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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의 배낭무게와 전생 업의 무게는 같다

평범한 아줌마 선생의 인도여행 ⑪] 마날리로 떠나다

등록|2008.01.07 12:03 수정|2008.01.08 20:49
8월 2일 목요일


귓불에 통증이 잡히고 쓰리다. 지난밤 귀에 MP3를 꼽은 채 그대로 잠들었나보다. 히말라야가 또 사라졌다. 오늘은 쉽게 돌아오지 않고 있다. 완전히 어디론가 떠나버린 걸까? 그 이름의 장중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떠나고, 들고 할 수 있다니…. 비구름이 돌아오면 히말라야가 사라지고, 구름이 사라지면 히말라야는 돌아오고. 히말라야는 그대로 그 자리인데 구름의 떠돔인 것을. 이른 아침과 가늘게 내리는 비.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려 흰 봉지 우유를 마시려고 뜯어보니, "으크~" 기다렸다는 듯이 시큼한 냄새가 확 풍긴다. 매일 아침 길거리 버스스탠드 근처에서 파는 우유인데, 단돈 12루피로 신선한 데다 고소하고 진한 맛이 일품이어서 매일 빠지지 않고 마시고 있다.

어떤 사람은 소화가 잘 안되고 설사가 난다고도 하는 걸보면 음식도 사람 따라 다른 모양이다. 어제는 욕심껏 우유 두 봉지를 사서 나머지 한 봉지를 남겨 그늘에 놓아두었는데도 벌써 발효가 되다니, 놀랍다. 이곳에서 직접 생산하는 로컬 푸드에는 방부제를 일체 쓰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이유는? 방부제 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란다. 피식.

시내로 나가기 전 잠시 들릴 곳이 있다. 아만다의 영어강습소. 다행히 영석씨 부인과 두 아이들이 미리 와서 자리하고 있었다. 어제 작별인사를 제대로 못했었다. 그냥 지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만남이었기에.

"우리 인연이 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
현옥씨는 겨우 말을 맺었지만, 내겐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티벳도서관에서의 설법

두 번째 티벳도서관 설법을 듣고 있다. 시작 전 마음을 가다듬기 위함일까? 참가자 모두 소리 맞춰 경전을 읽는다. 우리 뒤에 한 티벳 남자가 책자를 건네준다. 꼬물꼬물 무늬 같은 티벳어 글자 아래에 발음표기가 있지만 도무지 혀가 따라주질 않는다. "어어엉 으어엉…." 암튼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길 없지만 마음 속에 먼지가 모두 가라앉는 듯한 느낌.

오늘의 주제는 '고통을 경작하기'란다. 고통을 경작하다니? 대단한 단어의 조합 아닌가?
'고통을 기꺼이 마주함으로써 우리안의 정신적 각성을 깊이 있게 한다'는 뜻이란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오면 오히려 감사해야한다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찾아가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진정한 노력을 한다면 본질에 닿을 수 있는 직관이 생긴다고 한다. 현대인은 본질에 닿을 수 있는 직관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

비가 오고 있다. 스님과 샹글리라에 들어섰다. 평소완 달리 시끌시끌. 둘러보니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빈자리 하나 달랑 남겨놓고 완전점령. 펙키지로 온 한국여행자들이었다. 가이드가 맥간에 대해 그리고 돌아볼 코스와 숙소를 설명한다. 달라이라마, 남갈사원, 박수나트…. 이젠 듣지않아도 그녀의 설명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날지 알 것만 같다. 벌써 이곳 사정에 빠삭한 어엿한 빼꼼이가 된 건가?

두 잔의 생강차를 사이에 두고 스님과 마주앉았다. 스님의 유일한 저 작은 멜가방에는 없는 거 빼고 온갖 것이 모두 들어있다고 증언자들은 전한다. 아니나 다를까? 주문한 두 잔의 차에 생강가루를 듬뿍 한 수저씩 넣어주신다.

"생강가루가 감기에 좋잖아요. 이곳 맥간의 몬순철에 유용할 거 같아 직접 만들어왔어요."

한층 진한 향의 생강차는 밖에서 묻어온 빗방울의 눅눅하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풀어준다. 여행 중에는 결핍과 함께 감사함을 배우고, 작은 보시에도 감격하기 마련이다. 넉넉하고 풍부할 때보다는 결핍의 시절에 감사함을 더 잘 배울 수 있나보다. 

