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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저를 두 번 낳아주셨군요!

산후우울증에 힘들어하던 내가 다시태어났던 그날

등록|2008.01.10 09:33 수정|2008.01.10 09:33

▲ 외할머니 품에 안긴 둘째아이 ⓒ 이창연


5년 전 이맘 때 첫아이를 낳았다. 추운겨울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나는 산후조리는 당연히 친정엄마 몫이라고 생각했다. 산후조리원은 왠지 미덥지 않았고 시어머님은 왠지 불편했다. 친정엄마는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기에 앞서, 친정엄마라면 당연히(?) 딸 산후조리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딱서니없는 딸내미였다. 

엄마는 워킹맘이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우리 삼남매를 키우셨다. 내가 일찍 결혼을 한 덕에 엄마는 젊은 할머니가 되셨지만 '할머니'라는 말보다는 '선생님'이 더 어울리는 직장여성이었다. 따라서 엄마는 그전까지 산후조리 수발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으셨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산후조리였지만 딸의 부탁이라 차마 거절할 수 없으셨나보다. 

'할머니'보다는 '워킹맘' 더 어울렸던 친정엄마

엄마는 산후조리를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로 '산후조리'에 대한 정보검색을 하시면서 공부를 하셨다. 육아잡지, 서적도 읽으시면서 나름대로 산후조리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다 하셨다. 이것도 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엄연히 다른 법. 첫아이 때의 일이다. 아이는 젖만 먹었다하면 무작정 토를 해댔다. 갓난아이가 토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라고 엄마는 나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토하는 모습이 장난이 아니었다. 젖을 먹인 뒤 30분후쯤 트림을 시켜서 뉘이면 수도꼭지처럼 왈칵왈칵 토해댔다. 그것도 모자라 콧구멍으로도 토를 해댔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초보엄마인 나는 물론이거니와, 초보 산후조리사인 엄마도 사색이 되었다. 엄마는 아이의 배를 여기저기 만지면서 아이의 장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 생각하셨던 듯하다. 심지어는 내가 먹고있던 호박즙까지 중단하라고 하실 정도였다. 모유를 먹는 아이였다. 혹 산모가 먹는 음식이 아이와 맞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아이는 토를 하고나면 오히려 개운하다는 듯 잘 잤다. 보채지도 않았다. 다행히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고서 우리 모녀는 안심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뒤 우리는 아이의 과식이 그 이유였음을 알게되고 젖양을 조절했다. 그러자 토하는 일은 없었다.

이렇듯 엄마와 나의 산후조리는 하나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워가며 시작됐다. 엄마 역시 초보 산후조리사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이를 키워본 엄마가 나보다 한수 위였지만 엄마도 갓난아이는 워낙 오랜만이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한달 반 동안의 산후조리에서 내가 엄마로부터 얻은 것은 신체적인 치유만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산후우울증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수술로 인한 통증과 불면증,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 부담감 등으로 인해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우울해졌다. 무엇보다 '한 생명을 내가 과연 책임지고 키울 수 있을 것인가'하는 질문에 자신이 없었다. 당시 나는 '행복한 엄마'라기 보다는 '불안한 한 산모'일따름이었다. 

엄마와 온종일을 오롯이 보낸 50일... 신생아 이후 처음

외출도 못하고 엄마와 함께 집에서만 생활하다보니 자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해보니 참 오랜만이었다. 오롯이 한달반여 동안 엄마와 함께 지낸 적이 있었던가? 철들고 난 후엔 없었다. 76년 3월, 내가 신생아였고 엄마가 산모였던 그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나를 낳고 난 후, 엄마는 직장에 복귀하셨고 직장생활 때문에 바쁘셨다. 철들고 난뒤에는 나 역시 학교 다니느라, 직장 다니느라 바빴다. 휴일 함께 있어도 각자 나름대로의 생활에 분주했다. 그러다 어느날, 이 무정한 딸내미는 훌쩍 시집을 가버렸던 것이다.

