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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년 100m씩 후퇴한다

<유럽기행 20> 스위스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기행

등록|2008.01.07 10:05 수정|2008.01.07 12:11
내 유럽 여행의 꿈은 알프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알프스 아이거(Eiger, 3970m) 북벽의 산허리를 뚫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산악열차는 터널 속을 계속 달리고 있었다. 산악열차는 마치 땅굴 속 7.2km를 기어가는 긴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기어식으로 설치된 이 산악열차는 최대경사 25°의 급경사면을 쉬지 않고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암반 속의 철길에서 스위스인들의 도전 정신에 감탄하고 있었다.

아이거반트 역에서 내려다본 전경.전망창 아래로 그린델발트가 아스라이 보인다. ⓒ 노시경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행 산악열차는 관광객들이 겪을 기압차를 견디게 하기 위해서 중간 역인 아이거 반트(Eigerwand, 2865m) 역에서 5분간 정차를 했다. 나는 딸과 함께 내려 아이거 북벽의 아래를 조망할 수 있는 관측창으로 뛰어갔다. 아이거 북벽 약 1800m 아래 쪽에 있는 그린델발트(grindelwald) 마을이 마치 하나의 점같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나의 눈 바로 앞에는 마치 칼로 잘린 것 같은 짙은 갈색의 석회암 절벽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절벽은 중생대 쥐라기 시대에 만들어진 석회암이었다. 이 석회암은 눈앞의 알프스가 쥐라기 당시에는 바다였다는 표시이다. 나는 살아 움직이는 지구의 표면을 내다보고 있었다.

알프스의 만년설은 거의 직각에 가까운 절벽에 쌓이지 못하고, 절벽 아래쪽 산허리에 높게 포개어져 있었다. 푸른 하늘과 함께 알프스에 걸린 흰 구름을 배경으로 흰 눈이 마치 꿈같이 쌓여 있었다. 그 정경은 마치 비행기에서 구름 아래의 지구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이 몽롱했다.

아이스미러 역전망창 밖으로 거대한 알프스가 있다. ⓒ 노시경


산악열차는 캄캄한 터널 속으로 조금 더 나아가다가 멈춰 섰다. 아이스 미러(Eismeer, 3160m) 역에서 다시 5분간 정차. 열차가 잠시 쉬어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알프스의 산경을 보러 뛰어나갔다. 내가 왜 뛰어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설레는 마음이 나를 뛰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이스미러 역 설경.눈앞으로 알프스의 만년설이 켜켜이 쌓여 있다. ⓒ 노시경


이 융프라우 철로는 1896년에 아돌프 구에르 첼러(Adolf Guyer-Zeller)라는 엔지니어에 의하여 착공되어 1912년에 완공된 역사적인 철로이다. 당시 융프라우 철로는 산비탈을 깎지 않고 화강암 암반 속으로 철길을 내면서, 알프스의 자연을 보호하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열차로 다시 돌아오면서 보니, 아이스미러 역 전망대 한쪽에 아이스미러 역 백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 설명판이 붙어있었다.

아이스미러 역 설명판.해머를 들고 동굴을 파내려간 역사를 볼 수 있다. ⓒ 노시경

이 설명판에는 무려 16년 동안 해머로 바위를 쪼아 만든 철로의 개통 당시 모습과 함께 뻥 뚫린 아이스 북벽의 전망창이 아스라한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사진 속의 터널 건설 인부가 자그마한 해머로 아이스 북벽을 내려치는 사진은 조금은 무모해 보였지만, 저 해머로 수없이 내려친 움직임이 이 장엄한 동굴을 만들었을 것이다.

백년 세월 전, 관광객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을 당시에, 스위스인들은 4000m가 넘는 봉우리에 어떻게 철길을 놓을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저 아름다운 봉우리까지 철길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서 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호기심은 알프스의 많은 것을 변하게 했고,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은 현재의 스위스인들에게 많은 경제적 풍요를 선사하고 있었다.

