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패닉을 우습게 보지마라
중국, 러시아와 함께 영향력 확대하는 곳... 졸부 근성으로 경멸해서야
히스패닉이 가지는 세계적인 영향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세계에서 히스패닉의 인구, 문화, 자원, 군사, 외교, 경제적인 영향력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만 7년이 넘게 젊은 날을 보내고 한국에 와서도 그것을 밑천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필자 같은 사람이 히스패닉을 두둔하는 듯한 이런 말을 하기는 사실 좀 우스운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한국 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나, 프랑스 사람이 프랑스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고 영향력 있는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아전인수 격인 해석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무리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려고 하여도 히스패닉의 중요성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는 필자의 주장만이 아니고 웬만큼 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언제부턴가 라틴댄스가 어떻고 탱고가 어떻고 하는 것은 기본이요, 남미의 영웅인 체 게바라가 마치 첨단 지식인의 유행처럼 거론되더니만 급기야는 우리나라가 남미의 칠레와 처음으로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히스패닉의 중요성은 미국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문화, 예술, 음식, 정치, 경제 등의 모든 분야에서 히스패닉의 증가 현상이 가히 폭발적이다. 한국은 그러한 영향을 조금 받고 있는 정도에 불과한 정도이다. 물론 그런 조그만 영향 정도로도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히스패닉의 분위기는 심상치가 않다. 그러니 미국의 상황이 가히 짐작이 갈 만하다.
미국에서는 영어 반 스페인어 반
이곳 미국 텍사스로 와서 다시 한 번 몸으로 느끼게 된다. 길거리에서 스페인어를 듣는 것은 아주 일상이요, 모든 표지판도 거의 영어 반, 스페인어 반이라고 말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다. 국가 시스템이 영어와 함께 스페인어를 가지고 돌아가고 있다.
오히려 “Se habla Español (스페인어 가능)”이라는 광고나 표지판이 있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미국 남부는 스페인어가 공용어화 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히 미국 전체가 히스패닉과 스페인어로 가득차 있다.
스페인어가 각 도시에서 공용어로 공식화되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작년에는 히스패닉의 인구가 흑인을 넘어서서 백인에 이어 미국의 제2의 다수 인종이 되었다. 그들의 경제 효과는 더욱 폭발적이다.
미국의 각종 소비시장 공략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히스패닉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없을 것이다. 가히 여기가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헛갈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티브이 광고에서 스페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Univisión(우니비시온)이라는 스페인어 방송은 미국의 대중매체 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체로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중남미의 정치적인 중요성,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뿐이랴. 정치적으로도 세계무대에서 히스패닉이 가지는 중요성을 다시 이야기 하는 것은 구태의연할 정도다. 브라질이 21세기에 가장 강력하게 부상하는 국가라는 점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 외교 행보 그리고 이와 관련한 석유와 에너지의 민족주의는 중남미 좌파를 세계적으로 중요한 주목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앞으로 러시아나 중국처럼 혹은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대상으로 인식하게 될 지역이 중남미라는 점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중남미가 가진 자원과 환경은 21세기의 가장 큰 경제 요소가 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아마존의 공기, 파타고니아의 자연환경이 다 중남미의 미래산업이 된다. 그때가 되면 세상의 히스패닉은 오늘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중남미 깔보기는 여전하다. 그런데, 사실 좀 서론같지 않은 서론이 길어졌는데 필자는 히스패닉과 중남미의 중요성이 이런 저런 현상과 이유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만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리고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은 이를 온전히 인식하고 그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서양사람들에 의하여 열등하게 그려진 중남미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결과이며, 그들의 가치관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문화적인 무지의 소치이고,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하려는 한국의 저급한 물질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론으로 쉽게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사람들의 히스패닉 깔보기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결국 아무리 경고를 해도 들은 체 만 체 하다 결국은 큰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나 사후약방문을 쓰는 우리나라의 분위기 상 결국 히스패닉 깔보기는 많은 문제와 희생을 통해서만이 변화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려 함이다. 물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를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과 태도에 달린 것이지만 말이다.