"엄마, 나 낳을 때도 이렇게 아팠어?”"
"아팠지. 그래도 니네 언니보다는 수월했다. 언니는 워낙 커서 난산중의 난산이었어."

"“첫애가 난산이었으면 둘째 때도 엄청 걱정했겠네."
"그래도 너는 작아서 수월하게 낳았어. 입덧을 심하게 해서 그렇지 다른 건 별로…."

"엄마도 허리 아팠어? 난 허리 무지아팠는데."
"엄마가 후골이잖아. 너도 후골인가보다. 네 언니도 허리가 아팠다던데."

"나는 어렸을때 젖은 잘 먹었어?"
"젖은 무슨…. 우유도 안 먹고 꼭 비싼 연유만 먹어서 일부러 그거 살려고 시내까지 나가고 그랬다."

"잠은 잘 자구?"
"잠은 잘 잤지."

아이를 재우고 엄마와 나는 나란히 누워서 27년 전의 일을 더듬었다. 가끔은 엄마도 잘 기억이 나시질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시기도 했다. 난 27년 전 신생아였던 내 모습을 상상했고 그 당시 젊은 산모였던 엄마를 상상했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엄마는 우리 낳았을 때 할머니 많이 보고 싶었겠다."
"그때는 뭐…. 워낙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생각도 안 났어."

엄마가 여섯 살 때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따라서 엄마는 친정엄마의 산후조리는 고사하고 엄마의 유년시절, 학창시절, 대학시절, 결혼식에도 돌아가신 엄마의 빈자리에 가슴이 시렸으리라. 엄마는 27년 전, 산후조리를 어떻게 하셨을까.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질문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넘 힘들지? 이렇게 힘든 건줄 알았으면 그냥 산후조리원 갈 걸 그랬나봐."
"힘든 건 없는데…. 그런데 너는 왜 갈수록 이렇게 얼굴살이 빠지냐. 피죽도 못먹은 것 처럼."

엄마! 절 두 번 낳아주셨군요, '딸'로 한 아이의 '엄마'로

그때 엄마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마음이 밝아졌다. 망가진 몸도 차츰 회복되어가고 마음도 가벼워졌다. 그 어디에서도 치유받지 못했던 마음의 '산후치료'를 엄마를 통해 받았으니 말이다.

아이를 낳아본 같은 여자로서의 동지애, 끈끈한 모녀의 정, 바로 그것이었다. 27년 전 엄마는 나를 낳으시고 제대로 된 산후조리조차 받지 못했는데 다시 27년 후 그 딸아이의 산후조리를 해주고 마음까지 다시 보듬어서 일으켜 주신 것이다. 엄마는 몸과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를 다시 일으켜주었다. 두 번 낳아주신 것이다.

산후조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이제 엄마의 무거운 짐을 벗어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했다. 남편은 짐을 가지고 차에 실으려 나가고 나는 아이를 안고 문앞에서 '엄마'를 불렀다. 그런데 엄마는 고개를 들지 않고 짐만 주섬주섬 만지작거리셨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난 엄마의 눈에 가득한 이슬방울을 보았다.

"엄마, 나 갈께."
"……."
"나 간다구."
"얼른 가라. 애기 춥겠다…. 몸 조심하고."

엄마는 고개도 들지않고 말씀하셨다. 나는 엄마 모습을 보고 울음이 왈칵 쏟아져나와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뛰쳐나와버렸다. 도망치듯이. 엄마는 내 뒤에 대고 소리치셨다.

"찬바람 쐬지 말고 옷 따뜻이 잘 입고 다녀!"

3년 전, 이맘 때 둘째아이를 낳았다. 역시 추운겨울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나는 이번만큼은 산후조리는 엄마에게 맡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출산일을 며칠 앞두고, 난 친정에 짐을 한가득 부리고 왔다. 아직도 엄마가 필요한 나는 참 철딱서니 없는 딸내미인가보다.

내게는 올해로 7살, 4살된 두 딸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미래에서 현재의 엄마와 나를 보게 된다.

'엄마, 나도 엄마처럼 잘 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산후조리 잘 하셨나요 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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