"스님, 고통을 경작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인가요?"
"고통이 오면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계속 보세요. 그럼 조금씩 실타래가 풀리듯 고통의 이유가 드러나요. 그런데 계속 쫓아가면 고통을 받고 있는 내가 참나인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불도가 되기 시작되는 것이지요. 꼭 머리 깎고 속세를 떠나야 수행하는 건 아니예요. 어디서나 불제자가 될 수 있어요."
"……"
"하지만, 불교에서는 스승이 필요합니다."
"죽비요? '할!'하는요?"
"하하… 네… 하지만 자신의 스승은 우리가 택한다고 택해지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스님, 전, 좋은 사람들과 곁에 함께 하는 걸 제일 큰 행복으로 여겨왔어요. 좋은 사람들 곁을 지킬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좋겠다구요. 지금도 제 소망엔 변함이 없어요…."


칼상·빠산과의 작별

맥간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칼상과 빠산과 하기로한 약속을 떠올렸다. 서둘러야했다. 우선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배낭을 짊어지고나와 체크아웃 해야한다. 칼상에게는 선물로 목걸이를 빠산에게는 화장품과 책을 한 권 샀다. 언제 들어도 늘 정갈하고 아늑한 빠산의 거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빠산의 짜이도. 칼상의 변함없는 미소도.

Shiv Shakti Guest House! 2주 동안의 맥그로드 간지. 늘 비구름에 웅크리고있던 게스트하우스의 낮은 지붕. 안녕! 겨울이 오면 이곳 게스트하우스는 또 얼마나 깊은 잠을 자게 될까? 저 지붕에 내려앉아 쌓일 눈은 또 얼마나 무거울까?
 
오랜만에 묵직한 배낭을 짊어지니 비로소 배낭족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왜 이리 묵직한지. 뒤에서 누구가가 몰래 땡기나? 델리에서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말했다. 인도에서의 배낭 무게가 전생의 업의 무게와 같다고.

칼상의 거실에 들어서는데 탁자위에는 이미 한 상 차려져 있었다. 감자조림(고추와 감자를 약간 달콤하게 함께 조림), 쌀밥(쌀알이 길고 찰기가 없는 대신 소금기와 버터로 약간 볶음), 그리고 갈색빛 도는 카레와 뜻밖에 치킨(닭도리탕과 비슷) 그리고 전통 티벳차(짜이에 버터를 녹였다). 그리고 칼상의 친동생인 티벳 스님이 소파에 비스듬이 앉아 있다.

"스님이신데 치킨을 맛있게 참 잘 드시네요…."
"하하… 사원에서는 먹을 수 없으니… 누이네 집에 와야 맛을 볼 수 있어요. 당연 오늘 같은 날은 빠지지 않고 오죠. 허허… 오늘 가신다구요? 오늘 밤 촛불행진이 있는데 함께 참가해서 보고 가셨으면 좋으셨을 텐데…."
"네? 촛불행진이요?"
"내일 아침 인도각지의 티벳 사람들이 델리로 모여요. 26일간의 단식투쟁을 응원하기 위해서죠. 맥간에서도 차량 8대가 갑니다. 저를 포함해서 스님12분이 가게 됐구요. 오늘 밤은 전야제로 아마 이곳 맥간의 모든 티벳인들이 손에 촛불을 켜고 코라를 돌겁니다."
"오! 그래요… 아쉽군요. 그 자리에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티벳에서도 촛불행진을 하는군요."


정말 아쉬웠다. 어둠속에 홀로 타오를 촛불의 심지를 바라보는 티벳인들, 그리고 그들과 뜻을 함께 하여 발맞출 세계인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촛불이 천천히 움직이며 바람 따라 흔들릴 모습을 보고 싶었다. 탑돌이 하듯 아름다운 코라 주위를 도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정말 부처가 멀리 있는 건 아닐 성싶다.

"양쫌, 이곳 티파 주소거든. 코레아 도착하면 연락하고 아이들 사진 꼭 보내구려. 양쫌 사는 동네사진도 보내주고. 그리고 내년에 꼭 다시 와요. 그 땐 아이들도 데려오구."

정말 내년에 다시 올 수나 있을까? 어쩌면, 지키지도 못할 안타까운 약속을 한 걸 완전히 깨닫기까지 일 년이란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는데.

"버스는 어디서 타지?"
"여행사 사무실에 가보니 비 때문에 길이 무너져서 버스가 이곳까지 들어오기 힘들데요. 먼저 다람살라로 가야한다는군요. 어떻게 가야 좋을까요?"


칼상은 동생스님께 다람살라가는 택시를 잡아주도록 부탁하는 거 같았다. 칼상은 선물로 티파의 기념티셔츠와 인도식 수제 수첩 한권과 하얀 카타를 건네주었다. 빠산은 늘 그 곁에 말없이 서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긴 포옹을 했다.