히스패닉 깔보기는 서양중심의 식민지 사관에서 나왔다
세계의 모든 인간들은 공통의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는 그냥 사변적인 수준의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면에서 그리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람들은 중남미 사람들을 마치 속된 말로 “후진나라에 사는 열등한 인간” 정도로 취급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인종차별이 중남미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로 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다 보니 현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미국의 백인은 멋있고, 똑똑하고, 합리적이며, 성실한 사람들이고, 아니 최소한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고, 히스패닉은 아예 그럴 수 있는 인간이 못 된다는 인종적인 차별이 근간에 깔려 있다.
서양의 식민지적 사고관이 가진 전형을 우리나라는 아무런 검증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생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 친구가 “저 놈 나쁜 놈이야"라고 하니까 모두 그냥 그렇게 인식하고 그런 선입견을 전제로 그를 대하고 평가하는 것과 같다. 즉, 우리의 히스패닉 깔보기는 전형적인 서양중심적인 식민지 사관이 만들어낸 결과다.
자기중심적 가치관이 히스패닉을 깔보게 만든다
다음으로 이러한 한국 사람들의 히스패닉 깔보기의 원인 중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자기위주의 가치관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옛날 일을 좀 생각해 보자. 60년대 70년대의 한국 사람들은 그저 자나 깨나 돈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을 가장 큰 미덕으로 알았다.
집도 사기 전에 자동차를 가지는 것은 미친 짓이고, 몸보다는 돈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였고, 자식들과 주말에 놀아주기보다는 회사 일을 하는 것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있는 행동이었으며, 돈 많이 주는 회사에서 일사천리로 진급하는 것이, 주5일 근무하고 소위 말하는 '칼퇴근'하는 것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정적, 동적인 모든 면에서 행복이라는 지표가 생활의 가장 큰 가치가 되어가고 있다. 이전 우리의 가치관이 얼마나 미련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있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에 얽매이는 일방적인 가치관에 대한 고집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그리고 이것이 중남미 사람들을 게으르고, 미련하며, 불성실하고 바보 같은 인간으로 만든다. 중남미 사람들은 일해서 돈 벌기보다는 그저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를 우리는 아직도 일방적으로 재단하여 비난하고 있다. 극히 이기적이고 치졸한 가치에 대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히스패닉은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가족과 주말에 야외에 나가는 것을 더 중요한 가치로 두고 생활한다. 그런 그들의 가치관에 우리는 항상 게으르다느니 그래서 못산다느니 하는 비난의 돌을 던져왔다.
졸부의 거들먹거림이 돈 없는 히스패닉을 얕잡아보게 만든다
그 다음으로 히스패닉을 근본적으로 경시하는 태도의 저변에는 돈 문제가 깔려있다. 여기에는 돈 없는 사람을 그야말로 '병신' 취급하는 우리의 싸구려 물질만능풍조가 크게 한 몫을 한다. 비싼 외제차 타고 다니는 사람은 왠지 뭔가 있어 보이고, 경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왠지 '쪼다'처럼 보이는, 그런 어쩌지 못하는 우리의 속물적인 근성이 어디 가랴.
잘사는 백인 사람들에 비하여 못사는 히스패닉 사람들이 슈퍼에서 주말에 가족과 놀러가서 먹을 음식을 잔뜩 담는 모습을 보며 '못사는 것들이 그저 처먹는 건 더럽게 밝히네'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의 생리적인 속물근성이다.
미국에 사는 히스패닉이 한국사람들을 좋아할 리 없다
좌우간에 위에 들은 세가지 이유들과 같은 것들로 하여 한국사람들의 히스패닉에 대한 경시태도는 바뀔 줄 모른다. 그런 모습은 아주 노골적이다. 그들보다 경제적으로 좀 더 나은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굳이 친절하거나, 잘해주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들을 존중해 줄 필요도 없고 그저 잘 부려먹고 도둑질 안 하게 감시만 잘하면 될 일이다.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사람들을 좋아하는 히스패닉을 별로 만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들과 잘 지내며 서로 존중하고 협력해 나아가는 한국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히스패닉을 자신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일꾼이나 하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며 상호관계도 그러한 점을 전제로 하여 형성된다.