나의 딸, 신영이는 오른손으로 ‘V’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알프스의 높은 높이가 신영이에게 묘한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신영이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강한 희열을 느끼게 하는 저 눈밭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의 풍광과 차가운 공기 속의 알프스 정경에 눈이 부셨다.

묀희(Monch, 4099m) 봉 속의 동굴 속을 달리던 열차는 클라이네 샤이데크(Kleine Scheidegg, 2061m) 역에서 출발한 지 50분 후에 유럽 최고 높이의 역,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3454m) 역에 여행자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알프스에서 기차를 타고 오를 수 있는 최고봉인 융프라우요흐에는 알프스의 정상 부근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여행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화강암 암반 속에 만들어진 동굴같이 어두운 터널을 걸어 나왔다.

융프라우요흐역.기차를 타고 가장 높이 올라올 수 있는 역이다. ⓒ 노시경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의 ‘융(Jung)’은 젊음을 뜻하고, ‘프라우(frau)’는 처녀를 뜻하니, ‘융프라우’는 젊은 처녀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흐(joch)’는 아래라는 뜻이니 ‘융프라우요흐’는 융프라우 봉우리의 아래라는 뜻이다. 융프라우, 즉 젊은 처녀는 융프라우 아래의 인터라켄에 살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수녀이다.

스위스 인들은 이 젊은 수녀의 헌신적인 종교 활동에 감명을 받아,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젊은 처녀의 봉우리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베른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해발 4158m의 ‘젊은 처녀의 봉우리’는 해발 4478m의 마터호른(Matterhorn)과 함께 스위스 알프스의 4000m 급 봉우리 가운데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융프라우요흐 역에서 밖으로 나서니, 환한 신천지가 눈앞에 갑자기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점심식사를 하면서 알레치 빙하(Aletsch gletscher)를 감상하기로 했다. 나는 융프라우요흐 역에 있는 5개의 식당 중에서 셀프 서비스로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이 식당도 융프라우요흐의 바위를 파내고 들어가서 세워진 고산 지대의 식당이다.

우리가 고른 음식은 각종 야채 샐러드와 과일, 쏘시지 요리, 감자튀김, 사과 주스, 오렌지 주스였고, 생각보다 음식 가격은 비싸지 않았다. 뷔페식으로 진열된 샐러드와 과일은 우리가 직접 골랐고, 쏘시지와 감자튀김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는 이 높은 곳에 자리한 식당과 식당의 음식보다도 식당의 통유리를 통해서 비치는 빙하의 모습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알레치 빙하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융프라우와 융프라우 남동쪽의 알레치 빙하 일대는 2001년부터 알프스 산맥에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긴 알레치 빙하는 융프라우에서부터 무려 26.8km를 뻗어나가고, 주변의 알프스 만년설은 남쪽의 이탈리아까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었다. 빙하의 평균너비가 1800m에 면적이 115㎢에 이른다고 하니, 산 정상에 흐르는 빙하의 규모가 대단하다.

알레치 빙하.유럽에서 가장 긴 빙하로서 세계자연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 노시경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이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고 있었다. 이 얼음의 강은 강이지만, 꽁꽁 얼어 있었다. 얼어 있는 빙하는 1년에 약 50cm 가량 미세하게 인터라켄 반대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느림과 관조의 미학이 느껴지는 정경이다.

빙하 주변의 만년설은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하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빙하 위를 밟아보고, 걷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빙하 속으로 빠져보고도 싶었다. 머리 속에는 한계상황의 공포 속에서 빙하 위를 마구 달리는 나의 모습이 있었다. 계속 달리다 보니, 빙하가 녹은 물이 론(Rhône) 강의 상류로 흘러들고 레만(Leman) 호수와 프랑스를 지나 지중해를 향하고 있었다.

달리면서 보니, 아쉽게도 이 알프스의 거대한 빙하는 빠른 속도로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초래한 지구 온난화가 이 아름다운 빙하를 녹이고 있는 것이다. 알레치 빙하는 매년 아래쪽의 100m 정도가 녹아 없어지면서, 점점 위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빙하가 없어진 알프스,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지구 온난화가 눈 쌓인 알프스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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