마날리행 버스를 기다리며

티벳스님과 함께 걸어 내려오면서 버스스탠드가 가까워옴을 안다. 맥간의 입구이자 출구. 여행자들은 안다. 이른 아침 버스스탠드에 전세버스가 들어오는 날의 풍경을. 막 도착한 버스가 한바탕 쏟아내는 철새 같은 여행자들의 첫걸음과 그들의 표정을 기억한다. 새로운 신입생들이 우르르 물결처럼 밀려 내려오면 삽시간에 맥간은 새로운 철새맞이에 분주해진다. 그러나 꼭 그만큼 여행자들은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이 버스스탠드를 찾아온다. 연어의 회귀처럼. 

맥간에 온 여행자들은 대부분 마날리로 이동한다. 맥간에 한번 발을 들여 놓은 여행자들은 마치 일방통행로처럼 마날리로 끌려간다. 그리고 그 외길은 하늘지붕 마을 레까지 이어진다. 그 길이 이어지는 사이 철새들은 서로 안부를 물으며 거리에서 낯을 익히며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한다. 그리곤 레에서의 시간이 다하면 서로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한국에 돌아오면 더욱 더 만나기 힘들다. 이곳에서 출발한 여행은 그랬다. 버스스탠드에서 성진스님일행을 다시 만났다. 마날리에서 아니면 레에서 꼭 한번은 더 만날 것이다.

맥간에서 20여분 다람살라까지 가는 택시요금은 단돈 7루피. 그런데 짐칸까지 사람을 태워 운전수 빼고 합승인원이 모두 14명. 하도 신기해서 세어본 것이다. 역쉬 ‘인도스럽다!’랄 밖에. 인도사람들, 티벳사람들 모두 살찐 사람들이 별로 없다지만 대단하다. 작은 택시에 이 많은 사람들이 포개지지 일보직전까지 가보고나니, 냄새가 계통이 없다. 이 역시도 재밌는 여행의 일부. 택시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잘도 달리는데, 풍경이 수려하다. 대충 승객이 원하는 장소에 대충 세워주는 것 같았다.
 
다람살라의 한 주유소에 마날리행 전세버스들이 주차하고 있었다. 주유소 구석에 수도꼭지물을 받아 미리 세수하고, 양치질까지 했는데도 아직 출발할 기미가 없다.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 8시30분이 돼서야 출발한단다. 이럴 때도 눈감고 하늘을 보는 수밖에, 아니면 홧병으로 여행을 망치기 십상이다. 아니, 어쩌면 시간 개념 없는 이들 인도인의 문화가 언젠가 새롭게 해석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어쨌든, 아직 한참 먼 시간. 마을을 뒤적이며 걷기로 했다.

골목 모퉁이에 한낮의 더위를 피해 그늘 안에 숨어있던 걸인들이 부스스 움직이며 저녁거리를 구하려는지 여행자들 근처를 얼씬거리고 있다. 길가는 서양여행자들의 시선이 한 걸인에게 꽂혔다. 그는 목 좋은 그늘 아래 나무판자위에서 여태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곁의 사람들 표정을 보아하니 그는 잠이 아니라 약에 취해있는 거 같다. 새우처럼 구부린 체 누워있는 그 남자 몸 위로 새까맣게 파리떼들이 들러붙어 있다. 비릿한 썩은 냄새라도 풍기는 거 같아 고개를 돌려버렸다. 파리떼 조차 몇 시간이고 꿈쩍 조차 하지 않은 이 남자에게서 살아있는 생의 냄새를 맡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몰이 아름답다. 저녁 모기가 극성이다. 

오늘밤은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맥간은 잘 있을까? 뒤에 남는 건 항상 마음에 남는 거다.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북소리 둥둥둥

어느 새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있다. 비속에 삼형제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우리가 탄 여행자버스로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여자아이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구걸하는 시늉을 하고, 가장 어린 남자아이는 재주를 넘고, 맏형인 듯한 녀석은 목에 걸고 있던 북을 두드리며 연주를 시작했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세차게 퍼붓더니 바람마저 부나보다.

여자아이의 걸친 듯 만 듯 색을 잃어버린 누더기 옷이 비에 젖어 늘어지자 어깨선이 연약하게 드러났다. 연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아직 고운 얼굴선이 빗물에 씻겨 잠시 빛나 보였다. 더위에다 습한 기운으로 모두들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좁고 답답한 공간에 질식할 듯한 인도의 공기… 용서 없는 빗줄기… 버스가 곧 출발할 태세로 엔진소리가 요란하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드는지 북치는 아이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자 둥둥둥~ 북소리가 커져가고. 재주넘는 아이는 천진하게 두 손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다. 이번에는 끝까지 냉정을 가장하던 버스 안 여행자들이 북소리에 그만 정신이 번쩍 든 걸까? 이들 마음의 동요는 버스 안에 순식간에 전염병처럼 번져간다. 여자아이 손에 꼭 쥐어진 작은 바구니에 동전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딸그락~~ 쨍그렁~ 그럴수록 북소리도 질세라 더 크게 울려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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