실제 미국 내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각종 사업의 말단은 대부분 히스패닉이 담당을 하고 있다. 청소부에서 접시닦이, 식모와 페인트공 등 소위 미국에서의 3D 업종은 대부분 히스패닉의 몫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히스패닉이 가진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리 없다.
사람은 누구나 눈치가 있는 법이다. 비록 한국말을 못 알아들어도 그들에게 반말로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치며 마구 대하는 한국 사람들의 분위기를 그들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하루가 다르게 히스패닉의 수와 영향력은 증가하는데 그런 히스패닉이 한국인에 대하여 가진 이미지는 점점 나빠만 간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앞으로 무슨 사단이 나도 많이 날 판이다. 나름 단결력도 가지고 있으며 꾸준하고 은근하게 굽힐 줄 모르는 중남미 사람들은 점점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그들을 마구 대하였던 것을 후회해 보아야 별로 소용이 없게 될지도 모른다. 히스패닉 정치인, 경찰관, 법조인, 경제중요인물 등의 꾸준한 증가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문화적인 현상은, 다시 말하면 잔소리고 말이다.
미국에 도착해 며칠을 묵은 숙소의 주인이 우연찮게도 한국인이었다. 그 분에게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으랴만 그 분의 넊두리가 심상치 않아 소개하고 싶다.
“아니, 여기가 미국이면 영어를 배워야지 이곳 호텔에 와서 왜 스페인어 못 하느냐고 오히려 자기들이 프론트에서 큰소리를 치는지 짜증이나 죽겠어요.”
내 생각에 그분은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게 배운 영어도 버거운데 스페인어까지 배울 생각은 없는 듯해 보였다.
히스패닉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보자
당장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들과의 공존을 위해, 그들의 문화와 생활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그것이 스페인어가 되었든, 아니면 음식을 잔뜩 싸 짊어지고 주말에 그들 가족과 같이 나들이를 가는 것이 되었든, 좌우간 그것이 어떤 무엇이 되었건 간에 그들을 이해하고 같이 살아가려는 노력이라도 좀 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세계 속에서 증가일로에 있는 히스패닉과 함께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첫 시작이 될 것이다. 이는 경제적인 이유로도 당연한 것이요, 인문적인 필요,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우리의 정성일 것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나, 프랑스 사람이 프랑스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고 영향력 있는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아전인수 격인 해석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무리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려고 하여도 히스패닉의 중요성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는 필자의 주장만이 아니고 웬만큼 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언제부턴가 라틴댄스가 어떻고 탱고가 어떻고 하는 것은 기본이요, 남미의 영웅인 체 게바라가 마치 첨단 지식인의 유행처럼 거론되더니만 급기야는 우리나라가 남미의 칠레와 처음으로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히스패닉의 중요성은 미국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문화, 예술, 음식, 정치, 경제 등의 모든 분야에서 히스패닉의 증가 현상이 가히 폭발적이다. 한국은 그러한 영향을 조금 받고 있는 정도에 불과한 정도이다. 물론 그런 조그만 영향 정도로도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히스패닉의 분위기는 심상치가 않다. 그러니 미국의 상황이 가히 짐작이 갈 만하다.
이곳 미국 텍사스로 와서 다시 한 번 몸으로 느끼게 된다. 길거리에서 스페인어를 듣는 것은 아주 일상이요, 모든 표지판도 거의 영어 반, 스페인어 반이라고 말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다. 국가 시스템이 영어와 함께 스페인어를 가지고 돌아가고 있다.
오히려 “Se habla Español (스페인어 가능)”이라는 광고나 표지판이 있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미국 남부는 스페인어가 공용어화 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히 미국 전체가 히스패닉과 스페인어로 가득차 있다.
스페인어가 각 도시에서 공용어로 공식화되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작년에는 히스패닉의 인구가 흑인을 넘어서서 백인에 이어 미국의 제2의 다수 인종이 되었다. 그들의 경제 효과는 더욱 폭발적이다.
