지만, 그것보다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그 도시에서 매일 아침을 맞고 하루를 힘차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도시'라는 명사가 삭막하고, 메마르고, 차갑다고 느낀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우리가 배운 것처럼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그렇게 일반화된 비판을 받을 만큼 도시는 차가운 곳이 아니다. 가슴이 뜨거운 이들이 몰려 있는 곳, 수많은 꿈과 열정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 도시이다. 전 세계의 도시들을 발로 밟으며 그 열정들을 피부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그리고 그 꿈의 시작은 다름아닌 나를 기억해주는 친구가 있는 곳, 바르셀로나에서부터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민의 블로그 Life is Beautiful(http://www.b4sunrise.pe.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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