미국의 각종 소비시장 공략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히스패닉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없을 것이다. 가히 여기가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헛갈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티브이 광고에서 스페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Univisión(우니비시온)이라는 스페인어 방송은 미국의 대중매체 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체로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중남미의 정치적인 중요성,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뿐이랴. 정치적으로도 세계무대에서 히스패닉이 가지는 중요성을 다시 이야기 하는 것은 구태의연할 정도다. 브라질이 21세기에 가장 강력하게 부상하는 국가라는 점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 외교 행보 그리고 이와 관련한 석유와 에너지의 민족주의는 중남미 좌파를 세계적으로 중요한 주목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앞으로 러시아나 중국처럼 혹은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대상으로 인식하게 될 지역이 중남미라는 점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중남미가 가진 자원과 환경은 21세기의 가장 큰 경제 요소가 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아마존의 공기, 파타고니아의 자연환경이 다 중남미의 미래산업이 된다. 그때가 되면 세상의 히스패닉은 오늘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중남미 깔보기는 여전하다. 그런데, 사실 좀 서론같지 않은 서론이 길어졌는데 필자는 히스패닉과 중남미의 중요성이 이런 저런 현상과 이유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만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리고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은 이를 온전히 인식하고 그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서양사람들에 의하여 열등하게 그려진 중남미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결과이며, 그들의 가치관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문화적인 무지의 소치이고,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하려는 한국의 저급한 물질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론으로 쉽게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사람들의 히스패닉 깔보기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결국 아무리 경고를 해도 들은 체 만 체 하다 결국은 큰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나 사후약방문을 쓰는 우리나라의 분위기 상 결국 히스패닉 깔보기는 많은 문제와 희생을 통해서만이 변화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려 함이다. 물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를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과 태도에 달린 것이지만 말이다.
히스패닉 깔보기는 서양중심의 식민지 사관에서 나왔다
세계의 모든 인간들은 공통의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는 그냥 사변적인 수준의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면에서 그리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람들은 중남미 사람들을 마치 속된 말로 “후진나라에 사는 열등한 인간” 정도로 취급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인종차별이 중남미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로 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다 보니 현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미국의 백인은 멋있고, 똑똑하고, 합리적이며, 성실한 사람들이고, 아니 최소한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고, 히스패닉은 아예 그럴 수 있는 인간이 못 된다는 인종적인 차별이 근간에 깔려 있다.
서양의 식민지적 사고관이 가진 전형을 우리나라는 아무런 검증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생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 친구가 “저 놈 나쁜 놈이야"라고 하니까 모두 그냥 그렇게 인식하고 그런 선입견을 전제로 그를 대하고 평가하는 것과 같다. 즉, 우리의 히스패닉 깔보기는 전형적인 서양중심적인 식민지 사관이 만들어낸 결과다.
자기중심적 가치관이 히스패닉을 깔보게 만든다
다음으로 이러한 한국 사람들의 히스패닉 깔보기의 원인 중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자기위주의 가치관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옛날 일을 좀 생각해 보자. 60년대 70년대의 한국 사람들은 그저 자나 깨나 돈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을 가장 큰 미덕으로 알았다.
집도 사기 전에 자동차를 가지는 것은 미친 짓이고, 몸보다는 돈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였고, 자식들과 주말에 놀아주기보다는 회사 일을 하는 것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있는 행동이었으며, 돈 많이 주는 회사에서 일사천리로 진급하는 것이, 주5일 근무하고 소위 말하는 '칼퇴근'하는 것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정적, 동적인 모든 면에서 행복이라는 지표가 생활의 가장 큰 가치가 되어가고 있다. 이전 우리의 가치관이 얼마나 미련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있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에 얽매이는 일방적인 가치관에 대한 고집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그리고 이것이 중남미 사람들을 게으르고, 미련하며, 불성실하고 바보 같은 인간으로 만든다. 중남미 사람들은 일해서 돈 벌기보다는 그저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를 우리는 아직도 일방적으로 재단하여 비난하고 있다. 극히 이기적이고 치졸한 가치에 대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히스패닉은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가족과 주말에 야외에 나가는 것을 더 중요한 가치로 두고 생활한다. 그런 그들의 가치관에 우리는 항상 게으르다느니 그래서 못산다느니 하는 비난의 돌을 던져왔다.
졸부의 거들먹거림이 돈 없는 히스패닉을 얕잡아보게 만든다
그 다음으로 히스패닉을 근본적으로 경시하는 태도의 저변에는 돈 문제가 깔려있다. 여기에는 돈 없는 사람을 그야말로 '병신' 취급하는 우리의 싸구려 물질만능풍조가 크게 한 몫을 한다. 비싼 외제차 타고 다니는 사람은 왠지 뭔가 있어 보이고, 경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왠지 '쪼다'처럼 보이는, 그런 어쩌지 못하는 우리의 속물적인 근성이 어디 가랴.
잘사는 백인 사람들에 비하여 못사는 히스패닉 사람들이 슈퍼에서 주말에 가족과 놀러가서 먹을 음식을 잔뜩 담는 모습을 보며 '못사는 것들이 그저 처먹는 건 더럽게 밝히네'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의 생리적인 속물근성이다.
미국에 사는 히스패닉이 한국사람들을 좋아할 리 없다
좌우간에 위에 들은 세가지 이유들과 같은 것들로 하여 한국사람들의 히스패닉에 대한 경시태도는 바뀔 줄 모른다. 그런 모습은 아주 노골적이다. 그들보다 경제적으로 좀 더 나은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굳이 친절하거나, 잘해주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들을 존중해 줄 필요도 없고 그저 잘 부려먹고 도둑질 안 하게 감시만 잘하면 될 일이다.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사람들을 좋아하는 히스패닉을 별로 만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들과 잘 지내며 서로 존중하고 협력해 나아가는 한국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히스패닉을 자신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일꾼이나 하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며 상호관계도 그러한 점을 전제로 하여 형성된다.
실제 미국 내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각종 사업의 말단은 대부분 히스패닉이 담당을 하고 있다. 청소부에서 접시닦이, 식모와 페인트공 등 소위 미국에서의 3D 업종은 대부분 히스패닉의 몫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히스패닉이 가진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리 없다.
사람은 누구나 눈치가 있는 법이다. 비록 한국말을 못 알아들어도 그들에게 반말로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치며 마구 대하는 한국 사람들의 분위기를 그들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하루가 다르게 히스패닉의 수와 영향력은 증가하는데 그런 히스패닉이 한국인에 대하여 가진 이미지는 점점 나빠만 간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앞으로 무슨 사단이 나도 많이 날 판이다. 나름 단결력도 가지고 있으며 꾸준하고 은근하게 굽힐 줄 모르는 중남미 사람들은 점점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그들을 마구 대하였던 것을 후회해 보아야 별로 소용이 없게 될지도 모른다. 히스패닉 정치인, 경찰관, 법조인, 경제중요인물 등의 꾸준한 증가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문화적인 현상은, 다시 말하면 잔소리고 말이다.
미국에 도착해 며칠을 묵은 숙소의 주인이 우연찮게도 한국인이었다. 그 분에게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으랴만 그 분의 넊두리가 심상치 않아 소개하고 싶다.
“아니, 여기가 미국이면 영어를 배워야지 이곳 호텔에 와서 왜 스페인어 못 하느냐고 오히려 자기들이 프론트에서 큰소리를 치는지 짜증이나 죽겠어요.”
내 생각에 그분은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게 배운 영어도 버거운데 스페인어까지 배울 생각은 없는 듯해 보였다.
히스패닉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보자
당장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들과의 공존을 위해, 그들의 문화와 생활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그것이 스페인어가 되었든, 아니면 음식을 잔뜩 싸 짊어지고 주말에 그들 가족과 같이 나들이를 가는 것이 되었든, 좌우간 그것이 어떤 무엇이 되었건 간에 그들을 이해하고 같이 살아가려는 노력이라도 좀 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세계 속에서 증가일로에 있는 히스패닉과 함께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첫 시작이 될 것이다. 이는 경제적인 이유로도 당연한 것이요, 인문적인 필요,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우리의 정성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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